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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과거 반성이 세뇌? 위대한 나라는 고통의 기억에서 달아나지 않는다

By | 2021년 6월 30일 | 기획 · 연재,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노예해방일로 기념돼 온 6월 19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에 서명하고 있다. 미국에서 노예해방일은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뜻하는 단어를 합쳐 ‘준틴스'(Juneteenth)로 부른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2년여가 지나 1865년 6월 19일 텍사스에 마지막으로 해방의 소식이 전해진 것을 기념한다. (사진=AP/연합뉴스)

요즘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 논쟁이 뜨겁다. 딱딱하고 학술적인 이름을 가진 이 이론은 1970년대 미국 법학자들 사이에서 처음 나왔다. 미국에 존재하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은 단순히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겉으로는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법과 제도에 이미 내재되어 있어 인종차별 자체가 구조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인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이론 자체는 낯설어도 이론의 내용은 이제 미국에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가령 1960년대 말까지 횡행했던 레드라이닝(Redlining) 같은 관행은 은행융자, 보험과 건강보험, 거주지 선택 등에서 소수인종과 빈곤층을 합법적으로 차별하는 데 사용되었고, 과거에 이루어진 차별은 지금까지도 그 효과가 지속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요즘 문제가 되는 ‘비판적 인종 이론’은 1970년대 처음 나왔을 때와 다른 의미로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적인 학자들이 비판적 인종 이론을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세뇌시키고 있고, 그렇게 세뇌된 사람들이 각급 학교의 커리큘럼을 결정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국가관을 심어준다’고 주장해서다. 더 나아가 국가를 분열시키고, (백인을 상대로 한) 인종갈등을 조장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왜 이런 논란이 생겼을까? 최근 미국을 휩쓸고 있는 BLM(Black Lives Matter) 운동과 이에 반응한 연방정부와 각급 지자체가 추진하는 변화, 특히 인종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마치 (백인 중심의) 미국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으로 느끼는 백인들의 반발심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40년 넘게 존재했고, 학자들과 캠퍼스 밖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이 이론이 현재 미국이 겪는 변화를 만들어낸 ‘무서운 음모’처럼 포장되어 돌아다니면서 점점 소수(minority)가 되어가는 백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이다.

UC 버클리 교수 로버트 라이시. (사진=AFP/연합뉴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UC 버클리의 교수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이 현상을 이렇게 진단했다.

소위 ‘발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당'(공화당을 가리킨다)이 이제는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학생들이 몰랐으면 하는 미국의 비극적 인종주의 역사를 ‘비판적 인종 이론’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사상교육(indoctrination)’ 혹은 ‘세뇌(brainwashing)’라 부르고 있습니다.
The so-called ‘party of free speech’ is now going after academic freedom. Conservatives lob the term ‘critical race theory’ against the nation’s tragic racial history they don’t want students to know, calling it ‘indoctrination’ or ‘brainwashing.”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겁니다. 이런 역사를 빼놓고 가르치는 것, 아이들에게 우리나라는 항상 완벽한 나라였으며 항상 우리나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에 부합하도록 행동했고, 과거를 반성해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상교육이고, 진짜 세뇌입니다. 이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Well, as an educator, I can tell you that the real indoctrination and brainwashing is in leaving out this history and only teaching children the myths that we have always been a perfect country, always lived up to our ideals, and there’s no need to reckon with our past. That’s dangerous.

우리 아이들이 미국의 현재 모습을 만들어낸 심각한 인종주의를 포함한 모든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재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이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Unless our children know all of our history, including the anguished role racism has played in shaping this country, they can’t possibly understand why we are where we are today, and what we can and must do to better live up to our ideals.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중요합니다. 이제 진실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The stories we tell about ourselves matter. And it’s about time we started telling the truth.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 짐 클라이번 의원(왼쪽)이 지난 17일(현지시간) 노예해방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에 서명한 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및 흑인 의원들 모임인 ‘블랙 코커스’ 멤버들과 함께 축하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최근 미국에서는 텍사스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노예해방기념일로 지켜져온 준틴스(Juneteenth, 6월 19일)를 연방기념일이자 공휴일로 지정했다. 1980년대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가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새롭게 탄생한 연방기념일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근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면서 준틴스를 전국적인 기념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국경일로 만드는 법안이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도 압도적인 표차이로 통과되었다.

의회에서 통과되자 조 바이든은 지체없이 이 법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서명에 앞서 한 연설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준틴스를 연방공휴일로 지정함으로써 모든 미국민이 이 날의 위대함을 느끼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고, 진보를 경축하고, 우리가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이해하는 동시에 앞으로 얼마나 먼 길을 가야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By making Juneteenth a federal holiday, all Americans can feel the power of this day, and learn from our history, and celebrate progress, and grapple with the distance we’ve come but the distance we have to travel.

아시다시피 저는 몇 주 전 털사 인종학살 1백 주년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위대한 나라는 (역사에서) 가장 아픈 순간을 덮어두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위대한 나라는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아픈 순간을 덮어두지 않습니다. 과거의 아픈 순간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위대한 나라는 아픈 기억에서 달아나지 않으며,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더 강해집니다.
You know, I said a few weeks ago, marking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Tulsa Race Massacre, great nations don’t ignore their most painful moments. Great nations don’t ignore their most painful moments. They don’t ignore those moments of the past. They embrace them. Great nations don’t walk away. We come to terms with the mistakes we made. And in remembering those moments, we begin to heal and grow stronger.

하지만 단순히 준틴스를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흑인 노예들을 해방한 것은 미국이 약속한 평등을 완성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작업이 시작된 것을 의미할 뿐임을 알 것입니다.
The truth is, it’s not — simply not enough just to commemorate Juneteenth. After all, the emancipation of enslaved Black Americans didn’t mark the end of America’s work to deliver on the promise of equality; it only marked the beginning.

준틴스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통령과 저, 행정부, 그리고 이 방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은 그 일을 하기록 약속하신 겁니다.
To honor the true meaning of Juneteenth, we have to continue toward that promise because we’ve not gotten there yet. The Vice President and I and our entire administration and all of you in this room are committed to doing just that.

뒤이어 바이든은 정부가 흑인들이 겪어온 차별을 바로 잡기 위해 해야 할 구체적인 방안들을 열거했고, 이 연설이 마친 후 이번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자신이 서명하는 장면을 뒤에서 지켜보도록 했고, 항상 그렇듯 여러 개의 펜으로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나눠서 서명한 후 뒤에 선 사람들에게 펜을 기념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사람들을 불러내면서 바이든이 작은 실수를 했다.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whip)인 짐 클라이번(Jim Clyburn)을 “존(John) 클라이번”이라고 잘못 부른 것이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라서 바이든이 몰랐을 리는 없고, 단지 존과 짐 모두 제이(J)로 시작하는 흔한 이름이라서 단순한 말실수를 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이든의 연설을 모두 기록하는 백악관 웹사이트에서는 바이든이 실수한대로 “존 클라이번”이라고 적은 후 가운데 줄을 그어 “짐”으로 수정해두었다. 잘못을 기록에서 감추는 대신 누구나 볼 수 있게 드러낸 후에 정정한 것이다.  위대한 나라는 잘못을 숨기지 않고 인정한다는 바이든의 말과 다르지 않은 조치였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여러 언론사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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