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스위스에서 수십 만 명의 여성들이 성차별 없는 임금과 대우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사진=AP/연합뉴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중 일부분이다. 취임사가 나온 지 4년이 넘은 지금 정작 한국 사회 안에서는 평등, 공정, 정의에 대한 불만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한국에서 이대남, 이대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20대 남녀 간 갈등의 한가운데에도 공평함에 대한 의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한국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젊은 세대도 여성은 차별을, 남성은 역차별을 호소한다. 한국에서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중반부터 남녀 간 차별 이슈가 본격적으로 부각되는데, 스위스에서는 그 전인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부터 남녀 차별이 문제 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남학생 역차별’이 논쟁거리다. 관련한 사건 두 가지를 소개한다.

1981년 로잔, 스위스 여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연방법원 청원

40년 전 스위스 서부 도시 로잔에서 있었던 일이다. 1981년 6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김나지움 입학시험이 치러졌다. 김나지움은 초등학교 6학년 졸업 뒤 장차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다. 스위스 전역 초등학생의 약 20%만 들어갈 수 있어서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경쟁이 훨씬 치열하다(로잔은 프랑스어권 지역이지만 이 글에서는 더 보편적인 독일어 명칭인 김나지움으로 쓰기로 한다).

얼마 뒤 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시험에 떨어진 여학생 12명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김나지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성적이 더 좋은 본인들 대신 성적이 떨어지는 남학생들이 합격했는데, 여학생과 남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서 그런 것이니 성차별이라는 주장이었다.

평가의 기준이 다르다는 건 사실이었다. 당시 로잔이 속한 칸톤(州) 보(Vaud)에서는 김나지움 입학시험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합격 커트라인을 다르게 설정했다. 여학생들의 시험 성적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점수대로 입학을 허가할 경우 여학생 수가 남학생 수를 초과하게 되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여학생들에게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항의를 받은 김나지움은 “입학시험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내놨다. 여학생들과 그 부모들은 칸톤 정부를 찾아가 같은 내용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칸톤 보 정부가 1981년 10월 9일에 여러 통계 자료와 함께 내놓은 입장문 내용은 이렇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심리적, 사회적으로 더 성숙하다는 점이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 (남녀 커트라인을 다르게 정한 건) 지난 몇 년 동안 거칠게나마 김나지움 남녀 성비의 평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평가 기준이다. 시험에서 여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걸 피하고 모두에게 (김나지움 진학이라는)기회의 평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성비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자. 시험 성적이 좋은 여학생들을 떨어뜨리고 대신 남학생 합격자를 늘리기 위해 커트라인을 조정하면서 ‘평등’이라는 단어를 썼다. 여기서 잠깐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칸톤 보에서 김나지움 남녀 합반이 이뤄진 시기, 즉 남녀가 같은 입학시험을 보기 시작한 시기는 1956년이다. 시험 과목은 프랑스어와 수학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교과목은 서로 달랐다.

남학생들이 수학을 배우는 동안 여학생들은 바느질을 했다. 김나지움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수업 내용에 차이가 있으니, 그때만 해도 여학생 합격률이 현저히 낮았다. 점차 커리큘럼이 성별에 관계없이 표준화되면서 이 경향은 역전된다. 똑같은 내용을 배우게 된 여학생들은 남학생 성적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만약 커트라인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지 않았더라면, 1981년 6월에 치러진 위 시험 합격률은 여학생 55% 대 남학생 45%였다. 커트라인을 조정한 결과는 남학생 49.4% 대 여학생 50.5%였다.

칸톤 보의 반응에 분노한 여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스위스 연방법원에 청원을 한다. 그리고 원했던 결과를 얻어낸다. 연방법원은 김나지움의 커트라인 조정이 성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며 칸톤 보에 이 규정을 없앨 것을 명령했다. 스위스 성평등과 관련해 지금까지 회자되는 역사적인 결정이다. 당시 결정문을 보면 이렇다.

“10~11세 남녀의 심리적, 사회적 특성이 시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 없는 주장 때문에 여학생에게 더 가혹한 규정을 적용하면 안 된다. 교육은 모든 성평등 원칙의 출발점이다. 기회의 평등이란 남녀가 공식적으로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학교에서 그 의미는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뜻이다.”

2019년 취리히, 아들 둔 학부모의 고소 “남학생에게 불리한 구조다”

1981년 스위스 연방법원의 명령은 당연한 결론으로 평가받았다. 학교 교육에서의 평등이란 기계적 남녀 성비를 맞추기 위해 커트라인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수학을 배우고 누구는 바느질을 배우는 차별적 커리큘럼을 하나로 표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으로 스위스 학교에서 성 평등 논란이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38년이 지난 2019년, 이번에는 칸톤 취리히에서 교육 과정 내 성차별을 이유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변호사인 마르틴 하블륏첼이 자신의 십 대 아들 루이즈가 다니는 김나지움을 고소했기 때문이다. 루이즈가 남자라 소위 역차별을 받아서 김나지움에서 낙제를 했다는 것이다.

하블륏첼은 스위스 언론(NZZ am Sonntag)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김나지움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현재의 학교 시스템은 일방적으로 남학생에게 불리하고 여학생에게 유리한 구조다. 예를 들어 외국어 비중이 너무 높은 점이 그렇다. 여자가 남자보다 언어에 더 뛰어나지 않나. 또 김나지움에서는 성실하고 정확한 태도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건 15~18세 사이 여학생들이 더 많이 가진 능력이다. 여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학교에서 남학생을 차별하는 건 스위스 헌법과 유럽인권협약에 위배된다.”

이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인데 하블륏첼은 필요하다면 연방법원까지도 간다는 입장이다.

스위스 학교는 정말 여학생에게 유리한 구조일까. 일단 수치만 보면 여학생이 잘하는 건 사실이다. 여학생은 김나지움 입학률이 높을 뿐 아니라 졸업 성적도 더 좋다. 스위스 고등학교 학생들은 마투라(Matura)라는 졸업 시험에 통과를 해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데, 통과 비율을 보면 여학생이 전체의 25%, 남학생이 17.5%다(2019년 기준). 스위스에서 가장 큰 대학인 취리히 대학의 성비는 여성 58 대 남성 42다.

‘남학생 역차별 논란’ 스위스에서도 진행 중

교육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지르는 이 경향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강화돼 왔다. 동시에 학교 교육이 구조적으로 여성에게 유리하게 돼 있다는 반발도 늘었다. 스위스의 청소년 심리학자인 알랭 구겐뷜의 저서 <위기에 처한 작은 마초들>(2011)은 학교가 남학생을 차별한다는 내용이다. 남자아이들은 성향 상 가만히 앉아 있는 걸 힘들어하고 계속 움직이고 모험을 하며 배우는데, 교사들이 그런 태도를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문제 삼고 저평가한다는 것이다. 구겐뷜은 여기에 ‘교실의 여성화’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지난 10년 동안 남학생들은 교육의 루저였다”고 말한다.

남학생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문제 제기 수준을 넘어서 교육 제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변호사 하블륏첼이 아들이 다니는 김나지움을 고소한 직후, 칸톤 취리히의 중등학교 교육 커리큘럼 담당자가 앞으로 김나지움을 더 ‘남학생 친화적’으로 바꾸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수업 시수에서 수학, 과학을 늘리고 새로 컴퓨터 과목을 도입함으로써 남학생 성적에 유리한 구조로 수정하겠다는 것이다. 수학, 과학, 컴퓨터가 중요해서 수업 시수를 늘린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남학생 성적 때문에 커리큘럼을 바꾼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981년 칸톤 보에서 입학 커트라인을 인위로 조정한 것과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남녀 임금 격차. ※OECD 회원국 37개국 중 28개국 대상, 2020년 발표 기준. (출처=OECD)

왜 공부는 여성이 잘하는데 직장 내 성공하는 건 남성이 많은가?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면 처지가 바뀐다. 2019년 현재 스위스 100대 기업 임원진 중 여성은 9%에 불과하다. 스위스 대기업 중에 여성 임원이 4분의 1 이상인 곳은 단 하나 뿐(취리히 보험, 여성 임원 3명)이다. 학교에서 중요한 자질과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자질이 다르다 해도 격차가 너무 크다. 참고로 스위스에서 가장 큰 대학인 취리히대 학생의 약 58%는 여성이다. 하지만 스위스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9% 남짓에 불과하다.

남녀 임금 차이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다. 스위스 연방통계청이 2018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직군에서 일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19%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물론 같은 직군이라도 연령, 경력, 교육 수준 등이 임금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런 점을 다 고려하고도 ‘도저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임금 차이가 나는 경우’가 45% 이상이었다. 스위스에서는 한 달 월급이 4000 스위스프랑(약 500만 원) 이하면 저임금으로 분류하는데, 2018년 저임금 근로자의 61%가 여성이었다. 반면 한 달에 1만 6000 스위스프랑(약 2000만 원) 이상 버는 고임금 근로자의 80%는 남성이었다. 이 차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공부는 여성이 잘하는데 커리어에 성공하는 건 남성인가. 한 가지 그럴 법한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돈 되는 전공에 남학생이 몰린다는 점이다. 전체 대학생 중엔 여성이 많지만 특정 전공으로 한정 지으면 성비가 달라진다. 취리히연방공과대학 학생의 70%는 남성이다. 특히 기계공학 전공자의 90%가 남성이다. 사회의 디지털화로 컴퓨터과학 등 중요성이 계속 커지는 분야에 남성이 주로 진출하고, 이것이 나중에 일자리와 임금의 차이로 이어진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이공계 과목을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게 중요하다. 1956년에 스위스 여학생의 김나지움 진학률이 낮았던 건 남학생이 수학 공부할 때 바느질을 배웠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단순히 분야의 차이라면, 이공계 직군에 진출한 여성이 동료 남성보다 못한 임금을 받는다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양성 강조하기로 세계 제일인 구글 같은 기업에서조차 같은 직군에서 같은 업무를 수행하며 같은 평가를 받은 남녀 직원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임금 차이가 있다. 구글이 회사 차원에서 임금을 공개하지 않으니, 직원들 스스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익명으로 직군, 성별, 평가 내용에 따른 임금을 공유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백래쉬와 젠더 피로 현상 속 본질 놓쳐서는 안돼 

똑같은 일을 해도 돈을 더 적게 받는 게 현실인데, 정작 현장에서 듣는 얘기는 ‘여성이 할당제 때문에 이익을 받는다, 역차별이다’ 같은 소리다. 군 복무도 그렇다. 남성에게만 국방의 의무가 있는 스위스에서 2021년 현재 여군 비율은 0.9%다. 정부는 이 비율을 2030년까지 10%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의무는 나눠지는 게 맞다. 그런데 1%도 안 되는 여군이 지금까지 남성용 속옷을 지급받았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소수의 여군에게 속옷 하나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면서 남녀평등을 내세워 기계적 중립부터 맞추고 보려는 게 사회 발전인가.

페미니즘은 여성 우위 사상이 아니다. 부당한 차별을 없애고 다 같이 잘 살자는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쉬(back lash, 반발)가 나타나고, 성(젠더) 관련 주제만 나오면 “또 그 얘기냐, 무슨 차별이 있다고 계속 불만이냐”는 ‘젠더 피로(gender fatigue)’ 현상이 만연하다.

불경기, 팬데믹 등 모두가 위기를 겪고 힘든 상황이니 여성 문제가 강조되는 게 부당하다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여성 스스로 여성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에 잘못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성 차별 문제를 없는 것 치부하면 안 된다. 문제를 왜곡하거나 호도하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돼서도 안 된다. 특정 대상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저격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피해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입기 때문이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