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하스(Abhas Jha) 박사의 논리는 이런 흐름이다.

9.11 테러로 미국은 아프간에서 탈레반을 급하게 쫓아냈다. 준비없이 등장한 친서방정권은 부패했다. 미국 주도로 국제 투자와 원조는 상당액이 중앙정부 고위관료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고속도로 건설과 시장경제, 선거제의 도입 등으로 도시 중심의 발전과 민주화는 제법 진행됐다. 문제는 농촌이었다. 미국과 정부군은 댓가없이 양귀비 박멸에 나섰고, 지방군벌은 반대로 양귀비 재배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민심은 떠나고,  탈레반은 세력을 늘렸다. 

압바스 박사의 지적은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과정을 연상시킨다. 기층과 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의 정책은 늘 국제무대에서 실패했다. 인도 출신인 압바스 박사는 세계은행 산하의 기후변화, 재난관리국 남아시아 지역 담당관으로 파이낸셜타임즈 등 권위있는 국제보도와 아프간 관련  단행본 등을 참조해 개인 블로그에 ‘역사와 경제를 통해 이해하는 아프간의 현 상황 관련 글모음’(Afghanistan: A Curated List-Understanding how we got here through the lens of history and economics)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지식정보 탐사 칼럼니스트인 김정호 필자가 방대한 자료를 해체하고 재조립해 원고지 70장 분량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 아프간의 친서방 정권은 어떻게 ‘멸망’했을까. # 수 백억 달러의 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 세계은행의 아프간 전문가이자 경제학자인 압하스 자는 미국이 아프간 농촌 또는 고유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근본 원인이라 지목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과 기후 분포>

**아프가니스탄은 높은 산악, 비옥한 계곡, 광활한 사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 간 온도 차는 섭씨 38도 이상이고 최고 지대와 최저 지대의 차이는 7,234m에 달한다. 출처: Visual Capitalist .

 

뿌린 대로 거두리라

   #미군 점령 초기의 아프간: 국민이 갈망하던 서구식 민주주의는 허울 뿐, 권력은 미국을 등에 업은 군벌에게로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게재된 인도 출신 작가 판카즈 미슈라(Pankaj Mishra)의 아프간 방문기 <진짜 아프가니스탄>(The Real Afghanistan)은 지금의 상황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뿌린 대로 거둔 결과임을 잘 설명한다. 방문기가 쓰인 것이 2005년 초로 탈레반 정권이 미국에 의해 축출되고 4년이 흐른 시점이라 미군 점령 초기 아프간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당시 카불은 이미 국제적 도시였다. 파슈툰족, 타지크족, 우즈벡족 등 다양한 부족 출신이 시장에 모여 함께 장사를 했고 다국적군의 군인, 서방 국가 외교관, NGO 활동가, 사업 기회를 엿보고 모여든 비즈니스맨으로 북적였다. 카불의 변화는 뚜렷해 보였다. 새로운 아파트와 오피스 건물이 곳곳에 들어섰고 슈퍼마켓, 인터넷 카페, 미용실, 레스토랑이 성업 중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채널을 바꿀 때마다 경쾌한 음악과 진행자의 활기찬 멘트가 흘러나왔다. 도심 도로에는 랜드 크루저 같은 고가 자동차가 즐비했고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겉모습만으로 보면 카불은 아시아의 다른 개도국 대도시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새 정부의 군대와 경찰도 틀을 잡아갔다. 일본은 지방 군벌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DDR 프로그램을 통해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병대 중 3만 명을 무장 해제했다. 미국은 아프간군 창설을 주도했다. 약 2만 명의 병력을 훈련해 아프간군의 토대를 만들었다. 독일은 1만8천 명에 달하는 경찰관을 양성했다. NATO의 지휘 아래 8천명 규모의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이 결성되었고 카불 너머 다른 지역도 차츰 관할하기 시작했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는 민군 지방재건팀(PRT)을 북부 지역 여러 주에서 가동했다.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도 차츰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2004년 10월에는 첫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가 당선되었고 2005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도 아프간 전 지역에 있었다. 첫 대선에는 심지어 여성 후보까지 출마했다. 주요 선거가 순조롭게 치러졌다는 것은 그만큼 아프간의 정세가 안정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아프간인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믿음을 갖고 투표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투표는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실제 권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벌이 쥐고 있음을 금방 깨달았다.

   #1979년 소련 침공부터 시작된 아프간 군벌과 미국의 결탁

미국에게 아프간 군벌은 양날의 검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군벌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을까?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당시, 미국은 냉전의 연장선에서 아프간의 급진 이슬람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10년에 걸친 아프간-소련 전쟁으로 사회 기반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7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소련의 철군 이후 미국은 더 이상 아프간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이 제공한 엄청난 양의 무기와 거액의 자금을 두고 무자헤딘 전사 파벌들은 세력다툼을 벌였고 승자는 군벌로 성장해갔다.

아프간 버전 전국시대에 파슈툰족 중심의 탈레반이 득세하면서 다른 군벌들은 세력을 잃었다. 탈레반은 1997년에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경쟁 상대였던 여타 군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북부지역에 기반을 둔 군벌들은 북부 동맹을 결성하고 맞섰지만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었다. 탈레반에 의해 변방으로 쫓겨났던 군벌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2001년에 벌어진 9.11 테러였다.

   #빈라덴 소탕 작전을 계기로 군벌 세력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된 미국

당시 부시 대통령의 지시로 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에 대한 소탕 작전이 전개되었다. 피신처를 제공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1차 타깃으로 CIA 요원 110명과 특수부대원 316명이 아프간에 급파되었다. 지상전을 수행하려면 대규모 병력이 필요했는데 미국은 북부 동맹의 군벌을 이용하기로 한다. 군벌을 움직이기 위해 부시 행정부는 7천만 달러의 현금을 뿌렸다. 미군을 등에 업은 군벌의 대대적인 공세로 탈레반 정권은 단기간에 전복되었다. 군벌들은 미국이 자기를 손발로 이용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선거를 통해 민선 대통령과 주지사들이 선출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되었지만 아프간의 실질적인 권력은 한 번도 군벌의 손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프간에는 선거에 의한 명목상의 권력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실질적인 권력이 공존하는 기이한 시스템이 고착되었다. 그 결과 아프간은 민선 대통령이 통치하는 카불 포함 대도시 지역과 군벌이 다스리는 농촌 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중앙 정부의 힘은 군벌이 장악하고 있는 지방까지 전혀 미치지 않았다. 미국은 이중 권력 시스템이 아프간 통치에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앙 권력은 아프간 정부군과 경찰력에 의해 지탱되도록 하는 한편 지방 권력은 군벌의 자체 무장력에 의해 의존하도록 했다. 이런 투 트랙 전략은 현 아프간 상황이 웅변하듯이 미국의 큰 패착이었다.

   #아프간 국민의 이중고: 부패한 중앙 정부와 탈레반보다 가혹한 지방 군벌의 착취

중앙 정부는 고질적인 부패로 몸살을 앓았고 절대다수인 아프간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방 군벌 세력은 미국의 묵인하에 강압적 통치를 했다. 자금원이 되는 양귀비 재배와 밀수를 두고 군벌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더 많은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군벌들 간에 무력충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했다. 미국에게 중요했던 것은 세계 여론이 주목하는 카불과 그곳을 통치하는 민선 정부였다. 카불의 안정과 발전은 미국의 아프간 통치가 성공적임을 입증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와중에 카불과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아프간의 다른 지역은 완전히 군벌의 수중에 떨어졌다.

중앙 정부는 부패와 무능의 대명사였고, 지방 군벌들은 탈레반 정권보다 더 아프간인들을 착취했다. 카불과 대도시 지역만 챙기고 나머지 지역에는 무관심한 미국에 대한 불만이 아프간인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정의와 법치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가 미국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의식이 아프간인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아프간인들에게는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해 줄 대안 세력이 절실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권력에서 밀려났던 탈레반이 야금야금 세력을 키워나갔다.

 

실패로 돌아간 양귀비 재배 금지와 민병대 해체를 통한 아프간 군벌에 대한 통제

   #군벌을 지탱하는 힘은 양귀비 재배 수익으로 운영되는 민병대

중앙 정부와 군벌의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아프간의 현 상황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다.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아프간은 사실상 권력 분점 상태였다. 한편 칼자루를 쥐고 있던 미국이 정말로 교통정리를 하려 했다면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뤄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관심이었든 태만이었든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미국이 의도한 것은 카르자위 대통령 중심의 중앙 권력과 군벌 중심의 지방 권력이 상호 견제하는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분할통치 전략인데 미국의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프간의 정세가 안정되자 중앙 권력은 경쟁하고 있던 지방 권력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에 들어간다. 지방 군벌을 지탱하는 자금원인 양귀비 재배를 금지하고 실질적인 무력인 군벌 민병대를 해체하는 것이 직접적인 목표였다. 다음 두 군벌의 사례는 중앙 정부의 조치가 어떻게 무력화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 있는 낭그라하르주의 실권자 하즈랏 알리는 18,000명의 민병대를 거느린 강력한 군벌이다. 중앙 정부는 선거로 선출된 주지사가 통치하도록 후보를 지명했지만 하즈랏 알리는 아예 자신이 출마해서 당선되어 버린다. 지방에서는 군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유권자를 얼마든지 매수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중앙 정부가 민병대 해체를 명령하자 이미 완료되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하즈랏 알리의 민병대는 보고서에서만 해체되었을 뿐 실제로는 양귀비 재배 농가를 돌아다니면서 트럭으로 양귀비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저항하는 농민들에게는 총부리를 들이댔다. 이렇게 수집한 양귀비는 파키스탄에 보내져 가공을 거친 후 낭그라하르주의 마약 제조 공장에서 헤로인 원료가 되었다. 완성품 헤로인은 두바이와 파키스탄의 마약 밀매조직을 통해 전 유럽에 판매되었다. 하즈랏 알리는 한술 더 떠서 국제 헤로인 시세에도 개입했다. 헤로인 가격이 떨어지면 양귀비 공급량을 줄이는 식이었다. 파키스탄과의 국경은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즈랏 알리에게는 무늬만 국경에 불과하다.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양귀비와 온갖 밀수품을 반입, 반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례는 우즈베키스탄과 마주하고 있는 북부 지역 발흐주를 지배하는 군벌 아타 모하메드다. 전직 군벌이 성공적으로 신분 세탁을 한 케이스다. 아타 모하메드도 하즈랏 알리처럼 선거를 통해 발흐주의 주지사가 되어 자신의 권력을 합법화했다. 그는 언론의 힘을 잘 알고 역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앙 정부에서 양귀비 재배 근절과 민병대 해체 지시가 내려오자 저널리스트들을 초대해 발흐주가 얼마나 모범적으로 중앙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지 곳곳에 데려가서 사진과 영상을 찍게 하고 점잖게 인터뷰를 했다. 중앙 정부는 아타 모하메드가 지시를 정말로 이행했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합법의 가면을 쓴 채 아타 모하메드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다른 군벌들처럼 자신 소유 민병대의 무기는 안전한 곳에 은닉해놓고 양귀비 밀매와 밀수에 집중했다. 중앙 정부가 임명한 지역 경찰서장이 양귀비를 압수하자 자기 집에 가둬 놓고 서슴없이 협박과 고문과 자행했을 정도였다. 영국군이 구출할 때까지 경찰서장은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프간 경제를 이해하는 2가지 키워드-양귀비 재배, 구조적 부패

1)양귀비 재배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프간은 고산 지대에 위치한 농업 국가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는 경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이 흘러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댈 수 있고 평지가 있는 곳에서 집중적으로 농업을 한다. 장기간에 걸친 외세와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항시적인 경작이 어려워지자 아프간의 농민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바로 양귀비 재배다.

소련 점령기에는 양귀비 재배가 큰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소련이 물러간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990년대에는 아프간 군벌들 간에 경쟁이 치열했다. 무력충돌이 빈번했는데 무기와 보급품 구입 자금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는가에 의해 승패가 갈렸다. 변변한 산업이 없는 아프간에서 확실한 자금원은 헤로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 재배였다. 관개시설이 필수적인 다른 작물에 비해 양귀비는 상대적으로 기르기 쉬웠고 피폐해진 농촌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원이었다.

군벌은 관할 지역의 농민들이 양귀비 재배를 하도록 장려했다. 군벌과 농민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지자 양귀비 재배는 급속히 성장했다. 다른 군벌들을 제압하고 정권을 획득한 탈레반은 군벌의 발호를 막기 위해 자금원인 양귀비 재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생계가 걸려있는 양귀비 재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군벌들이 탈레반의 정책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뒤에서 선동했음은 물론이다. 미국에 의해 탈레반이 축출되어 방해 세력이 사라지자 양귀비 재배는 더욱더 늘어났다. 2003~2004년에는 생산량이 64%나 급증했다. 2004년의 경우 아프간은 전 세계 헤로인용 양귀비 생산의 87%를 담당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양귀비 재배 현황>

**정부와 미군이 경작을 방해하면 잠시 감소했다가 다시 생산량을 회복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꾸준히 상승세를 보인다. 출처: Financial Times

중앙 정부는 강압적으로 양귀비 재배를 중단시킬 경우 탈레반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들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현금 인센티브를 주는 유인책을 고안했다. 양귀비 재배를 포기하는 대가로 현금을 지급하는 것인데 이 자금 대부분을 지방 관리들이 착복했다. 손에 현금이 쥐어지지 않으니 농민들은 양귀비 재배를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미국을 향한 적개심만 키운 막무가내식 양귀비 박멸 정책

미국은 아예 그런 유화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다 갈아엎어 버리는 정책을 취했다. 미국과 동맹국이 우려한 것은 양귀비 재배가 늘어나 마약이 서방 세계에 계속 공급되는 것과 마약 거래 자금이 군벌이나 탈레반에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속하고 확실한 양귀비 재배 근절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양귀비밭에 화학약품을 대량으로 살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낮에 공공연하게 했지만 격분한 농민들이 군벌을 통해 확보한 RPG를 쏘며 저항하자 야간에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아프간인으로 구성된 박멸팀을 동원했다. 미국의 보안업체 DynCorp는400개의 팀을 만들어 수천 헥타르의 양귀비밭을 못 쓰게 만들었다.

아프간 농민들이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생계수단을 파괴하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커진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높은 수확량을 내는 종자 보급, 저온 저장 시설 공급, 농기구, 비료 구입을 위한 소액 대출 등 아프간 농민들을 양귀비 재배에서 확실히 멀어지게 할 대책을 마련하고 철저히 집행했어야 했다. 가난한 농민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밀어붙인 양귀비 박멸 정책을 계기로 아프간 농촌 지역은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양귀비 박멸 정책으로 오히려 탈레반에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다

다른 작물 재배보다 양귀비 재배는 생산원가가 덜 든다. 특별한 대안이 없는 아프간 농민들이 양귀비 재배에 매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약 거래 자금 유입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미국이 전방위적인 양귀비 박멸 정책을 쓴 것은 타당했다. 문제는 탈레반 세력이 강성한 지역은 손을 잘 대지 않고 상대적으로 집행이 쉬운 아프간 정부 관할 지역의 양귀비 재배를 집중적으로 단속했다는 점이다. UN 마약범죄처의 조사 보고서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관할 지역의 양귀비 재배가 초토화되면서 탈레반 관할 지역에 양귀비 재배 집중되는 역효과가 났다. 탈레반의 경제력을 무너뜨리려는 정책이었지만 오히려 탈레반에게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었다.

2)구조적 부패

아프간 경제는 2012년 외국 원조가 GDP 50% 수준에 이르자 정점에 이른 후 계속해서 하락세를 보여왔다. GDP의 절반을 해외 원조가 차지하던 상황에서 절대 빈곤층 비율은 34%에서 55%로 오히려 대폭 올라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아프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10년간 600달러 수준으로 하락했다. 외부로부터의 자금 지원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다는 방증(傍證)이다. 극소수의 권력층을 제외하고 모든 아프간인들은 그 많은 돈이 도대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궁금해 한다. 분명한 것은 증발한 수백 억 달러의 해외 원조금 대부분을 권력자들과 회색경제가 삼켜버렸다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 경제의 핵심 동력인 해외 원조>

**2012년에 정점을 찍은 후 계속 줄어들다가 2019년에 늘어났다. 외국 원조가 많이 이뤄졌을 때 경제의 기초체력을 길렀어야 했지만 실패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출처: Financial Times

   #잠시 맛 본 낙관의 시대

아프간 경제에 성장의 모멘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아프간을 장악한 2001년 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되면서 해외 원조와 투자 또한 대폭 늘어났다. 이 기간에 일반적인 의미의 국가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그전의 아프간에는 소규모 물건을 생산하는 수공업자, 물건을 사고파는 도시의 상인,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이 있었지만 상품과 재화의 유통, 즉 경제의 순환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탓이었다. 물류의 이동을 위해서는 아프간 전 지역을 관통하는 순환도로망 건설이 시급했다. 길이 뚫리자 경제도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기간에 기대수명은 증가하고 영아 사망률은 감소했다. 대학생은 2003년 기준 3만 명에서 2018년에는 18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중 여학생은 4만9천여 명이었다. 인구의 절반이 휴대폰을 소유하고 전력소비량은 7배로 증가했다. 아프간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이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활기를 띠기 시작한 아프간 경제가 맺은 결실이 골고루 분배되었다면 아프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간은 대부분의 저개발국가가 걸어간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과실은 극소수의 권력층이 독점했다. 해외 원조금과 징수된 세금을 온갖 루트로 빼돌려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 돈으로 중동의 휴양지에 부동산을 구입하고 자녀들은 해외 명문대에 유학 보냈다. 그렇다면 신흥 권력층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부를 독차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미국의 공헌이 지대하다.

미국은 탈레반 축출 후 미국에 협조적이고 다루기 쉬운 인물들을 요직에 앉혔다. 미국과의 모든 채널이 그들에게 집중되도록 했다. 굵직굵직한 계약은 모두 그들을 통해서 진행했고 해외 원조금의 집행도 일임했다. 아프간의 주요 의사 결정을 그들이 다 했는데 공익보다 사익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마지막 국회의장 라흐만 라흐마니다. 바그람의 미군 기지에 연료 공급과 경비를 전담하는 독점계약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아프간 내부에서 극소수 권력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미국은 국내 문제로 간주하고 개입을 거부했다. 미국의 방관은 극소수 권력층에게 탄탄대로를 깔아준 셈이었다.

   #조직적인 부정부패 속에 곪을대로 곪은 국내 경제

부정부패는 구조화되었고 아프간 경제는 속으로 곪아갔다. 세계은행과 UN 마약범죄조사국의 2010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해 아프간 공무원에게 들어간 뇌물 총액은 25억 달러에 달한다. 아프간 GDP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아프간 경제의 재정 건전성과 사회적 안정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던 미국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아프간인들은 상대적으로 부패가 적었던 탈레반 정권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인테그리티 워치의 2020년여론조사에 따르면 아프간 국민 절반 이상이 정부 통제 지역보다 탈레반 통제 지역에서 훨씬 부정부패가 덜하다고 생각한다. 탈레반이 어떤 과정을 통해 민심을 얻었는지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미국이 해외 원조금 사용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하고, 정부 창구를 통해서만 지원금이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현금이 필요한 개인에게 직접 전달이 되도록 하며, 자금 사용 계획과 집행에 대한 철저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춘 후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을 일벌백계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프간인들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 분야에 미국식 시스템이 도입되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아프간인들이 미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탈레반이라는 대안을 찾은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실패했는가

   #아프간 사람들은 진정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는 외세 개입의 역사였다.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는 소련, 그 이전에는 영국이 개입했다. 가장 구체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아프간에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할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가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아프간인들이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고 아프간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더라도 외세라면 다 거부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실패의 근본 원인은 미국이 아닌 아프간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또한 그런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덕분에 세계 여론도 그런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과연 아프간에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법치를 수용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고, 국민들은 이를 심정적으로도 거부했을까? 여러 아프간인의 목소리를 종합하면 정반대의 답이 나온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아프간은 오히려 미국식 민주주의의 도입을 갈망했다. 그들에게 미국은 민주주의의 전범(典範)이고 미국 사회는 철저한 법치가 구현된 사회다.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법치를 아프간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미국의 의도라고 확신했다. 탈레반 정권 축출 후 아프간 전 지역에서 시행된 대선과 총선에 각계각층의 아프간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런 희망과 기대의 반영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아프간인들의 희망이 절망으로, 기대가 낙담으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6년에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고 정권을 수립했을 때 어둠의 장막이 아프간 전체를 뒤덮은 것만 같았다. 2001년에 미국과 동맹국이 무력으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자 아프간인들은 그 장막이 활짝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미국과 미국이 임명한 리더들이 제시한 청사진대로라면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프간인들이 경험한 것은 정실주의(情實主義), 만연한 부정부패, 다단계 금융 사기와 다를 바 없는 부실한 은행, 권력층에 의한 권력층만을 위한 정부였다. 이런 좌절스러운 현실을 간과한다면 아프간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내부의 해묵은 갈등: 종족 문제와 도시 농촌 간의 갈등

아프간 사회 내부의 근본적인 갈등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인 종족 간의 갈등과 도시와 농촌 지역의 사회, 문화적 갈등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것은 후자다. 아프간은 34개의 주(윌라와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아프간을 주별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카불, 칸다하르 등 6대 도시와 나머지 주들로 나눠야 한다. 미국과 서방 세계의 원조는 가시적인 성과를 볼 수 있는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미국식 민주주의 시스템의 이식은 도시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도시민들은 외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아프간 도시는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고 덕분에 외부의 지원과 도움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5대 도시와 인구 밀집도>

**아프간의 인구는 약 3,800만 명이다. 다민족 국가인데 파슈툰족이 42%, 타지크족이 38%로 양대 민족 집단이다. 사진에서 크게 보이는 부분은 인구 밀집 지역이다. 도시 지역 거주민은 전체 인구의 20%다. 나머지 80%가 거주하는 지방 농촌 지역을 등한시한 미국은 큰 대가를 치렀다. 출처: World Mapper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인구 80%에 달하는 농촌에 대한 이해 부족

문제는 변화의 내용과 범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농촌 지역에서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농촌 지역은 외부 세계로부터 닫혀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은 조심스럽게 열어야만 했다. 밖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도록 해야 했다. 도시 거주민들에게 서구식 민주주의, 선거, 여성의 권리, 현대식 교육 등이 테제가 되었다면 농촌 지역 거주민들에게는 집, 가족, 부족, 이슬람교, 꾸란, 우리 땅, 아프간인의 자존심 등이 안티테제로 작용했다. 미국은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고 이해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치했을 뿐이었다.

아프간의 농촌 지역은 서방 세계가 주도하는 변화에 불만스러워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변화의 과정에 자신들이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아프간은 자기들의 아프간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아프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농촌 지역의 아프간인들이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변화의 물결이 흐르는 도시 지역보다 더 큰 갈망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이제 그들은 누가 자신을 위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도록 할 것인가를 선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변화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과거의 선택이 미국이었다면 현재의 선택은 탈레반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방 국가의 철수로 인한 가장 긴급한 문제, 아프간 난민의 수용

   #탈레반 세력의 주축이 된 소련 점령기의 아프간 난민

소련 점령기는 아프간인에게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기였다. 소련군은 아프간인을 적대시했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소련군의 만행을 피해 약 700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대부분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현 탈레반 세력은 난민 캠프에서 수용되었던 아이들이 성장한 것이다. 과거의 난민이 주로 농촌 지역 거주민이었다면 지금의 난민은 대부분 도시 지역 거주민이다. 이들은 아프간을 재건하겠다는 서방 국가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처해있다. 자신들이 주도한 각종 재건 프로그램에 참여한 죄밖에 없는 아프간인들을 피신시키고 정착을 도울 도덕적 의무가 서방 국가들에게 있다.

   #난민은 전 지구적인 문제

소련의 아프간 침공 당시 발생한 난민은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근본주의 이슬람 정부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 생겨난 난민은 아프간의 급진적인 이슬람 정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기에 파키스탄이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파키스탄과 다른 인접 국가들이 아프간 난민 수용을 거부한다면 다른 서방 국가들이 피난처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난민은 언제나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다. 소련에 이어 미국이 아프간을 점령했던 지난 40여 년간 아프간 난민의 숫자는 항상 200만 명대를 유지했다. 이번에 새로 수십 만명의 아프간 난민이 발생했다.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생존을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게 된다.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은 내부 결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다. 지구촌은 새로운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 캠프야말로 탈레반이 조직원 충원을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참고 자료

Ansary, Tamim., Alas Afghanistan!, August 17, 2021   https://www.mirtamimansary.com/afghanistan-alas/

Chayes, Sarah., “The Ides of August”, August 16, 2021   https://www.sarahchayes.org/post/the-ides-of-august

Mishra, Pankaj.,The New York Review, “The Real Afghanistan”, March 10, 2005 issue   https://www.nybooks.com/articles/2005/03/10/the-real-afghanistan/

Sandbu, Martin., Financial Times, “The west has paid the price for neglecting the Afghanistan economy”, August 22, 2021   https://www.ft.com/content/4f9b452f-d80a-4a37-bec5-bb73674aeadb?sharetype=blocked

Tooze, Adam., Adam Tooze's Chartbook #29: Afghanistan's economy on the eve of the American exit, August 1, 2021   https://adamtooze.substack.com/p/adam-toozes-chartbook-29-afghanistans


김정호 필자

미국에서 사회윤리와 국제정치를, 인도네시아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에서 인문교양 온라인교육 회사인 ‘알투스인’을 운영한다. 동시에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 관련 콘텐츠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한다. 미중 G2 대립이 격화되는 시대에 대한민국의 활로를 동남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