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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美 고교 졸업생 대표의 돌발 연설 “몸에 대한 결정권, 누가 빼앗는가”

By | 2021년 8월 4일 | 기획 · 연재,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지난 6월 2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한 팩스턴 스미스. (사진=AP/연합뉴스)

미국 학교에서는 졸업식 때 졸업생 대표에게 연설을 할 기회를 준다. 발레딕토리언(valedictorian)이라 불리는 이 졸업생 대표는 대개 그 학년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학생이 맡게 된다. 졸업식에는 졸업생과 교사들은 물론, 학부모, 그리고 지역의 유명인사들이 참석할 뿐 아니라 요즘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유튜브에도 업로드 되기 때문에 졸업생 대표의 연설문은 사전에 작성해서 학교 측의 허가를 받는 게 일반적이다.

텍사스주 고교 졸업식서 ‘임신중지’ 연설 파장

하지만 졸업생 대표가 학교에서 허락받은 연설문 원고를 제쳐두고 다른 원고를 꺼내 읽거나 즉흥 연설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가령 학교 교직원의 몰상식한 행동과 무성의를 고발하는가 하면, 자신의 퀴어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흑인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마이크가 끊기는 일도 있다. 올해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고등학교 졸업 시즌인 지난 6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졸업생 대표가 졸업식 중에 학교에 제출한 연설문이 아닌, 따로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팩스턴 스미스라는 학생이 예정에 없던 발언을 시작하자 학교 측에서는 당황했고, 나중에 “학생의 발언이 우리 학교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적어도 연설 중에 마이크를 뺏거나 끄는 일은 없었다. 이 졸업생의 연설은 며칠 후 틱톡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퍼졌고,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먼저 그 연설을 들어보자. (살짝 떨리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로 준비한 연설을 하는 영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저는 제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에 서툽니다. 하지만 제 코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코치님께서 제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I’m not usually very good at expressing my gratitude for the people that I care about, but I would like to say, thank you to Coach. I think he’s had a bigger role in my life than he realizes.

이제 고등학교를 떠나는 지금,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해야 합니다. 저는 원래 TV와 미디어, 콘텐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제게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현재 저에게, 그리고 텍사스주에 사는 수백 만 명의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닌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As we leave high school, we need to make our voices heard. Today I was going to talk about TV and media and content because it’s something that’s very important to me, however, under light of recent events, it feels wrong to talk about anything but what is currently affecting me and millions of other women in this state.

심장박동법 시행, 임신 6주 이후 임신중지 예외없이 ‘처벌’ 

최근 텍사스에서는 심장박동법(Heartbeat Bill)이 통과되었습니다. 오는 9월부터 임신 6주 째부터는 임신중지(국내에서 임신중절, 낙태라 통칭함)가 금지됩니다. 성폭력이나 근친간 임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성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6주, 단 6주 뿐입니다. 6주면 대부분의 여성이 자신이 임신했는지도 모릅니다. 즉 임신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과연 자신이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임신 기간을 버텨낼 수 있을지, 그리고 한 명의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책임을 질 수 있을지 결정할 기회도 갖기 전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타인이 그 결정을 대신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여성 자신의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결정이 타인에 의해 내려지는 것입니다.
Recently, the Heartbeat Bill was passed in Texas. Starting in September, there will be a ban on abortions after six weeks of pregnancy, regardless of whether the pregnancy was a result of rape or incest. Six weeks. That’s all women get. And so before they realize, most of them don’t realize that they’re pregnant by six weeks, so before they have a chance to decide if they are emotionally, physically, and financially stable enough to carry out a full term pregnancy, before they have the chance to decide if they can take on the responsibility of bringing another human being into the world, that decision is made for them by a stranger. A decision that will affect the rest of their lives is made by a stranger.

제게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야심이 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학생들 모두가 그렇고,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우리의 의견을 듣지 않고, 우리의 동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저는 피임약이나 피임기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렵습니다. 저는 제가 만약 성폭행을 당하면 저의 미래를 향한 희망과 바램과 꿈과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I have dreams and hopes and ambitions. Every girl graduating today does, and we have spent our entire lives working towards our future, and without our input and without our consent our control over that future has been stripped away from us. I am terrified that if my contraceptives fail, I am terrified that if I am raped, then my hopes and aspirations and dreams and efforts for my future will no longer matter.

저는 여러분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느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남이 가져간다는 게 어느 정도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인지 느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늘처럼 중요한 날, 12년의 교육과정을 기념하는 날, 우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날, 저와 같은 여성의 목소리에 여러분이 귀를 기울이는 날에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이며, 뒷짐지고 기다릴 수 없는 문제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제 몸과 제 권리를 빼앗는 전쟁, 여러분의 어머니의 권리, 언니와 동생의 권리, 딸이 가진 권리를 빼앗으려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에 이 단상에 올라 현 상황에 대한 만족과 평화를 찬양하는데 발언 시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I hope that you can feel how gut wrenching that is. I hope you can feel how dehumanizing it is to have the autonomy over your own body taken away from you. And I’m talking about this today, on a day as important as this, on a day honoring 12 years of hard academic work, on a day where we are all gathered together, on a day where you are most inclined to listen to a voice like mine, a woman’s voice, to tell you that this is a problem, and it’s a problem that cannot wait. And I can not give up this platform to promote complacency and peace when there is a war on my body and a war on my rights, a war on the rights of your mothers, a war on the rights of your sisters, a war on the rights of your daughters. We cannot stay silent.

감사합니다.
Thank you.

미국의 일부 주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발생 이후 임신중지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사진은 임신중지 금지를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모습. (사진=AP/연합뉴스)

미국 보수층의 역습, 텍사스의 ‘심장박동법’

여성이 임신 여부를 깨닫기도 전에 임신중지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아기를 낳아야 한다니, 21세기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선 1973년으로 돌아가보자.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유명한 재판에서 헌법에 기초한 개인의 권리가 임신중지의 권리를 포함하는지 여부를 살폈고, 여성은 임신 후 6개월까지 임신중지를 선택할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판결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보수층이 반발했지만 미국의 최고 법원이 내린 이 판결로 인해 임신중지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각 주의 법은 모두 위헌이 되었고,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0년대 미국 여권운동 대표적인 결실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성의 권리가 새로운 입법을 통해 보장된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대법원의 헌법 해석을 통한 판결로 보호되었기 때문에 이 판결을 뒤집으려는 미국 기독교계와 보수층은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로도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들은 변화, 즉 과거로의 회귀는 오로지 대법원 장악으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공화당은 상원 원내대표였던 미치 매코널의 주도로 오바마가 지명하는 대법관의 인준을 완전히 거부, 봉쇄했고,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밀렸던 대법관 임명을 추진하면서 대법원을 보수 우세로 바꿔 놓았다.

현재 9명의 대법관 중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일반적으로 보수로 분류되는) 사람은 6명,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은 3명인 것은 공화당의 변칙적 방해행위로 나온 결과다. 특히 트럼프가 지명한 브렛 캐버너 대법관, 조지 H. W. 부시가 지명한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각각 성폭력, 성추행의 혐의를 받아 여성계가 크게 반대했던 인물이고, 역시 트럼프가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짧은 경력 외에도 보수적인 기독교 편향 때문에 사람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되돌리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한 인물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구성이 바뀐다고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방 대법원은 최상급 법원이기 때문에 하급 법원에서 올라온 사건을 재판한다. 따라서 로 대 웨이드의 판결을 뒤집기 위해서는 각 주에서 강력한 보수입법을 통해 진보진영의 위헌 소송을 이끌어내고, 그걸 가지고 대법원에 가야 한다. 이것이 미국 보수진영의 계획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연방 대법원이 보수화된 걸 확인하는 순간 미국의 몇몇 주에서 임신중지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입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와 엄마, 언니와 동생, 그리고 딸의 권리 누가 막는가?

팩스턴 스미스 학생은 최근 통과된 텍사스의 심장박동법(“Heartbeat Law”: 태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 임신을 중지할 수 없다는 법)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아칸소, 노스다코타, 조지아, 아이오와 같은 주에서 이미 비슷한 법을 통과시켰다가 법원의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텍사스 법은 조금 다르다. 단순히 임신중지를 못하게 한 게 아니라, 임신 6주 후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면 누구라도 임신중지 수술을 한 병원이나 그걸 도운 사람들을 고소할 수 있게 한 법이다. 그야말로 환자와 전혀 무관한 이웃이라도 고소가 가능하다. 게다가 고소를 하는 사람에게 1만 달러(우리돈으로 약 1,100만원)를 주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일종의 현상금 제도가 붙은 악랄한 법으로 비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웃을 고발하도록 만든 디스토피아 같은 법이 있으면 과연 임신중지가 사라질까? 이는 보수층의 환상에 불과하다. 임신을 중단하고 싶은데 자신이 사는 주에서 이를 불법화하면 사람들은 다른 주로 이동해서 합법적인 수술을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미국의 역사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만약 미국 전체가 금지하면? 유럽으로 가서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하고 오면 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른 주로 갈 여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임신중지를 막는 법은 사실 가난한 사람들만 임신중지를 못하게 하거나, 허가받지 않은 가짜의사나 임신한 여성 스스로 시도하다가 몸을 상하거나 목숨을 잃게 만들 뿐이다. 다시 말해 이 법은 가난한 사람만을 처벌하는 법인 셈이다. 텍사스에는 254개의 카운티가 있는데, 그중 96개의 카운티에는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클리닉이 단 한 개도 없다. 그런데, 텍사스 여성의 43%가 그 96개의 카운티에 산다. 졸업생인 팩스턴 스미스가 “나의 권리, 어머니의 권리, 언니와 동생, 그리고 딸의 권리”라고 나열한 것은 이 악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이 법은 판사 앞으로 가서 위헌 여부를 심사받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연방대법원으로 올라가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보수 법관으로 채워진 대법원에서 새로운 해석이 나와서 임신중지가 합헌 판결을 받으면 그 피해는 지금의 젊은 여성들과 앞으로 태어날 여자아이들이 받게 될 것이다. 졸업생이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호소한 배경에는 그 절박함이 있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여러 언론사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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