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20주년을 맞는 미국, 낙관의 시대는 가고 신냉전의 시대>

9/11 이후 20년 간 계속되었던 테러와의 전쟁이 사실상 막을 내렸다. 오늘날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은 점점 격화되고 있는 미중간의 신냉전이다. 20년 결산을 앞두고 미국 조야는 내심 착잡하다. 겉으로야 자국민의 희생을 기리며 단합을 외치지만 내실없는 20년이었다. 미국은 2001 9.11과 함께 아프간에 들어갔다가 20년 만에 철군했다. 국내가 문제다. 워싱턴 주류의 국가경영 능력은 의심받고 위협받는다. 왼쪽에서는 급진적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버니 샌더스 등의 진보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여가고, 오른쪽으로는 트럼프 지지자들로 대표되는 저소득 백인층에 기반한 민심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30년 전에는 낙관론 일색이었다.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하자 게임은 다 끝난 듯보였다. 20년전 9.11이 터지기 전까지도 그 자신감은 여전했다. 9.11 이후 20년간 중동-이슬람권에 인적, 물적 자원을 쏟고 나니 어느새 중국이 옆구리까지 바짝 추격해 왔다. 중국 속담으로는 어부지리의 형국이다. 미국의 지난 20년을 신태환 필자가 분석했다. [편집자 주]

 

# 아프간에서 시작해 아프간으로 끝난 9.11, 지난 20년은 미국에게 어떤 시대였는가? # 소련 붕괴후 독주일로, 역사의 종언 외치며 유일 패권국가로 순항 # 9.11 이후 20년, 이슬람권과의 소모적인 갈등 속에 아프간에서 철군, 원점 회귀 # 중국이 20년 동안 미국 경제력의 13%에서 70%로 맹추격할 때 미국은 무얼 했나?

 

아프간 철수, 한 시대의 종언 그리고 익숙한 역사의 귀환

   희생자 126천여명, 그리고 경비 2조 달러

2조 달러의 경비, 그리고 126천여명의 희생자. 브라운대학교 왓슨 국제관계연구소가 발표한 아프간 전쟁(2001~2021)에 투입된 내역이다. 연구팀은 비용산출을 위해 미국이 20년 동안 지출한 군사비와 채무이자 그리고 상이군인들을 위한 연금비용을 계산하였고 또 해당 기간 동안 숨진 미군과 동맹국 군인 그리고 현지 민간인들의 피해를 집계하였다. 2019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1.6조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이 전쟁을 위해 무려 한국의 한해 국내총생산을 상회하는 막대한 금액을 소진한 셈이다.

 #후세인과 빈라덴은 제거했으나, 미국 경제를 바짝 따라잡은 중국

물론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9/11 테러의 주모자 오사마 빈 라덴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고, 그가 이끌던 알-카에다는 거의 궤멸상태에 빠져버렸다. 또한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처형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알-카에다보다 더욱 흉악한 테러조직 IS가 출현하였고, 이란은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틈을 타 이라크를 비롯해 중동 지역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동은 예전보다 더욱 불안정해졌으며, 중국은 더욱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특히 중국은 전대미문의 성장을 이룩했다. 미국이 아프간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는 동안 중국의 GDP 2001년에 비해 11배나 증가하였고, 2001년 미국 GDP 13%에 불과하던 중국의 경제 규모는 오늘날 미국의 70%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전성기 소비에트 러시아조차 달성하지 못한 비약이다. 중국은 새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했고, 일대일로 등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아시아 대륙에서 밀어내려 한다. 이제 미국은 처음으로 자국과 대등한 경제력을 지닌 라이벌을 만나게 되었다.

도대체 미국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중동에서 싸웠던 것일까? 어쩌자고 20년 동안 중동에 남아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원을 쏟아 부은 것인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난 20년 간 미국 외교가를 지배한 사고를 들여다봐야 한다.

뉴욕의 911 메모리얼 파크 (사진=셔터스톡)

 

역사의 종언과 자유주의적 패권

   #냉전 종식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의 시대를 맞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었던 냉전은 소련의 붕괴로 막이 내렸다. 미국이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를 두고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치체체의 최종단계이며 여기서 더 이상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확산될수록 세계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의 제도가 우월하다는 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심지어 미국의 보수적 정치평론가 찰스 크라우트해머는 “일극의 시대(Unipolar moment)”가 도래했다면서 미국의 역할을 새로이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은 사라졌지만, 핵무기 등 비대칭무기의 확산으로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이 깨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불량국가들이 대량살상무기를 획득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가진 힘을 십분 발휘하고, 필요하다면 일방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극으로서 세계의 경찰 역할을 100%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좌) 찰스 크라우트해머(보수적인 성향의 칼럼니스트이자 정치평론가) / (우) 프랜시스 후쿠야마(스탠퍼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

 

아프간 파병 이후 부쩍 수그러든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

  #자유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미국 정치의 굳은 믿음 또한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된 아프간 전쟁 

아프간-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4, 부시 행정부의 한 관료는 “우리는 이제 제국이 되었으며, 현실은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We are an empire now, and when we act, we create our own reality)”고 언급했다. 뉴욕타임즈 기자가 부시행정부 관료들이 현실에 기반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자 내뱉은 말이다. 굉장히 오만한 표현이지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결정론적 역사관과 찰스 크라우트해머의 일방주의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미국은 세계를 자국이 모습대로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05년 부시 대통령은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미국의 자유가 생존하려면, 다른 나라에서의 자유가 성공해야만 한다. 전 세계에 자유가 확산되어야 세계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의 정책은 “모든 나라들과 문화권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운동과 제도를 강화하여 세계에서 폭정을 종식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과 독일을 민주화시켰던 것처럼 아프간과 이라크를 민주화시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자유의 증진”이라는 믿음은 비단 부시 행정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공화당과 민주당 할 것 없이 미국정계가 공유하고 있던 신조였다. 오바마 정부 또한 그러한 믿음을 어느 정도 계승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2011년 소위 “아랍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면서, 리비아와 시리아의 저항운동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입은 더 큰 혼란을 초래했으며 결국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으로 귀결되었다. 아무리 자금과 군사력을 투입해도 현지의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미국인들은 깊은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적 패권에 대한 불만

      # IS의 위협은 인정하지만 미국인의 50%는 지상군 투입에 부정적 의견

9.11 이후 중동 개입이 돈과 시간과 생명을 계속 잡아먹자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다. 왜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야 하는가? 왜 미국이 계속 이라크와 아프간에 남아야 하는가? 왜 미국이 전 세계 모든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가?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회의가 2016년 트럼프를 당선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 당시 트럼프는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조속히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끝없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약속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한다고 우려했지만, 미국 국민들은 오히려 그러한 주장에 환호했다. 2016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70%가 차기 대통령은 외교문제보다 국내문제에 치중해야 한다고 응답했으며 미국인 57%가 타국의 문제는 그 나라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응답했다. 아울러 IS가 중대한 위협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미국인 50%가 지상군 투입에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역외균형론의 부상, 미국 정부와 국민의 최우선적 관심은 국내안정

하버드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 스티븐 월트는 2018년 출간한 저서 “미국 외교의 대전략(원제: The Hell of Good Intentions)”을 통해 지난 20년 간의 미국외교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목적으로 삼은 외교 전문가들이 그동안 위협을 부풀리고, 이득을 과장하고 동시에 비용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들 외교전문가들이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기들의 편견을 강화했고 따라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한편 자유주의 패권을 반대한 트럼프의 외교 방향은 맞았지만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이고 일방적이어서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스티븐 월트 교수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이다. 역외균형이란 어떤 세력도 독자적으로 유럽이나 아시아를 지배하지 못하게 동맹을 관리하고 적절한 순간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대외정책,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빌려온 외교정책이다. 다시 말해, 동맹국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세력균형이 무너질 때에만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외교 평론가 로버트 D. 캐플란도 유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는 2017년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미국은 네이션빌딩(Nation-Building을 지양하고 해양국가로서의 책무만 수행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해양국가로서의 책무란 주요 해로를 보호하며, 동맹국들이 안전하게 에너지를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는 미국이 사실상 거대한 섬나라로서 상당한 지리적 이점을 누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게다가 “마르코폴로 세계의 귀환과 미국의 군사적 대응(The Return of Marco Polos World and the US Military Response)”라는 기고문에서 그는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아프간을 안정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내륙에 깊숙이 개입하기보다 서태평양에서 인도양까지 아우르는 지역의 연안 국가들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좌)로버트 캐플란(CNAS(Center for new american security) 선임연구원) / (우)스티븐 월트(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의 국제 문제 교수)

 

이제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군사개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연설에도 국제 문제 개입을 시사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바이든의 연설은 철저하게 미국 국내문제 극복에 초점이 맞춰졌었고 미국 민주주의의 회복을 최우선적 과제로 명시했다.

 

아프간 철수와 역사의 귀환

2021 7 8, 바이든 대통령은 8 31일까지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철군시한이 공식화되자 아프간 주요도시는 순식간에 탈레반에 의해 함락되었고 아프간 수도 카불조차 미국이 철수를 완료하기도 전에 탈레반 손에 넘어갔다. 그 결과 미국은 자국민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탈레반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미숙함은 미국의 위신을 실추시켰다. 미국 내에서는 아프간 철수를 1975년 사이공의 함락에 비유하는 칼럼이 속출했고, 중국은 미국의 안보 공약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면서 대만을 더욱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동맹국들의 비난, 그리고 라이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지난 8 31일 바이든 대통령은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결정을 변호했다. “이 전쟁은 끝나야만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을 침공했던 이유, 9/11 테러의 주모자가 제거된 이상 아프간에 계속 남을 이유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게다가 아프간을 통일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은 아프간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며 이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책무는 2001년의 위협이 아니라 2021년의 위협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년의 세월을 결산하는 의미심장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에 대해서도 단호한 자세를 내비쳤다. 그는 미국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국가안보의 핵심이익”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핵심 이익이란 당연 중국을 상대로 경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프간에서의 실패가 기본적인 국력 약화로 볼 수는 없어

그런데 아프간에서의 실패 이후 미국이 중국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까? 미국이 현격히 약화된 것 아닌가? 3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르 피가로(Le Figaro)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힘의 펀더멘털은 전혀 타격 받지 않았고, 미국은 오히려 국익을 더욱 정교하게 규정하여 여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게다가 1975년 사이공의 함락 때도 사람들은 미국의 시대가 끝이 났다고 말했지만 1980년대 미국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고 강조했다.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 2017 ~ 현재)

 

9/11 이후 20년 간 계속되었던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자유주의적 실험은 막을 내렸다. 오늘날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은 점점 격화되고 있는 미중간의 신냉전이다. 그런데 과거 미소간의 양극체제와 달리 오늘날에는 EU나 러시아도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 터키와 인도 등도 영향력 확대를 위해 복잡한 셈법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익숙한 광경이다. 국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던 19세기 열강들의 시대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강대국간 경쟁의 판은 끝났다며 역사의 종언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절대반지의 제왕에서 대체로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러 강국들 또는 예비강국들이 각각의 지역에서 키플레이어로 활동하는 보편적인 상황이 아닌가? 가히 “역사의 귀환(The Return of History)”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미국이 중동과 이슬람에 돈과 힘을 기울인 20년의 세월은 투자대비 효과가 작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태환 필자

서울대 외교학과를 다닐 때 한국외교사 수업을 통해 나라 안과 밖의 문제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배웠다. 한반도의 여러 비극은 국제정치적 맥락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으며 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나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책을 좋아하며 특히 일본, 프랑스 쪽에서 나오는 출판물을 읽고 종종SNS를 통해 관련 안내 내용을 소개해왔다. 현재는 민간기업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