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는 갑작스런 빗방울과 구름 머금은 보름달로 기억될 것 같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내부 이주(internal migration) 경험자가 많고, 속도전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게 한국인들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이라는 공간을 찾아가거나 돌아보곤 했다. 요즘 들어서는 고향을 가로축으로, 시절을 세로축으로 기억을 박음질하는 것도 신선하겠다. 강혜란 필자가 추석 연휴 중 한 토막을 할애해 우리가 살아낸 공간과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Vita Partitur~~(삶은 계속 이어진다). [편집자 주]

#고향 떠난지 20년이 되어도내 안에 내가 떠나온 곳은 항상 같이 있었다.#서울 살이가 고향서 보낸 세월보다 길어져도혀 끝에 인이 박힌 고향의 말투.#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는 부스터 점프아닌 촘촘한 박음질의 대장정으로 이어져#시대도 고향도 달라졌지만 추석은떠나온 그 곳과 그 시절을 잠시 추억하는 시간

 

#다시 모인 런던의 이방인들

우리는 모두 런던의 이방인들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다 능숙하고 세련되고 부유한 것 같은 대도시의 한 구석에서, 서투르고 투박하고 가진 것 없이 우린 만났다. 브라질에서 온 비비안, 터키 출신 오마르,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시칠리안이란 걸 강조하는 마누엘라, 그리고 일본에서 온 아키코.

20151월쯤이었나 보다. 바비칸센터 로비에서 영국인 튜터 알렉스가 가르치는 영어 회화 모임에서였다. 그 즈음 앞서거니 뒤서거니 런던에 정착한 우리의 영어 실력은 도긴개긴이었다. 수십 년 간 인이 박인 모국어에 브리티쉬 악센트를 입혀서 나누는 대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았다. 이 친구들과는 오래갈 것이다. 떨어져있어도 서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적, 인종, 성별, 종교를 뛰어넘는 직감이었다. 영국 연수를 마치고 1년 여 뒤 다시 휴가로 런던을 찾은 이유도 절반은 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추석 관련 원고를 써달라는 ‘피렌체의 식탁’ 카톡은 첫 인사가 “추석에 고향 가나요?”였다. 부산 출신으로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근 30년간 들은 질문이다. “아니오. 우리 가족은 다 서울에 올라왔어요.” 원고 주제는 ‘추석도 함께 하는 사랑하는 나의 도시’란다. 별생각 없이 오케이 하고 나니 뒤따르는 주문이 있었다. “추석 쉬고 나온 사람들 좀 짠하게 해줄 글, 단 웃으며 기억에 남게”. 이 무슨 포르테시모&피아니시모 같은 악상 부호인가.

마침 페이스북이 보여준 ‘과거의 오늘’을 보니 5년 전엔 런던에 있었다. 다시 보니 사뭇 비장한 서두가 오글거리지만, 그땐 그랬다. 마치 런던이 제2 고향이나 되는 듯 가고 싶었다. 2014년 7월 말부터 1년간 언론인 연수(런던 SOAS대 방문학자)를 하고 복귀한 지 1년 됐을 때였다. 늦은 여름휴가를 명절 연휴에 붙여 썼다. 싱글이라 시댁 종사에 얽힐 일 없고, 친척 왕래 거의 없는 ‘콩가루 집안’이라 자유로웠다. 특히 연수 말미에 영어 회화 모임에서 친해진 다국적 친구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출산을 앞둔 아키코만 빼고 1년 만에 재회한 그들은, 유쾌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동성 배우자와 이혼을 결심한 오마르 소식이 안타까웠다. 이스탄불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은행권에 종사했던 그는 성 정체성 등의 이유로 7년 전 런던으로 와서 맥도날드 알바를 하다 3년 전 영국인 남자와 결혼했다. 성격 차이, 돈 씀씀이 등을 거론한 뒤 그는 “우린 더 이상 성적으로도 설레지 않아. 서로 놓아주는 게 좋다고 합의를 봤어”라고 했다. 새 학기엔 도자기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할 거라는 새로운 계획도 밝혔다. 해마다 가족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는 추석 명절에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나왔지만, 런던의 사는 얘기도 다르지 않았다. ‘까이양’(숯불 통닭구이)과 ‘카오팟뿌’(게살볶음밥)를 나눠 먹으며 학력도 성별도 인종도 다른 네 사람은 엇비슷한 행복, 제각각인 불행을 이야기했다.

 

고향을 벗어나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생각했는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는 항상 떠나온 그곳이 있었다. (사진=셔터스톡)

 

 

# 고향은 떠나도 혀 끝에 인이 박히는 고향 말투

"지금 건너가는 게 부산항대교임다."

"다리가 무척 크네요."

"크다 뿐입니까. 부산서는 서울의 한강다리 보고 개울짝이라고 해요. 이 대교는요, 높이가 아파트 27층 높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택시 타고 가다 여서 내라 달라하는 손님 있어도 안 세워요. 십중팔구 자살할라 하는 사람이거든요."

"여기서 자살을 많이 하나요?"

"많이 했지요. 여기서 떨어지면 한강에 비할 바가 못돼요. 시체도 못 찾아요. 저 하구까지 흘러가뿌니까. 저기 건너편이 영도, 영도."

"영도 알아요."

"영도를 아세요?"

"네 거기 살았었어요."

"언제 잠깐 살았습니까?"

"기사님... 부산 분 아니시죠? 말투가 아니시네요."

"내가 부산에서 44년을 살았는데.. 원래 고향은 충남 대천."

"아 충청도 분이시구나."

"옛날에 JP가 꽉 잡았을 때요, 충우회라고, 부산에 충청도향우회가 있었어요. 거기 가면 일제 때 태어나서 전쟁통에 부산으로 온 양반들이 있어요. 노인네들이죠. 부산에서 오륙십년을 살았는데도 지 고향 말 써요. 그것도 서산 말 다르고 대천 말 달라요. 귀신같이 서로 알아본다니까요. 요새는 사투리도 예전만 못해요. 다들 TV 말투 따라하니까....."

2014년 준공된 부산항대교를 택시 타고 건너는 건 그보다 13년 전 고향을 떠난 내게 낯선 관광 체험 같았다. 부산 영도 안에서도 가장 안쪽 동삼동에 살았기에 남포동 같은 ‘시내’를 나갈 일이 많지도 않았고, 갈 때도 버스 노선상 영도대교(영도다리)를 주로 이용했다. 공교롭게도 영도다리야말로 ‘자살 명소’로 오랫동안 오명이 높았는데, 총 길이 3㎞가 넘는 신설 대교에도 비슷한 ‘도시 전설’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의 대학 진학을 필두로 고구마 줄기 잡아당기듯 가족 모두 줄줄이 서울에 올라온 뒤로 부산은 거의 갈 일이 없었다. 취재차 내려갔을 때도 이젠 서울 말투 쓰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고향 사람들은 귀신같이 “원래 부산 분이시가봐예” 눈웃음 쳤는데, 그날 만난 충남 출신 택시 기사는 ‘감’이 부족했다. 기침‧가난‧사랑만큼이나 고향 말투도 숨길 데 없이 드러나는데, 다만 알아채는 건 주로 동향 출신들이다.

 

택시 기사가 대천엘 가면 누군가는 혀끝의 흔적을 읽어낼 것이다. 아무리 런던에서 브리티쉬 악센트를 연마해도 첫 음을 떼는 순간, 남미인지 남유럽인지 동아시아 출신인지 알아차리는 것처럼. 세포에 각인하듯 남아있던 모국어의 흔적, 혹은 고향의 말투는 세대가 바뀐 뒤에야 완전히 흡수‧통합된다.

 

나는 아카데미상 수상작 ‘미나리’를 보면서 아버지 제이콥 역할의 스티븐 연 때문에 짐짓 미소를 지었는데, 이민 1세대 가장으로서 절절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2세대 억양의 한국어 때문이었다. 그는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한국어 대사가 내겐 외국어 연습이나 다름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부모 세대가 그리 원했을 ‘교포 발음’을 장착한 그에게 정작 기회의 문은 고국 소재 영화에서 열렸단 게 아이러니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부스터 점프가 아니라 서툰대로 전진 후진을 반복해 온 촘촘한 박음질로 이어져 있다. (사진=셔터스톡)

 

 

# ‘내 안의 어린아이로부터 박음질해온 시간들

나는 분명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전보다 세 개쯤의 나은 점과 한 개쯤의 별로인 점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플러스마이너스를 해보면 결국 두 개쯤 나은 곳으로 나아가는 셈이었다.(중략) 인생 자체가 그랬다. 한 살 더 먹을수록 늘 전보다는 조금 나았고 또 동시에 조금 별로였다. 마치 서투른 박음질 같았다.”

(장류진, 달까지 가자, 98)

 

얼마 전 이 재치 있는 소설을 읽다가 뭔가 스멀스멀 목덜미를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입사 만 4년이 안 된 마론제과 사원 다해가 “그냥 부스터 같은 걸 달아서 한 번에 치솟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지난 몇 년간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같은 회사에 다녀도, 비슷한 월급을 받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103쪽)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캐치해서 추측하고 재배열하고 그 아래에 내자리를 만들”었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이더리움의 일확천금에 혹한 다해가 “자기 발목에 매달린 쇠사슬 같은 걸 눈앞에서 툭 끊어내고” 날아오르는 꿈에 설레듯 나도 그런 인생의 고공 점프, J커브를 소망했던 것 같다. 실은 치솟아 오른 줄 알았는데, 움직인 건 고작 계단 한 칸이었다.

아니 ‘인생 대전환’까진 아니라도 ‘뭔가 다른 삶’을 기대했던 건 맞다. 적어도 명절 혹은 경조사 때나 만나는, 서투르고 투박하고 못난 친척들로부터 취업‧결혼‧출산‧다이어트에 대해 훈계 듣지 않는 삶. 능숙하고 세련되고 부유한 이들 말투를 매끄럽게 흉내내는 나를 다시 ‘부산 영도’로 후진시키는 걸 거부할 권리. ‘칼럼계의 아이돌’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말처럼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경향신문 2018년 9월22일자 칼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전설의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냉철한 과학자 친구가 젊었을 적 썼던 ‘느끼한’ 연애편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선 “오늘도 그는 그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자신과 현재의 ‘쿨한’ 자신을 화해시키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인문학적으로’ 씨름하고 있으리라.” 그러면서 덧붙였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된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스멀스멀 떠오른다.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눈 내리는 서울역에 내렸던 열아홉의 내가, 신문기자로서 내로라할 경쟁력도 없이 40대를 맞이해 도피하듯 런던 연수를 갔을 때의 내가. 숨길 수 없는 부산 말투 혹은 한국식 영어를 감추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나는 누구, 왜 여기?’를 되뇌었다. ‘너는 누구니’하는 질문에 시달렸던 터라 스스로 먼저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과 막막함, 상실감을 유예하는 듯했다.

돌아보니 그게 위기 상황이었다. 인생의 J커브를 그리기 위해 발목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전보다 세 개쯤의 나은 점과 한 개쯤의 별로인 점이 있는 곳”이 되풀이되는 ‘서투른 박음질’이 지겨워서, 부스터를 달고 치솟길 원했다. 그러나 어딜 가도 혀끝에 인이 박힌 말투는 지워지지 않았다. 내 안에 내가 떠나온 곳이 들어있었고, 그 덕분에 귀신처럼 나와 닮은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추석 연휴 직전 페이스북에서 화제가 된 이숨 작가의 네 컷 웹툰 ‘만남’은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가 만나 대화하는 상황을 가상해 그렸다. “과학자는 되지 못했어. 아직 집도 없고 열심히 살긴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되네. 실망시켜서 미안해”라는 ‘지금의 나’에게 ‘그 시절 나’는 “자장면 자주 먹어?” “디즈니랜드 가봤어?” “혹시 집에 게임기도 있어?”라고 물어본 뒤 “완전 부럽다!! 진짜 멋있어!!”라고 해맑게 웃는다.

어린 시절 내가 오늘의 나를 만나면 뭐라고 할까. “진짜 멋있다”까진 아니라도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었겠지. 지금의 내가 ‘그 시절 어린아이’를 잊고 지워버리려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서운할까. 나는 물론 과거의 내가 아니고,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다만 그 사이엔 부스터 점프가 있는 게 아니라 촘촘한 박음질의 대장정이 있었다. 추석에 가족을 만나고 고향을 돌아보는 것이, 그 박음질에 한땀 한땀 감사를 표하는 의례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필자 강혜란은

2000년 입사한 중앙일보에서 문화부를 거쳐 현재 국제팀에서 일하고 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문화부 기자를 탐했으나 현실은 숙성은 커녕 속성 원고를 생산하는 글로생활자. 일이 아닌 ‘내돈내산’(내돈 내고 내가 산) 문화 생활을 40대 후반 싱글의 시각으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