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진 20대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 씨의 추모문화제가 지난 13일 오후 울 중구 서울지방고용청 앞에서 열렸다. 컨테이너 모형 위로 참석자들이 꽂아둔 추모의 꽃과 함께 선호 씨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한국노동산업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산업노동연구>에 ‘노동조합은 산업재해 발생과 은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발표자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 김정우 전문위원이었다.

김 위원은 노동연구원의 2011~2017년 사업체 패널조사 자료를 분석해 “전체 데이터에 나타난 산재 사건 은폐율이 66.6%에 달했다”며 “실제 산재로 인정되는 사례보다 2배 정도 규모의 은폐된 산재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재 은폐율 66%, 30인 미만 기업 포함 시 더 늘어나

산재 은폐율이란, 업무와 관련된 사고 혹은 질병을 경험한 근로자 비율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근로자의 비율을 뺀 값이다.

논문에 따르면 노조 가입자가 1% 증가하면 해당 사업체의 산재 발생 가능성은 0.7% 낮아진다. 또한 발생한 산재의 은폐율 역시 4.1%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위원은 “노동조합은 단체협상과 고충처리 활동을 통해 작업장 안전조치 및 노동강도 완화에 힘써 산재 가능성을 낮추고, 적극적 산재 발굴 활동으로 산재 은폐를 차단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의 논문은 최근 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평택항과 부산항에서의 잇따른 현장 안전사고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산재 문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논문을 확인해 보니 ‘국내 30인 이상 기업 중 표본을 추출’해서 낸 통계라고 한다. 산재 다발 업종인 건설업과 제조업은 30인 미만 사업장 비율이 9할이 넘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안전설비며 감시가 취약하다. 목격자 또한 적으므로 은폐 역시 훨씬 수월하다.

논문에서 나온 통계는 정작 산재 취약지대를 빼고 계산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 위원도 은폐된 산재가 더 많다고 추론한다. 10년 제조업 현장직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산재란 결국 쨍쨍한 햇볕 아래서만 보이는 그림자다. 정작 가장 위험한 그늘 위로는 결코 드리우지 않는다. 아픔이 자아내는 신음, 때론 죽기 직전의 단말마는 양지까지 뻗어나가지 못한다. 그저 묻힐 뿐이다.

올해로 산재보험이 도입된 지 50년이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근로복지공단이 쌓아놓고 있는 기금만 5조 원에 달한다. 사실상 흑자 장사다. 산재 사망사건이 그리 많은데 흑자라니. 참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에게 효율이라는 두 글자는 늘 생명보다 무거웠다.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정시근무는 무시하기 일쑤다. 효율적인 일처리를 위하여 과정과 절차도 늘 생략한다. 효율적인 인력배치를 위하여 보조 인력 또한 늘 고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회사 운영을 위해 산재처리 역시 뒷전이다. 대다수가 재벌 기업 하청 신세인 중소기업은 산재처리를 두려워한다. 기업 내 산재 처리자가 누적되면 대기업 입찰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그 탓에 다친 노동자에게 공상 처리를 종용한다. 공상 처리는 명백한 업무상 재해임에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을 신청하지 않고 대신 일반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사업주로부터 치료비나 약간의 합의금만 받고 상황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효율지상주의’는 산업 노동현장에서도 가치 전도 현상을 낳았다. 일하다 다치면 회사가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필자 역시 산재를 공상 처리하고 다음날 바로 출근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회사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이니 노동자들 역시 동료와 자주 나누는 덕담이 “돈 벌러 와서 다치지 말자”이다. 애초에 다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개개인이 알아서 몸부터 사려야 하다니, 이게 과연 바람직한 상황인가?

'산업장 안전' 개인에게 전가, 면피하기 바쁜 기업과 정부

중공업 사외 하청에서 용접공으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다섯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판이 홀로 작업하던 과장님의 다리를 덮쳤다. 크레인 가운데 걸려 있을 후크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떨어졌다.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작업장 위는 피로 물들었다. 천만다행으로 머리 위로 떨어졌다거나, 몸 전체가 깔리진 않았지만, 과장님은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의 사고 이후부터 산업안전인력공단 공무원이 한 달 단위로 점심시간 지날 무렵 찾아왔다. 종업원을 모아놓고 하는 이야기는 기껏 "지게차가 위험하다", "그라인더가 위험하다", "귀마개를 제대로 안 쓰면 난청 온다" 등등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정작 현장에서 지게차 때문에 다친 사람, 그라인더 때문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공정 형님께서 철판과 압착기 사이에 손가락 끼는 바람에, 공상 처리 후 유급 휴가를 가셨다. 휴직기간을 뺀 약 1년 8개월 동안 종업원이 스무 명 안 되는 회사에서 두 번의 큰 산재를 목격한 셈이다.

내가 다닌 어느 회사나 똑같았다. 이따금씩 작업자들 모아놓고 한다는 이야기의 수준이 ‘알아서 몸 조심해라’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중소기업의 안전 대처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알려줬으니 끝. 이제부턴 다치면 당신 탓.’ 심지어 몇몇 관리자는 노동자의 안전불감증이 제일 문제라는 소리를 한다. 일하는 사람이 안전용구도 제대로 안 챙겨서 다친다는 게 요지다. 그 안전용구 안 챙겨주는 곳이 어딜까? 제대로 갖출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일하랍시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이는 과연 누굴까? 안전의 무게를 오롯이 개인한테 전가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의 안전 인식을 보여주는 단면도다.

안전 문제는 보안 문제랑 결이 비슷하다. 이중, 삼중 안전장치로 단단히 동여매어야 비로소 유효한 효과가 나타난다. 그저 관리자 한 명이 매뉴얼만 읊어주는 방식만으로 산재가 줄어들 리 없다.

산업안전감독관 증원 등 안전관리 시스템 개선 필요

필자가 몸담은 제조업에서 최고 산재 유발요인은 지게차였다. 매년 천 명 이상이 지게차 때문에 다치거나 혹은 목숨까지 잃는다. 이를 알기에 고용노동부도 3t 미만 전동식 지게차 운전자가 ‘12시간의 의무교육’을 받도록 조항을 신설했다. 위에서 말한 ‘알려줬으니 끝. 이제부턴 다치면 당신 탓.’ 방식의 탁상행정과 궤를 같이 한다. 아직 조항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으나 문제점이 빤히 보인다.

중소기업에서 지게차 운전시키는 방식은, 운전면허 있는 사람 아무나 잡아서 ‘이거 들어서 갖다 놔라’식이다. 사용법을 제대로 교육하는 경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직장 동료며 친구, 동생 모두 그런 식으로 지게차를 다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전교육이라? 우선 기업에서 순순히 보내줄지가 의문이다. 이제껏 현장에서 안전교육을 얼마나 적당히 뭉개고 눙쳤는지 알기에 회의감이 든다. 무엇보다 그 안전교육을 이수받은 사람만 지게차를 운전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만약 안전교육 이수자가 결근일 때 지게차를 움직여야 하는 경우. 기업이 과연 작업을 중지할까, 아니면 교육 미이수자가 지게차에 탈까? 뻔히 후자의 상황으로 흘러갈 텐데 이를 감시할 인력은 몇이나 될까?

평택항에서 故 이선호군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진해의 부산신항에서도 지게차에 깔려 노동자 한 분이 목숨을 잃었다. 현장엔 신호수와 안전 관리자도 없었고, 피해자는 안전 교육이며 안전 용구를 일체 받지 못했다고 한다. 부산신항처럼 큰 곳도 이런 식인데 중소기업은 오죽하겠는가. 노동현장의 산업재해를 예방하는 산업안전감독관 정원은 2015년 409명에서 2020년 705명까지 늘었지만, 여전히 사업장 대비 감독관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산업안전감독관은 세세한 현장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사하고 몰려드는 서류를 처리하기조차 빠듯하다. 기업들도 이를 알기에 서류만 적당히 꾸미고 현장을 돌보지 않는다. 심지어 기업에서는 산업안전감독관 증원을 반대하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신컨테이너터미널에서 화물 컨테이너 작업 중 숨진 고(故) 이선호 씨 사고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재에 대한 엘리트들의 인식 달라져야

가장 갑갑한 건 ‘교육과 처벌’에만 매달리는 정부의 모습이다. 둘의 공통점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고’, ‘분야의 전문성 또한 필요하지 않은’, 전형적인 서류 놀음이란 점이다. 하청 노동자로서 안전문제를 다루는 엘리트들의 게으름과 멸시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에게 산재란 ‘공부 못 해서 몸 쓰는 일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사고’에 불과해 보인다.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겠지만 그 뿐.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한 대처를 세울 생각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가르쳐봐야 환경이 안 바뀌면 그만이요, 벌을 세게 준다고 한들 안 들키면 그만이지 않은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중소기업을 위주로 한 안전시설 확충 지원이다. 양대 노총이 자리 잡은 대기업의 큰 사업장은 그나마 안전시설이 어느정도 마련되어 있다. 문제는 중소기업과 하청 노동자들이다.  정부는 이 부분을 보정해주어서 중소기업과 하청 노동자도 안전시설이 구비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중소기업에서 사고가 훨씬 많이 일어나겠는가? 인력과 시설이 부족해서 그렇다. 다리가 깔렸던 과장님은 크레인 반대편을 봐줄 작업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뼈가 부러진 형님은 또 어떤가? 설비에 작은 센서 하나만 달렸으면 이런 일이 발생했겠는가.

중소기업이 안전설비를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노후한 지게차를 보면 백미러며 사이드 미러가 안 달린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위험한 노후 설비는 회사와 정부가 반반 부담해서 폐기해 나가는 게 맞다. 또한 안전감시관 숫자를 늘려 사고가 일어날 상황도 지속적으로 차단하게 해야 한다. 산업안전관리 자격증 보유자는 늘어 가는데 채용을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의 엄벌주의는 오히려 사건을 더 은폐할 동기만 만들어 준다. 대기업이 산재로 인해 입찰 제한을 받으면 하청 중소기업은 더 어려워진다. 산재가 날 환경을 줄이되, 안전에 최대한 협조한 기업에 대한 '운용의 묘'도 필요하다.

둘째는 산재가 일어나도 은폐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 노조원의 사고는 결코 감출 수 없다. 논문에서도 노동조합이 산재 은폐를 막는 역할을 한다고 나왔다. 은폐를 시도한 순간 조직이 움직이고, 지역 언론이 받아서, 작업장 내 일어난 사고를 공론화한다. 문제는 노조 설립 자체가 어려운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이런 비빌 언덕조차 없다. 정부와 언론이 산재를 호소하는 노동자를 적극 보호해주어야 한다. 최근 작업장 배치 전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점심 무렵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외국인 근로자 한 분이 작업복 차림으로 “자전거 타다 다쳤어요”라며 접수처에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 한창 할 때인 대낮에 자전거를 탔을 리 있는가? 이런 촌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안전교육이랍시고 ‘안 다칠 방법’만 가르치지 말고, ‘다쳤을 때 대처하는 방법’도 널리 알려야 한다.

효율에만 치중한 접근이 사고 불러, 산재 참상 직시해야

모든 노동은 단지 ‘먹고살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행위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접근하면 산재는 결코 줄일 수 없다. 한국 사회는 그간 돈 위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묵과해왔다.

한국에서는 법조인이 ‘일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스웨덴 사람에게 ‘일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사람이 일하는데 왜 죽느냐’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른 셈이다.

정부에 간곡히 호소한다. 더는 산재사고를 안타까워만 하지 마시라. 추모할 시간에 대책을 마련해 달라. 예산안을 꾸리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해외의 우수사례를 반영해 달라. 그 과정에서 재정과 효율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감춘 참상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의 인식 속에 노동자란 거목에 매달린 잎사귀 수준이다. 우수수 떨어져 나가도 계절 지나면 금방 다시 나는 것처럼 여긴다. 생명을 돈으로 환산하는 이들에게 안전의 키를 맡기지 말아 달라.

최근 산재사고가 언론에 자꾸 언급되는 모습을 보며, 그나마 세상이 바뀌어 간다는 희망을 느낀다. 하지만 몇몇 언론만 홀로 부르짖어선 큰 개선은 이루어질 수 없다. 모두가 함께 바꿔 나가야 한다. 가정의 달인 5월에 인천에서 또 한 분의 노동자가 철제 구조물에 깔려 돌아가셨다. 두 딸을 둔 50대 가장이라고 한다. 명복을 비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목 끝을 태운다. 이제라도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쓰러져 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 사회가 되길 바란다.

“어떤 행위도 어떤 사물도 노동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 커다란 선박과 이를 관리하는 안전시스템 또한 노동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 그 노동의 어딘가가 고장 나면/배는 가라앉고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희정 <노동자, 쓰러지다 >(오월의 봄·2014) 중에서


천현우 필자

본업은 용접공. 전문대 졸업 전후로 여러 중소기업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소설가를 꿈꾸며 계속 도전하고 있다. ‘쇳밥 먹는 청년 노동자’를 자칭하며, 지방 제조업 현장의 목소리와 수도권 외 청년들의 현실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글쓰기에도 매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