트럼프를 지원하라!”

15만 평양 시민들을 향한 문재인 대통령의 감동적인 평양 5·1경기장 연설과 남북 정상 부부들의 백두산 천지 산책 등 매우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세계로 실황 생중계된 18~20일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 내지 핵심 포인트를 이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트럼프 지원을 위한 잘 기획된 이벤트. 물론 남북 합작의 이런 파격적인 트럼프 일병 구하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비밀은?

 

 

단 한 가지, 미국 승인없이는 모든 게 물거품

이번 회담의 ‘성과’는 정말 화려하다. 군사분계선부터 5㎞ 내 포병사격·기동훈련 전면 중지와 해상 완충수역 설정, 20~40㎞ 비행 금지구역 설정 등을 토대로 한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사실상의 종전선언’), 철도·도로 연결 올해 안 착공식, 개성공단·금강산 관광사업 정상화, 동·서해 경제관광 특구 조성,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한반도의 안보·경제 등 전반적 정세지형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내용들이 다수 합의, 발표됐다.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공표됐다. 2000년의 6·15공동선언이나 2007년의 10·4 합의 이후 조성된 남북 간 합의나 진전들을 폐기상태에서 되살리거나 거기서 더 나아간 새로운 조처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새 경제지도 구상, 그리고 핵·경제 병진 노선에서 경제 우선 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정한 것으로 보이는 북의 경제부흥 구상 모두에 긴요한 내용들이다. 그대로 실행되기만 하면 한반도 안보·군사 및 경제 정세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정치 분야만 빼고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의 남북 통합, 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통합, 사실상의 통일 쪽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게 해줄 내용들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체 정세도 크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그것들이 제대로 실행되면 우리는 머지않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수도 있다.

남북 두 정상들이나 집권세력의 열의, 기업 총수들을 비롯한 그 수행원들과 이들을 맞은 북의 경호원에서부터 고위관리들의 표정, 동원된 것이긴 하나 생중계 화면에 클로즈업돼 잡힌 5·1경기장 15만 평양시민의 얼굴 표정과 몸짓들을 통해서도 확인된 열기와 열망 등으로 볼 때 당장 실행에 옮겨도 좋을 정도로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은 듯하다. 문 대통령 지지율 급등으로 나타난, 방북에 맞춰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나 외신들을 통해 전달되는 해외 반응 등 나라 안팎 상황을 봐도 이런 남북 접근노력을 반대하거나 딴지 놓고 방해할 세력은 없는 것 같다.

딱 한 가지만 빼고. 그런데 이 단 한 가지가 결정적이다. 이것 없이는 위에 열거한 모든 청사진들이 다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이미 다 알다시피 그것은 이런 남북의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미국의 지지요 ‘승인’이다. 미국의 ‘승인’ 없이는 그 모든 것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이게 우리의, 남북의 현실이다.

예컨대 2000년대 들어 올해까지 계속 발표된 일련의 대북 제재들은 북 주민의 기본 생존조차 위협할 정도의 극히 제한된 물자와 인적 거래·교류를 뺀, 사실상 거의 전면적인 대외 거래·교류 금지를 강제하고 있다. 유엔 이름으로 또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연합(EU) 등이 개별적으로 가동 중인 여러 이름의 이런 대북 제재 조치들은 위반 판정을 받을 경우 당사자인 북뿐만 아니라 외부의 거래당사자, 그 거래와 연관된 여타 관계자나 기업들, 국가까지 줄줄이 엄청난 손실을 입거나 낭패를 당하게 된다. 그 위반 여부를 판정하는 주체는 미국이다. 유엔이나 EU, 일본 등 국제기관, 지역공동체나 개별 국가들도 모두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 최종 판정권자는 사실상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정권 때 미국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이란의 핵 개발 포기와 제재 해제를 맞교환한 ‘이란 핵합의’ 파기가 한 전형이다. 트럼프 정권이 지난 5월 함께 서명한 다른 5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이란 핵합의를 단독으로 파기한 결과는 실로 파괴적이다. 유럽국가들과 러시아 중국은 미국의 탈퇴에도 합의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함께 서명한 유럽국가들뿐만 아니라 이란과 거래하는 주요국들 즉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들의 기업도 지난 몇 개월간 이란과의 교역을 차례차례 중단하고 있고 이란은 그 여파로 아기 기저귀까지 구할 수 없는 물품 품귀와 인플레, 통화가치 하락으로 산업경제 전반이 대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이는 이란의 정치지형까지 흔들고 있다. 11월 초부터 이란의 최대 수입원이라 할 원유 등 에너지 거래에 대한 제재까지 발동되면 상황은 더욱 파국적으로 치닫게 될 공산이 크다. 이란은 벌써 핵 개발 재개를 공언하고 있다. 거래를 계속할 러시아나 중국 쪽이 일부 숨통을 틔워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제한적일 것이다. 미국은 자국 국내법으로 제재 대상국 기업들과 거래하는 외국 기업 또는 그들 기업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들까지 제재할 수 있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러시아, 중국 기업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여전히 세계 1위의 경제대국 미국은 세계 금융산업도 장악하고 있어서 미국이 규정한 제재 규정 위반자들은 개인이나 기업, 국가를 불문하고 당장 거래의 대금 결재과정부터 막히게 된다. 세계의 유력 은행들을 비롯한 금융·실물 기업들이 모두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파산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사실상 모든 거래(온라인 거래도)의 중단이다. 미국은 북 노동자의 해외 송출조차 막고 있다.

2005년 북의 자금세탁을 이유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 계좌 동결 조치와 그 여파로 BDA 계좌 인출사태, 이를 막기 위한 BDA의 전면 계좌동결 사태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미국은 그런 규제를 실행할 막강한 경제력과 국제 금융시장 장악력, 이 모든 것을 힘으로 뒷받침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고 있다. 제재의 전면에 나선 유엔이나 국제통화기금 등의 국제기구나 EU, 일본 등 유력 국가들, 기업들이 거의 모두 미국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거나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말하자면 미국 편이거나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다.

 

트럼프 일병 구하기와 남북 정상회담

이런 상황과 이번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트럼프 일병 구하기’가 어떤게 연결돼 있다는 얘긴가.

먼저 미국 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11월 6일의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러시아가 지난 미국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을 낙선시키기 위해 트럼프 지원 비밀공작을 벌였다는 ‘러시아 스캔들’과 트럼프 개인의 성추문으로 그의 대선캠프 본부장과 개인 변호사 등 측근들이 기소돼 최근 유죄 결정이 났다. 또 그가 지명한 대법원 판사 후보자가 젊었을 때 저지른 성폭행 시도 사실 폭로, 말하자면 ‘미투’로 탈락위기에 처해 있다. 뿐만 아니라 읽고 나면 미국의 안전을 신에게 빌고 싶어진다는 ‘트럼프의 기행’들을 폭로한 밥 우드워드의 <공포-백악관의 트럼프> 출간과 트럼프 정권 내부 고위인사의 자극적인 <뉴욕타임스> 익명 기고 파문까지 불거졌다. 트럼프 성추문 상대 여성의 폭로 저서도 곧 나올 모양이다.

중간선거가 다가오면서 민주당과 주류 언론을 비롯한 트럼프 반대 진영(일부 공화당 온건파도 가세)의 반트럼프 공세는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이로 인해 트럼프 지지율이 다소 떨어졌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임기 2년의 하원의원 선거 결과는 지금의 공화당 우세가 민주당 과반으로 원내 비율이 뒤바뀔 것으로 전망되지만, 중간선거에서 하원의 이런 역전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여론상 계속 수세에 몰릴 경우 공화당 우위의 상원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탄핵까지 가려면 상원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일 정도로 상원의 공화당 장악은 탄탄하지만 선거에서 지면 더 거세질 역풍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중간선거 결과 탄핵까진 가지 않더라도 공화당 참패로 귀결될 경우 트럼프는 그의 재선전략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당장의 정책 집행들도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그에게는 지금의 수세국면을 반전시킬 카드들이 필요하다. 그런 카드들 중에서 트럼프가 의욕적으로 도발한 미중 ‘무역전쟁’, 이란 핵합의 파기 등이 대외정책 분야의 강력한 카드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유력한 카드가 북핵(비핵화) 카드다. 북핵 카드는 미중 무역전쟁과도 얽혀 있고 이란 핵합의 파기와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북핵 카드는 전임 오바마 민주당 정권이 손도 대지 못한 것을 자신이 해결했다며 내세울 수 있는 회심의 득점카드로 활용할 수 있고, 중국의 대북 개입을 문제 삼아 무역전쟁에서 대중 공세 카드로도 활용할 수 있다. 북핵 카드는 그가 계산한 대로 풀려갈 경우, 미국 내 반트럼프 진영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는 이란 핵합의 파기를 정당화하는데도 매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전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감행에서도 보듯 전임들에 비해 매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그의 대북 접근방식은, 민주당과 주류 언론이 그의 ‘변덕’과 ‘무지’를 비판하면서 총공세를 펼치고 있는 트럼프 외교정책 비판 효과를 반전시킬 수 있는 카드로도 활용될 수 있다. 물론 성공할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성공이란, 북의 비핵화와 북미 수교까지 가는 관계 정상화를 달성하거나 거기로 가는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정도면 중간선거에서 상당한 득점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폼페이오 4차 방북 취소의 비밀

‘트럼프 일병 구하기’는 지난 8월 24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예정된 방북 직전 그 방북을 취소하게 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띄우기 무렵부터 시작됐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이번에는 북한에 가지 말라고 요청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그는 썼다. 그리고 “게다가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 악화된 시점에서 중국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비핵화 진전에 도움을 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폼페이오 장관은 중국과의 무역 문제가 해결된 뒤 가까운 미래에 북한으로 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길 고대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트럼프는 그에 바로 앞서 전달된 김영철 북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편지를 받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6월 12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성사 이후 교착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북과 미국이 고위급 친서를 주고받는 ‘친서 외교’가 이어진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친서를 통한 공방의 핵심은 미국의 ‘선 비핵화 완료 후 제재해제 내지 완화’(선 비핵화, 후 제재해제)와 북의 ‘비핵화 단계적 실행과 그에 상응한 단계적 제재 완화 및 체제안전 보장 조치’(비핵화와 제재해제 단계적 동시조치). 그 둘 사이에 접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트럼프는 그에 앞서 장기적, 단계적 비핵화를 시사하는 발언들을 여러 차례 했고,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4·27 정상회담 등 남북 정상회담들의 성과를 대폭 수용함으로써 사실상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트럼프가 “(비핵화를) 20%만 진행하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는 비핵화의 초기조치로 핵심적 핵 능력을 제거하는 프런트 로딩(front-loading)을 암시한 것인데, 북미 정상이 비핵화 초기조치를 그런 수준으로 조율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되돌릴 수 없게 되는 지점 20%, 양적 축적을 거듭하던 사태 진행이 어느 지점에서 질적 비약을 하면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불가역적인 지점, 바로 ‘티핑 포인트’다. 트럼프의 발언은 비핵화 실행 정도가 그 티핑 포인트만 넘어가면 제재해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걸로 읽혔다.

폼페이오 4차 방북은 바로 그 절차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측근들의 유죄 결정이 내려지고 우드워드의 책 출간 등이 예고된 상황에서 미국 국내정치 상황이 트럼프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반트럼파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트럼프는 그런 상황에서 북의 비핵화와 제재해제 단계적 동시진행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당장의 정치적 부담이 커질 뿐만 아니라 북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그의 주요 득점 카드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자신에 대한 공세를 완화하고 북핵 카드를 살리려면 북미 정상 차원의 사전조율을 거친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트럼프 일병 구하기’ 작전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9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서훈 국정원장 등 4명의 특사가 평양으로 갔고, 정 실장은 그 뒤 바로 중국으로 가서 방북 결과를 설명했다. 그때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2021년 1월) 내”에 비핵화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비핵화 시한을 구체적으로 공표한 것이다.

남쪽의 특사 방북이 미국과의 사전조율 없이 이뤄졌을까. 미국과 늘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는 문 대통령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얘기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20일 방북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문 대통령이 도착 뒤 바로 프레스센터에서 한 ‘방북 결과 보고’에서, 그는 북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동창리 미사일 시설 영구 폐쇄와 유관국 전문가들 참관,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를 전제로 한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를 얘기하면서 공동선언문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24일의 뉴욕 한미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할 북쪽 얘기가 따로 있다는 점을 밝혔다. 따로 있다는 게 뭘까?

흥미롭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20일 남북 정상의 ‘평양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1시간 반만인 새벽 0시께(미국시각 19일) 자신의 트윗에 “김정은이 핵 사찰을 허용하고(allow Nuclear inspections), 국제 전문가들 참관하에 (미사일)실험장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해체하기로 합의했다”며 “좋은 소식”을 띄웠고, 백악관 출입 기자들에겐 “북한 문제에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고 자랑했다.

뒤이어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축하하면서 “우리는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참관 아래 영변의 모든 시설을 영구히 해체하는 것을 포함,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재확인한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폼페이오 또 “이런 중요한 약속들을 토대로 미국은 북미 관계를 전환하기 위한 협상에 즉각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며 “오늘 아침 카운터파트인 리용호 외무상을 다음주 뉴욕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 또 “우리는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능한 한 빨리 만날 것을 북한의 대표자들에게 요청했다”고도 했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멈춰 선 채 삐걱대는 듯 보인 비핵화와 북미 정상화 프로세스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 공동선언에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으로만 돼 있는 부분을 트럼프 대통령은 선언이 발표되자 마자 “핵 사찰”이라고 했고,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참관”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는 평양선언문 작성 전후 또는 발표 직후 미국에 바로 통보됐거나 그 훨씬 전인, 문 대통령 일행이 평양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조율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방북 특사단이 5일 평양에 가서 협의한 것도 그 문제였고, 정의용 실장이 중국에 가서 설명하고 합의를 받아낸 것도 그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추측일 뿐이다. 중국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 보도를 중국 관영 미디어들이 비교적 간소하게(?) 내보낸 것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11~13일)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주석이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해결할 “지금 당사자”를 “북, 한국, 미국”이라고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중국은 이번엔 가능한 한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사렸다.중국 탓이라며 북미 종전선언을 주저해 온 미국에 중국은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을 테고, 한국의 특사도 그런 사정을 충분히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지 않았을까. 그게 길게 보면 중국에도 이득이니까.

문 대통령이 ‘방북 보고’ 기자회견에서 얘기한, 공동선언문에 넣진 않았지만 24일의 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 또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이 역시 추측건대, 문 대통령이 남북과 미국, 중국이 각자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얘기한 ‘종전선언’에 대한 개념정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전쟁상태, 적대관계를 끝내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면서, 평화협정으로 가는 도정의 출발점으로, 그 도정에서는 지금의 정전협정이 유효하다고 했고, 따라서 유엔사나 주한미군 문제는 종전선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오직 한미동맹 당사국인 한국과 미국 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주한미군이나 유엔사 해체 문제를 종전선언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문제는 종전선언을 거쳐 나중에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나 거론될 수 있는 문제다, 그때도 한미동맹 차원에서 논의하고 결정할 문제이지 남북 간의 평화 프로세스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런 종전선언 개념정의에 김정은 위원장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티핑 포인트, 불가역적인 비핵화 초기 20%

미국 내 강경파나 반트럼프파가 문제삼고 있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즉 종전선언이 유엔사 해체나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 것이라거나 한미동맹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과 호응하는 한국 내 보수세력도 마찬가지. 민주당과 주류 언론을 비롯한 미국 내 ‘리버럴’세력에 심한 거부감을 보여 온 한국의 보수우파세력이 지금 반트럼프 진영으로 결속한 그들 미국 리버럴의 한반도 종전선언 반대를 지지하고 있는 건 역설적이다.

정치적 곤경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북의 종전선언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이런 공세를 피해가면서 북 비핵화-북미관계 정상화 프로세스를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중간선거 전에, 가능한 한 일찍.

그러려면 북의 종전선언과 비핵화-제재해제 동시진행 요구를 수용하되 반트럼프파의 공세를 피해갈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종전선언과 동창리미사일 시설 영구 폐쇄와 유관국 전문가들 참관,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를 전제로 한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다. 동창리 시설 폐쇄에서 이번에 새로 부가된 조건은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트럼프식으로 말하면 미국과 IAEA의 사찰이다. 그리고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인데, 거기에는 미국의 상응한 조치가 전제조건으로 붙어 있다.

동창리와 영변 시설 폐기는 트럼프가 싱가포르 회담 뒤 얘기한 20%, 대북 제재 해제를 시작할 수 있는 티핑 포인트에 도달하기 위한 필요 최소한의 조치일 수 있다. 그 티핑 포인트까지만 가면 반대세력의 공세도 별로 먹히지 않을 것이다. 즉 반대할 명분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정치적 부담 없이 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본격 가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창리의 경우 미국과 IAEA 사찰을 북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영변의 경우 시설 폐기 수준에 상응한 제재 해제 조치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는 북의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문제가 사전에 합의돼야 한다.

문 대통령은 그런 문제를 김정은 위원장과 논의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의 의견을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남북이나 미국이 큰 성공이라며 이번 남북 정산회담을 반기는 걸로 추측컨대, 미국과 북은 기본 줄기에선 이미 그런 합의에 도달했고 남은 건 미세한 조정 정도가 아닐까. 예컨대 동창리 참관단에 미국과 IAEA 전문가들 포함 여부 최종 확인과, 영변 핵시설 폐쇄에 상응한 미국의 조치 수준을 정하는 것이다. 영변 시설의 경우 북이 영구 폐쇄에 들어가면 미국도 동시에 제재 해제를 실제로 시작할지, 시작한다면 어느 수준일지를 김정은 위원장은 문 대통령과 상의하지 않았을까. 문 대통령이 그 내용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함께 트럼프의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20%의 티핑 포인트 지점을 함께 찾아내는 것, 그것이 24일 뉴욕 한미 정상회담의 주 의제가 아닐까. 폼페오와 이영호 장관,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와 북 협상파트너도 그 세부사항을 조율할 것이다.

‘트럼프 일병 구하기’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담이 크게 부각되면 될수록 좋다. 문 대통령 순안공항 도착부터 백화원 초대소까지 가는 연변의 대대적인 환영 인파, 파격적인 두 정상의 카퍼레이드, 정상회담과 평양선언문 발표 장면이 세계로 생방송 되고, 나아가 5·1경기장 15만 인파 앞에서의 문 대통령 연설이라는 파격, 백두산 천지 두 정상 부부동반 산책이라는 초대형 이벤트까지 동화상으로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송출된 것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르긴 해도 남쪽이 기획하고 북도 적극 협력했을 그 대형 이벤트는 공동선언 내용과 분단 해소를 갈망하는 남북의 실상을 증명사진 찍듯 담아 전 세계로 내보냈다. 이거야말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선언Dclaration) 아닌가. 북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 위험한 ‘북=악마’, 북과의 대화나 핵교섭에 대한 세계, 특히 미국 내 여론의 거부감을 적어도 상당 부분 불식시키지 않았을까. 남북의 분단 현실과 대중들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절박한 갈망도 조금은 전달되지 않았을까.

 

왜 트럼프 일병 구하기인가?

왜 ‘트럼프 일병 구하기’인가? ‘트럼프 일병’을 살려야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그리고 새로운 한반도 경제지도 구상과 남북 통합 실현을 향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도, 조지 부시류의 공화당 강경파들의 전통적 대외정책이나 한반도정책에도 해법은 없었다. 반트럼프의 정통보다 트럼프의 파격이 차라리 70년이 넘은 묵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의 경우 그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더 절실할 것이다. 트럼프 1기 임기 내 완전 비핵화를 달성하겠다고 했지만, 만일 미국이 그 완료 시점까지 제재 엄수를 고집하면 핵을 버리고 경제를 잡은 보람이 없다. 보람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김정은 체제 자체가 지탱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핵 포기가 오히려 경제와 체제를 죽이는 결과를 북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런 면에서 북의 단계적 동시행동(제재 해제)은 요구는 너무나 정당한 것이다. 대등한 관계라면 동시진행이 돼야 하고 한쪽이 선행할 수밖에 없다면 선행돼야 할 것은 오히려 미국의 제재 해제다. 미국이 먼저 제재를 해제했는데 북이 설사 상응한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더라도 크게 잃을 것이 없지만 북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먼저 비핵화를 진행했는데 미국이 상응한 제재 해제를 하지 않으면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미국은 북이 약속을 어길 경우에도 다른 제재 수단들이 많지만, 북은 그 역의 경우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달리 대응방법이 없다. 애초에 기울어진 무대 위의 거래인 것이다.

그나마 ‘트럼프 일병’이 죽으면 그런 기회조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미국 너무 믿지 마라

그러나 미국을 믿을 수 있을까.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인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관한 일본 외교사가 나가타 아키후미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한국>(미래사, 1996)이란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봤다.

“루스벨트의 한국에 대한 자세는 미국 한국 관계 차원에서만 결정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러시아 양국과의 관계, 나아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결정됐다. 따라서 루스벨트의 대한(對韓) 자세를 살필 때는 그의 아시아 정책 전반, 나아가 그 배경에 있는 그의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루스벨트는 1890년대에 선진국의 후진국 문명화, 그리고 후진국이 문명화 길을 걷는 것을 칭찬하면서 미국의 국가이익과 위신을 지구상의 어떤 지역에서도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사상을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동거한 형태라고 했지만,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지독한 시회진화론자였고 인종차별(백인우월)주의자였으며 호전적 제국주의자였던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는 지금도 미국 패권의 토대를 닦은 영웅적 위인이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당연한 일이라고 했고, 러일전쟁 때 거액의 전비를 대고 러시아와의 강화조약 때도 일본을 지원한 철저한 친일파지만 유색인종인 일본인들과 일본을 철저히 깔봤다. 나가타의 얘기를 좀 더 인용한다.

“루스벨트의 아시아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머핸(Afred Mahan)과 애덤스(Brooks Adams)였다. 머핸”은 해군국 영국과 육군국 러시아 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중국에 관한 한 양쯔강을 해군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중국에 대한 러시아 세력 침투를 저지하는 방도로 봤다. 또 애덤스는 장차 중국에서 영국 대신 미국이 책임을 떠맡게 될 때 중국이 국제정치에서 점하는 중요성 및 중국에 침투하려는 러시아에 대한 경고 등을 기록했다. 그리고 바로 머핸과 애덤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형태로, 1900년에 북청사변을 계기로 러시아가 만주에 침투했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러시아 억지를 아시아에서 제1의 과제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러시아의 세력침투로 가장 위협을 받은 것은 일본이라고 루스벨트는 말했다. …그는 일본을 러시아에 맞서는 억지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러시아보다 소국인 일본이 러시아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러시아 세력이 침투한 만주 이상으로 일본이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한국을 일본에 종속시키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발상을 하게 되고, 그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 앞서 얘기한 1900년 8월 슈테른베르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루스벨트의 그런 발상이 세력균형에 토대를 둔 것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에게 일본이나 러시아는 세력균형의 주체로 존재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주체가 변동하는 데에 따라 자동으로 변동할 수밖에 없는 객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03년부터 개전(러일전쟁)한 1904년까지도 러시아 억지(저지)를 주안으로 한 세력 균형론은 여전했고,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이 일본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발상도 바뀐 적이 없었다.“

나가타가 인용한 루스벨트 자신의 글엔 이런 것도 있다.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것이다. 분명히 한국이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조약 속에서 장엄하게 서약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자체 조약을 실시하기에는 무력하며 …일본은 한국이 다른 대국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일본의 조선식민화 과정뿐만 아니라 일본 패전 뒤 분단과 전쟁을 겪으며 친일세력 청산에 실패하고 적폐가 쌓여간 한국 근현대사에 미국은 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막아야 할 세력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여전히 분단된 남쪽을, 가능하다면 북쪽까지 일본과 함께 엮어 자기 휘하에 둠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자국 이익을 관철하려는 전략을 여전히 구사하고 있다. 100년이 넘도록. 그 ‘신냉전’이 현실화하면 최대 피해자는 또다시 분단된 남북이 될 것이다.  

북핵은 그 자체로도 큰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북핵을 만들어낸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전후질서가 배태한 모순이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그 책임에선 대차가 없다.

모순이라는 근본 제거 없이 그 현상인 북핵 위험만 부르짖으며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외쳐봤자 될 일이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그 구조적 모순 제거로 가는 시발점이어야 한다. 그게 남북 모두가 살고 동아시아가 번성하는 길이다. 우리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강조한 문 대통령의 5.1경기장 연설이 인상 깊었다.

 

한승동/ 본지 편집인, 전 <한겨레> 국제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