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셔터스톡)

일상을 옥죄고 있는 코로나19는 아직 진행 중이다.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고  확진자 역시 날마다 수백 명씩 나오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 생겼다. 미국과 유럽은 백신 접종 덕에 집단면역 수준에 다가서고 있다. 한국도 백신 접종을 한지 105일 만인 6월 10일 1차 접종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오는 11월까지 집단면역을 달성하겠다는 목표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엿보인다. <피렌체의 식탁>은 코로나19 위기의 출구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여러 필자들의 '코킷리스트'(코로나19+버킷리스트)를 모아봤다. 성(性)과 나이, 직업이 다르지만 그들의 소박한 바람들이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지겨웠던 1호선 다시 타보고 싶다-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미국 Pace University 방문연구원

나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려는 무렵에 세상이 바뀌는 팬데믹이 일어났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이런 저런 불편함이야 있었지만, 조용한 동네에서 산책을 하며 글쓰기에 집중하면서 행복하고 생산적인 칩거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걸 누리면서도 가지지 못한 하나가 커 보이는 게 인간이다. 원래 미국에 오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을 오갈 예정이었다가 마스크를 쓴 채 14시간 비행해야 하고, 도착한 후 2주 동안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격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 꼼짝없이 미국에 갇히게 되었다. 따라서 내게는 한국을 다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팬데믹의 끝이다.

한국에 가서 지겨웠던 지하철 1호선을 다시 타고 싶다. 저녁에 종로5가역에 내려 문닫은 가게들을 지나 은주정에 가서 시큼한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먹고, 소주가 들어가면서 점점 커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다. 평래옥에서 냉면을 먹자고 약속을 잡고, 종종 하던 것처럼 두 시간쯤 일찍 나가 커피한약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들고 일하는 척 빈둥빈둥 노는 것도 좋다.

토요일 낮에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이 미술관의 한국 근대회화 큐레이션은 최고다)에 가서 구경을 한 다음, 걸어서 무교동 충무집에 가서 도다리쑥국이든 민어탕이든 그 계절의 음식을 먹고, 다시 천천히 걸어서 광화문 씨네큐브에 가서 모르는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싶다. 제목도 모르는 영화라면 더 좋다. 혹은 숙대입구 구복만두집에 가서 뭘 주문해야 하는지 모르는 그 집 메뉴판을 보면서 다 먹고 후회할 만큼 시켜서 먹은 후 "길이 애매하니 택시를 타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의 말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해방촌 신흥시장으로 가고 싶다. 반찬냄새 가득한 시장 한가운데 있는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아티스트 친구의 전시회를 보고, 결국 아티스트의 친구들인 다른 관람객과 함께 시장 건물 옥상에서 상영하는 독립영화를 보고 싶다.

보면서 이게 재미있어서 보는 건지, 아니면 그런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게 행복할 뿐 영화는 핑계인 건지 궁금해하면서 영화에서 눈을 돌려 머리 위에 보이는 서울타워의 불빛을 보고 싶다.

흠.. 동두천행 1호선 막차가 몇 시였더라..?

◇아버지 팔순 잔치, 풍악을 울리리라

-정은정 농촌사회학자, <대한민국 치킨展> 저자

세월 지나 사라진 풍속 중 하나가 회갑연과 돌잔치일 것이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이때 만 60세를 채우는 일이 무에 대수랴. 주위에 아기들 보기도 어렵지만 이제 민폐라 여겨 돌잔치도 가족들끼리만 조용히 치르는 시대다. 대체로 부모님 회갑이 다가오면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거나 사촌지간까지 불러 식사를 하는 정도로 의례는 단출해졌다.

하지만 1941년생인 우리 아버지는 출장뷔페를 불러다 집에서 회갑연을 열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부모님 해외여행 짝도 못 맞추고, 쓸쓸해 보여서 왁자하게 환갑잔치를 열었다. 결과는 대만족. 크게 한 일도 없건만 우리 4남매는 요즘 세상에 아버지 환갑잔치도 열어준 효자 소리를 들었다. 내심 어른들은 환갑잔치를 바랐던 것이다.

아버지는 칠순이 되었을 때, 기대했던 새어머니(?)도 없이 홀몸노인의 삶이었다. 아버지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칠순잔치를 열었다. 행사전문 연회장에서 전문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식구대로 큰절하고 노래방 기계 가져다 놓고 아버지는 노래하고 딸들은 백댄서가 되어 춤을 췄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칠순잔치는 또 히트를 쳤다. 그때 알았다. 어른들은 뷔페를 좋아하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며 한복을 입고 왔다갔다 하는 자식들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팔순잔치를 당연히 기대하고 있었을 아버지. 하지만 코로나19가 모든 만남을 막아버렸다. 가장 위험하다는 최고령의 노인이 된 아버지는 팔순 생신을 직계 자식들과 식사만 하고 넘겨야만 했다. 돈 봉투도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명이 짧은 집안에 유일하게 팔순을 넘긴 남자 어른인 아버지의 섭섭함을 올해는 늦었지만 꼭 풀어드리고 싶다.

백신 2차 접종을 무사히 마친 아버지는 바깥출입에 자유로워지셨다. 우리 남매들도 백신 맞고 코로나19가 물러나면 아버지 팔순잔치를 늦게라도 열고 싶다. 알록달록한 한복 입고 마이크에 대고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겠다. 아버지 팔순잔치 현수막 문구도 정해 두었다. ‘경축! 코로나19 종식! 아버지 100세 가즈아!’.

◇다시 자유롭게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박희아 대중문화평론가,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저자

얼마 전, 대중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52명의 인터뷰가 담긴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인터뷰집에는 코로나19 3차 유행이 본격화됐던 2020년 말과 2021년 초에 걸쳐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서문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인터뷰 장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당장 공연에 올라가야 하는 배우들을 안심시키는 일도 매우 어려웠다. 짧다면 짧은 3차 대유행 기간 동안, 나는 기자로 일하며 가장 힘든 순간을 경험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장 사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몇몇 공간들을 섭외해 그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맴돌았던 차가운 냉기는 서로의 거리가 멀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19의 유행은 내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하면서 마주한 온갖 사건사고들에 비할 수도 없이, 가장 범사회적이며 가장 극단적으로 산업의 구조를 흔드는 일이었다. 이 시기를 겪으면서 평론을 하고 대중의 니즈를 분석하는 글을 쓸 수 있는 매체는 거의 사라졌다. 나 또한 그 영향으로 몇 가지 일을 그만두면서 알게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만난 예술가들과 프리랜서 기자인 나 사이에서 같은 불안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또한 사람이 좋아서 끊임없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탐닉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제 코로나19 종식 이후의 평화로운 인터뷰를 꿈꾼다. 서로가 보균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 없이 매우 평화롭게 카페 한편에서 어제는 무엇을 먹었냐는 안부 인사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요새 걱정 많으시죠?”라는 인사 대신에 한창 촬영 중인 작품 때문에 바쁜 당신이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물으며 웃곤 하던 대화가 그립다. 요즘 자주 코로나 시대 이후를 그린다. 그 상상 안에서는 음악가와 배우, 소설가와 나 사이에 어떤 방해 요소도 없다. 다시 우리는 글을 쓰고, 노래하고, 연기할 수 있는 무대를 찾아간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코로나 종식을 섣불리 기대 않는다

-강원국 작가,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  저자

2020년 1월 코로나19가 발발했을 때, 지나가는 소낙비인 줄 알았다.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희번덕거리며 겁을 줬지만, 그러다 말겠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난’이 아니란 걸 알았다. 강의가 속속 취소됐다. 강의료가 거의 전부였던 월수입이 그달 그달 내야 하는 건강보험료를 밑돌았다. ‘앓는 소리’ 하지 말자,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위기는 전화위복의 기회일 수 있다고 되뇌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책을 쓰며 버텼다.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진다는 희망으로 견뎠다.

코로나를 1년여 겪으면서 강의 시장도 바뀌었다. 비대면 강의 시장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학생이건 직장인이건 한국인의 적응력은 대단하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역량이 뛰어나다. 비대면 강의와 학습, 회의가 빠르게 정착됐다. 강의하는 사람이 이동할 필요가 없어졌다. 집에 앉아 서울 강의를 10시에 끝내고 11시부터 부산 강의를 할 수 있다. 대면 강의는 하루 2개 이상 어렵지만 비대면은 3~4개도 가능하다. 움직이는 수고와 비용도 들지 않는다. 머지않아 대면 강의까지 재개되면 강의 기회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 늘어날 듯하다.

비대면 강의는 수강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대면 강의에서는 강의 듣는 사람이 하나의 뭉텅이 취급을 받는다. 강의 듣는 사람 모두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볼 뿐이다. 오직 강의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그의 말을 듣는다. 강의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비대면 강의는 그렇지 않다. 강의 듣는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한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개개인으로 참여한다. 채팅창에 언제든 의견을 올리고 궁금한 걸 질문할 수 있다.

코로나 종식을 섣불리 기대하지 않는다.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비오는 환경에 적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대면소통의 빈도가 다시 높아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소통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오프라인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고대하기 보다는 온(溫)라인의 온도를 어떻게 높일지 고민하고자 한다. 그런 가운데 코로나가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우리의 관계는 한층 더 성숙해져 있지 않을까.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코르오텔 공연장에서 보건당국과 파리국립병원연합(AP-HP) 등이 설계한 실내 콘서트 실험이 진행됐다. 프랑스 대표 록그룹 앵도신(Indochine)이 무대에 올랐고 코로나19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은 5천명이 콘서트에 참여했다. (사진=EPA/연합뉴스)

 

◇콘서트에서 원 없이 박수치고 싶다

-유지민 칼럼니스트, 강명중학교 3학년

내가 코로나가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은 뭐니뭐니해도 콘서트를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프라인 공연장에 가서 공연을 본 게 2019년 11월 무렵이니 벌써 1년 반이 훌쩍 넘어간다. 작년 코로나 시국이 되고 온라인 콘서트를 4-5번 정도 봤는데,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공연을 보는 것에만 의의를 둔다면 훨씬 편하지만, 콘서트에선 공연을 보는 목적 이외에도 많은 관객들과 함께 있는 소속감과 열기를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연을 보기 전에 갈 준비를 하고 기대하며 같이 공연을 보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하는 것도 오프라인 콘서트의 큰 매력이다. 이렇게 무료한 일상 속 거의 유일했던 나의 취미가 한 순간에 사라지니 이전보다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다.

더욱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현재 방침에 따라 콘서트는 집회로 분류되어 코로나 관련 거리 두기와 방역 수칙을 준수한다고 해도 100인 이상 규모의 공연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확진자 수가 연일 낮은 숫자를 기록하던 생활 속 거리 두기 단계에서 클래식 공연, 뮤지컬 등은 방역 수칙을 준수하며 수용 인원의 50% 규모 정도에서 오프라인 공연을 이어 나가고 있고,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콘서트는 그마저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지자체에서 안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오프라인 공연을 한다고 공지를 띄우고 티켓 예매까지 끝마쳤다 무산된 공연도 꽤나 있으며, 몇 번 있었던 소수의 콘서트들도 총 관객수 90명처럼 극도로 소규모로 진행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 아니어도 이미 대관 및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공연 취소를 당한 것을 보며 남 일 같지 않게 안타까워했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문제인 부분은 나와 같이 취미를 잃은 관객들이 아닌 생업이 끊긴 공연 업계 종사자들이다. 온라인 콘서트라도 열 수 있는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중소 기획사 소속이거나 프리랜서인 경우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코로나 초기에는 빠르게 확산되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전면 금지 했을지라도, 언제 상황이 나아질 지 아무도 모르는 이 시점에서 무작정 콘서트를 통제 하는 것은 결국 콘서트 산업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는 코로나 시국 속에서 안전하게 공연을 재개하는 방침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또 일정량 이상의 백신 접종이 완료되면 수용 인원을 축소해서라도 오프라인 공연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스갯소리로 어느 가수가 오프라인 공연을 연다면 그들의 안티(anti)까지 티켓을 살 것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정말 오프라인 공연이 절실하다. 하루 빨리 상황이 나아져 다시 공연을 가게 되는 날, 함성을 지르지 못하고 박수만 원 없이 치게 되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10년 목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금융 오디세이> 저자

경제학을 배운 사람들의 특징은 기회비용을 따지는 것. 코로나19가 끝나면 무슨 일을 할까를 생각하기 전에 버려야 할 것부터 짚어 본다. 그런데 버릴 것이 별로 없구나!

근 10년 동안 우리 집은 유학, 입대, 지방근무 때문에 누군가 한 명이 꼭 출타 중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아들이 귀국했고, 새내기 직장인으로 회식과 모임에 여념이 없었던 딸도 집에 일찍일찍 들어왔다. 재적 인원이 꽉 찬 작은 집에서 아들놈과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도 하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딸과 드라이브 가는 일도 잦았다. 이런 좋은 것들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결국 ‘코로나19가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코로나19가 끝나도 버리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이렇게 수구꼴통이었나?

수구꼴통의 포스트 코로나 계획.

1. 이미 작성해 놓은 독서 목록을 끝낸다. 위기가 내년 초까지 갈 줄 알고 만들어서 목록이 좀 길지만, 꼭 끝내리라. 비대면 시대가 시작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유튜브의 세계에서 그동안 ‘찜 해 놓은’ 훌륭한 동영상(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들도 틈틈이 다 시청하리라.

2. 부모님, 식구들과 형성해 놓은 지금의 대화 채널을 유지한다. 요즘 자주 뵙는 부모님의 표정에서 그 분들의 무료와 고독을 느낀다. 전화 한 통 하는 데도 게으름을 피웠던 것이 죄송할 뿐이다. 자식들에게도 가끔 용돈만 푹 찔러 주지 말고, 대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혹시 아이들 생각이 다르면 어쩌지?).

3. 10년을 목표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내 나이 5학년 9반. 하이킹, 자전거, 수영을 앞으로 또 20년 하기는 지겹고, 70대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어렵다. 지금부터 근육에 새로 심어 넣는 기억이 나의 코로나19 기념비가 되리라.

4. 적금을 깬다. 지난해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을 터키로 계획했다가 포기.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물 냄새를 맡는다는데, 낙타 같은 지구력으로 결혼생활을 해온 내가 눈치는 빠르다. 가을쯤 넌지시 짝꿍에게 비행기표를 건네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무척 암울하리라.

 

볼로냐의 아시넬리탑. 1109년 귀족 아시넬리를 위해서 세워진 것으로서 정상에 있는 전망대까지 486개의 계단이 있어 당시 볼로냐 건축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사진=셔터스톡)

◇이탈리아 볼로냐行 비행기 티켓을

-김용운 '피렌체의 식탁' 편집장

다시 팬데믹 이전의 상황이 회복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유럽여행이다. 오감 모두 체감할 수 있고 영감까지 얻어올 수 있는 여행은 온라인으로 대체 불가능이다. 모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 가서 새로운 자극을 받고 다시 돌아오는 여행이 팬데믹 시대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숱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여행의 나날들은 짧은 순간들에 불과하다. 그 짧은 순간들이 관성과 권태로 부패하기 쉬운 일상을 환기시켜주었기에 사람들은 여행을 다녀왔다.하지만 목적지가 없으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나 방황이 된다. ‘어디를 가볼까?’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실은 여행에 앞서 가장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책 한 권의 힘 덕분이다. 최근 권은중 저자가 쓴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를 몇 장 넘기자마자 이탈리아 볼로냐를 여행지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20여 년 간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직업적 회의를 느껴 사표를 던지고 이탈리아로 떠나 요리사 수업을 받았다. 마침 요리사 양성학교가 볼로냐 근처에 있어 볼로냐의 맛에 끌렸다가 볼로냐 전체에 매혹 당한다. 볼로냐는 스파게티의 본고장이다.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미식(美食) 도시다. 그 뿐만 아니다. 저자는 “교회와 황제에 맞서고 대학을 세우고, 여성과 약자를 보호하고, 중소상인과 농업인을 보호하는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라고 강조한다.

볼로냐는 도서전으로 유명한 도시다. 볼로냐에는 움베르트 에코가 기호학을 가르치며 <장미의 이름>을 구상했던 천년 역사의 볼로냐 대학이 시내 곳곳에 산재했다.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와 아시시 등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는 가봤지만 볼로냐는 그간 한 번도 가볼 생각을 안했다. 책 한 권이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도 바꾼다.

아직 팬데믹은 끝나지 않았지만 인류는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코로나19 백신을 만들어냈다. 접종률 또한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 한해 이르면 하반기부터 그간 잠겨있던 해외여행 제한도 풀릴 것이다. 너나없이 가고 싶은 곳들을 떠올리며 준비에 나설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고 싶다. 그새 꿈 속에서 볼로냐의 길고 긴 회랑과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을 몇 번이나 사전답사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