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셔터스톡)

한국에서 최근 공정 논란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공정에 앞서 단순히 태어날 때부터 가진 정체성 때문에 차별이나 차등을 받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61만 원과 53만 원. 내가 매달 지출하는 나의 건강보험료와 남편의 건강보험료를 한화로 계산한 액수다. 한국의 피부양자 제도와 달리 스위스에서는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보험에 가입한다. 민영 보험사들이 제공하는 수십 개의 상품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 가입할 의무가 있다. 같은 보험사라도 거주 지역이나 추가 옵션에 따라 보험료가 달라지는데 대부분의 스위스 거주자들이 내는 보험료는 나와 남편이 내는 금액과 아주 큰 차이는 없다.

성차별적인 스위스 보험료 산정 기준

한국과 비교해 턱없이 높은 보험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과 나의 보험료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은 나보다 네 살이 많고, 우리는 둘 다 비흡연자다. 지병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약도 없다. 음주량, 운동량도 비슷하다(처음 보험에 가입할 때 신청서에 이 같은 내용을 다 써서 내야 했다). 내가 남편보다 매달 한화로 8만 원씩 더 많은 보험료를 내는 이유를 보험사에 물었더니 “산부인과 진료 등 병원 이용 가능성이 더 많아서”라는 답변이 왔다.

스위스에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은 같은 나이의 남성보다 건강보험료를 더 많이 낸다. 보험사는 ‘산부인과 진료’라고 했지만 실은 임신과 출산을 문제 삼는 것이다. 보험사에 임신과 출산은 ‘위험 요소’다. 순탄하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임신과 출산은 집중적인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과정이다. 혹시 문제가 생기거나 제왕절개 수술을 할 상황이면 의료비용은 급격히 늘어난다. 하지만 내게 더 이상 출산 계획이 없는데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 그룹’으로 분류해 더 많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게 정당한가?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건 여성뿐이니, 이것은 사실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험료 부담을 가중하는 정책이다.

EU의 보험료 성차별 금지 정책

명시적이든 아니든 성별을 근거로 보험료를 차등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들에서는 2012년 이후 금지된 일이다. ‘테스트-아샤(Test-Achats) 판결’이 계기가 됐다. 그러나 스위스는 유럽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EU에 속하지 않은 나라다. 성별을 보험료 산정 기준으로 활용하는 게 합법이다. 스위스의 남녀 보험료 얘기를 더 하기 전에, 우선 EU의 보험료 성차별 금지 정책을 보자.

2010년 벨기에의 소비자 단체인 테스트-아샤(Test-Achats)가 유럽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다. 성별에 따라 보험료를 다르게 매기는 건 성차별이라는 내용이었다. 테스트-아샤가 특히 문제 삼은 건 자동차 보험료다. 자동차 보험료는 건강보험료와 달리 남성이 여성보다 책정하는 금액이 많다. 유럽 대부분의 보험사들은 그 당시 남성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과했다. 남성이 더 험하게 운전을 하고 사고도 많이 낸다는 이유다. 이 점은 통계로 증명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남성이 사고를 더 낸다 하더라도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성보다 더 안전하게 운전하는 남성도 있는데 일괄적으로 남성에게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건 차별이라는 게 테스트-아샤의 주장이었다. 유럽의 최고 사법기관인 유럽사법재판소는 2011년 3월 2일 내린 판결에서 테스트-아샤의 손을 들어줬다. 성별에 따른 보험료 차등 책정은 성차별이니 EU 회원국 보험사들이 성중립적으로 보험료를 다시 산정해야 한다고 했다. 새 법안은 2012년 12월 21일부터 발효됐다.

스위스는 EU 회원국이 아니므로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스위스보험연합은 “보험사들은 자동차 보험료를 산정할 때 가입자의 성별, 나이, 거주지, 차 종류, 운전 경험, 그리고 국적을 고려할 수 있다. 사고 위험도를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성별보다 더 놀라운 것은 국적이다. 여권이 다르면 내는 보험료도 다르다는 게 사실일까. 스위스의 가격 비교 서비스인 콤파리스(Comparis)의 2018년 자료에 따르면, 스위스에 사는 알바니아인 운전자는 같은 국가에서 운전함에도 스위스인 운전자에 비해 자동차 보험료를 최대 95% 더 많이 낸다. 이탈리아인들은 최대 22%까지 더 낸다(swissinfo 보도).

알바니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위스인의 두 배 가까운 보험료를 낸다는 게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보험사들은 떳떳하다. 알바니아인이 스위스인보다 사고를 더 많이 낸다는 통계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는 통계로 증명할 수 있는 한, 국적이나 성별 같은 요소를 반영해 보험료를 차등 책정하는 게 허용돼 있다. 그 결과, 그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19세 알바니아 남성은 같은 조건의 19세 스위스 남성보다 훨씬 더 비싼 자동차 보험료를 내야 한다. 이것이 공정한 것일까?

(사진=셔터스톡)

숨어있는 성차별적 가격, 핑크 택스

성별이나 국적 같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정체성 때문에 남들보다 보험료를 더 내는 건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마트에서 물건을 사면서 단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이유로 물건값을 더 지불한다면 어떨까.

핑크 택스(pink tax)란 양과 질이 동등한 상품인데도 여성용으로 포장됐다는 이유만으로 더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현상을 뜻한다. 프랑스 여성 단체인 조르제트 상드(Georgette Sand)가 2014년 ‘장밋빛 세금(taxe ros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문제 제기를 했고, 이것이 다른 나라에 퍼지면서 핑크 택스라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여성용 물품이 대개 분홍색으로 포장된 경우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일회용 면도기다. 성능이 똑같은 면도기가 여성용이라고 표시된 분홍색 포장지에 들어가면 값이 달라진다. 스페인의 소비자보호단체(FACUA-Consumidores en Acción)가 2018년에 조사한 결과 남성용은 하나당 0.09유로, 여성용은 0.23유로였다. 스페인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면도기 가격 차이가 존재했다.

핑크 택스의 다른 케이스들을 보자. 의류 드라이클리닝 가격도 여성용 옷일 경우 더 비싸다. 비슷한 크기와 재질의 옷이라도 여성용이면 ‘다루기 어렵다’는 주관적인 이유가 붙어 값이 올라간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를 때도 여성이 남성보다 돈을 더 내야 한다. 머리카락 길이가 똑같은 남녀가 단순히 커팅만 하는데도 그렇다. 대부분 미용실 가격표에 남성 커팅과 여성 커팅 비용이 따로 적혀 있다. 백화점에서 파는 의류 가격 뒤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스위스의 경우 수입 여성복에는 5%, 수입 남성복에는 3%의 세금이 붙는다.

평소 별생각 없이 이용하는 많은 물건과 서비스에 이처럼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로 추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붙어 있다. 일일이 가격을 비교해보지 않으면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부분이다. EU 의회는 2018년 핑크 택스를 없애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생리 빈곤' 유발하는 탐폰세

핑크 택스가 교묘하게 숨은 추가 비용이라면, ‘탐폰세(tampon tax)’는 대놓고 특정 성별에 부당한 부담을 지우는 비용이다. 탐폰세는 생리 중인 여성에게 꼭 필요한 생리대(패드형), 탐폰(삽입형), 생리컵 등의 생리용품에 붙은 부가가치세를 뜻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사춘기부터 50세 전후 폐경이 올 때까지, 평균 한 달에 한 번, 한 번에 2~3일부터 일주일 이상 걸리는 생리를 한다. 한 여성이 일생 중 생리를 하는 날을 모두 합치면 8년쯤 되고, 생리용품은 그 기간 중 계속 써야 하는 필수품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생리용품을 사치품으로 분류해 높은 부가가치세(VAT), 즉 탐폰세를 매긴다.

미국은 주(州)별로 세율이 다른데, 여전히 대다수 주에서 남성 발기 부전 치료제(비아그라)나 발모제는 생필품으로 분류해 면세하면서 생리용품에는 부가가치세를 붙인다. 프랑스에선 2015년 탐폰세 인하 법안이 부결됐는데, 당시 크리스티앙 에케르트 국무장관이 “남성 면도용 크림에도 부가가치세 20%가 부과된다”고 했다가 큰 비난을 받은 일도 있다. 어떻게 면도용 크림과 생리용품을 비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건 최근 몇 년 사이다. 탐폰세를 인하하거나 면제하고, 공공시설에 생리 용품을 무료로 공급하는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탐폰세를 폐지한 최초의 나라는 뜻밖에 케냐(2004년)다. 케냐 외에도 나이지리아, 우간다, 탄자니아, 르완다 등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탐폰세를 폐지했다. 생리용품 살 돈이 없어 생리 기간에 학교에 가지 않는 여학생들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독일은 2019년 11월 하원에서 탐폰세율 인하 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그전까지 생리용품에 붙었던 부가가치세 19%는 2020년 1월부터 7%대로 내려갔다. 당시 스위스에서는 ‘심지어 독일에서도 우리나라보다 생리용품이 싸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쏟아졌었다. 탐폰세 폐지가 여성 인권의 기준인 양 경쟁이 붙은 분위기였다. 스위스는 여전히 생리용품을 사치품으로 보고 7.7%의 부가가치세를 매기고 있다. 2018년 세율을 2.5%로 낮추자는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긴 했으나 아직 상원에 계류 중이다.

영국에선 브렉시트와 탐폰세가 하나로 묶였다. 진작부터 탐폰세를 없애려고 했지만 EU법에 묶여 폐지하지 못했다(EU법상 현재 생리용품에는 5% 이상의 세금이 부과되는데, 이 규정은 2022년까지 삭제될 예정이다). 2021년 1월 1일 브렉시트가 발효된 직후 영국 정부는 5%이던 탐폰세를 완전히 폐지한다고 공표했다.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와 병원에 생리용품을 무상 공급하기 시작했다.

생리용품과 관련해 가장 급진적인 국가는 스코틀랜드다. 2020년 의회에서 생리용품 무료 보급 법안이 통과돼 세계 최초로 누구나 생리용품을 무상으로 쓸 수 있는 나라가 됐다. 필요할 때 약국이나 주민센터에 가면 받을 수 있다. ‘무상 급식’도 아니고 ‘무상 생리대’다. 세율 인하, 무상 공급 같은 정책에는 저항이 따른다. 예산이 필요하고, 그것은 다른 시민이 낸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진국들이 탐폰세 폐지나 생리용품 무상 공급을 추진하는 건 ‘생리 빈곤(period poverty)’을 심각한 문제로 보고 해결하기 위해서다. 잘 사는 나라에서도 여성 10-20%는 생리용품 살 돈이 없어 생리 기간에 학교나 직장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 한국에서 논란이 됐던 ‘깔창 생리대’ 이슈처럼 유럽의 빈곤 여성들도 양말이나 휴지로 생리대를 대신한다. 탐폰 가격은 여성의 교육, 직업, 건강의 문제와 직결된다.

출발선으로 '가는 길'은 공정한가

한국은 어떨까. 이미 2004년에 생리용품에 붙는 부가가치세 10%를 폐지해 필수품으로 분류했다.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훨씬 앞선 조치였다. 하지만 면세 이후에도 한국의 생리용품 가격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문제다. 생리용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세만 면제되고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세는 면제 대상이 아니라서다.

부분적으로는 상위 3개 업체가 시장 대부분을 점유하는 독과점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는 2018년부터 만 11세에서 18세까지의 저소득층 여성에 생리대 비용 월 1만 1000원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선 생리대 가격을 더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달 초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월경 용품 가격안정화법’(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여성들에게는 생리용품이 필수품인 만큼 국가는 이를 단순히 시장논리가 아니라 공정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처럼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정’을 앞세운 시장규제기관이 있는 이유다.

유럽에서도 공정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다만 한국 사회와 다소 결이 다르다. 최근 한국 사회의 공정 논란은 '투명한 경쟁, 능력 위주의 선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보인다. 경쟁을 없앨 수 없다면 과정이 공정해야 하는 건 일종의 당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계속 자문해야 한다. 즉 경쟁의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들 적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약육강식의 정글논리'가 자칫 정당화 될 수 있다.

생리대 살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 같은 제품도 돈을 더 주고 사야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직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고 임금은 더 적게 받는 사람이 있다. 경쟁 전에 이미  삶이 지치는 조건이다. 단순히 여성 차별 문제는 아니다. 자동차 보험료처럼 남성이 성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구조적 차별이 산적한 사회에서 경기장의 출발선에 가는 길 자체가 공평하거나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지점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감대가 없다면 ‘공정’에 관한 정책과 대안이 자칫 또 다른 갈등만 조장할 수 있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