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 오후(현지시간) 한ㆍ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첫 대면을 성공리에 끝냈다. 문 대통령은 23일 밤 귀국 직후 SNS를 통해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백신 직접지원, 대북특별대표 임명을 ‘깜짝 선물’로 손꼽았다. 국내외 시각은 한국이 앞으로 미중 사이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에 쏠린다. 대체적인 평가는 한미동맹이 굳건해졌다는 것이다.한미 정상은 6월 11일 영국에서 열릴 G7 정상회의에서도 만난다. 여기엔 한국, 호주, 인도가 초청을 받았다. 영국이 제안한 이른바 ‘D10’(민주주의 10개국) 구도가 가시화되는 것이다. 중국의 심기가 여러모로 편치 않을 것 같다. <피렌체의 식탁>은 D10 시대를 맞은 한국 외교 및 한반도 정세 변화를 짚어보기 위해 한승동 기획주간의 글을 싣는다.[편집자]

#대북 특별대표 임명 등 '깜짝 선물'  미국의 아시아전략 변화 신호탄?#한국, 반도체·배터리 첨단기술 강국  미·중이 '핵심 협력 대상'으로 손짓#중·일, 미사일지침 해제에 위기의식  '사드 사태' 같은 보복조치 못할 것#아시아전략 중심이던 日 위상 약화  한국 외교, D10답게 역량 발휘하길

“한국은 미국의 하급 파트너(junior partner)가 아니다.”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이틀 전인 5월 17일 미국 격월간 잡지 <포린 폴리시> 온라인에 실린 네이선 박(Nathan Park)의 기고문 제목이다. 이제부터 한미관계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그는 이 잡지에 일찍이 기고했던 글(2019년 1월 17일)을 통해서도 ‘한국을 미국의 꼭두각시(puppet) 취급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 등 여러 매체에 아시아의 정치·경제에 관한 칼럼을 써온 네이선 박은 ‘새 판을 짜야 할 이유’로 예전과 달리 한국의 힘이 엄청 커진 점을 적시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면 미국의 21세기 한반도 및 아시아 전략은 성공할 수 없을 거라는 얘기였다.※네이선 박은 워싱턴에 거주하는 한국계 변호사다. '코브레 & 김' 로펌 소속으로 활동 중이며 조지타운대학 법센터(Law Center) 겸임교수다.

뜻밖의 성김 대북 특별대표 임명

한미 정상회담 며칠 전에 쓴 칼럼에서 네이선 박은 바이든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물러난 뒤 그 후속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그것을 바이든 정부가 북핵 및 남북관계를 후순위로 돌리는 징표로 간주한 것이다.그는 또 미국이 한반도정책이나 아시아정책에서 미일동맹 내지 일본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항상 한국을 그에 종속적인, 장기로 치면 졸(卒) 정도로만 취급해 왔다고 지적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한미일 공조도, 북핵문제 해결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뒤, 이제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네이선 박이 지적한 이 두 가지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하고 있는지, 아울러 한미관계의 앞날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바이든 정부는 두 가지 사안에 대해, 네이선 박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과거와는 달라진 자세를 보여 주었다.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 뜻밖에도 성김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대행을 지난 1월 이후 공석이었던 대북특별대표로 임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중국은 지난 4월 약 2년간 공석으로 놔둔 한반도사무특별대표로 북한·영국 주재 대사를 지낸 류샤오밍(劉曉明)을 임명했다. 바이든은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깜짝 이벤트에 가까운 성김 임명 발표를 통해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다수 관측자들은 그동안 바이든 정부가 북미관계를 더 껄끄럽게 만들 수 있는 ‘대북 인권대표’를 먼저 임명할 것으로 예상해왔다.

중·일을 자극한 미사일지침 해제

한미 정상회담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안은, 지난 43년간 한국의 미사일 개발에 족쇄를 씌운 ‘한미 미사일지침’을 완전히 해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자주적인 미사일 개발을 막아온 미사일 사거리 제한, 탄두 중량 제한이 없어졌으며 고체연료 사용제한도 사라졌다. 최대 800㎞로 사거리가 제한됐던 한국군 미사일의 타격범위 내에 있던 북한이야 큰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중국, 일본에겐 무척 불편할 것이다. 중일 두 나라는 군사·안보 측면에서 일종의 경계심을 느끼지 않을까.아베 신조 전 총리의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 방위대신(국방장관)이 지난 5일 방위비에 대해 기존 예산의 1% 상한 관례를 깨고 그보다 더 많이 늘리겠다고 밝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사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군사·안보문제는 한미 정상회담 전에 일본과 한국을 잇따라 방문한 미국 외교안보라인에 의해 사전에 논의됐을 가능성이 크다. 앤터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에이브릴 헤인즈 국가정보국장 등은 최근 한일 양국의 관리들을 만나 각종 현안을 조율한 바 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미국의 자세 변화를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시 방위대신의 국방비 증액 발언과 관련해, 동아시아 정세가 예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한일관계와 한미일 관계도 기존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로 읽는다면, 필자가 너무 나간 것일까.한국이 6월 11일부터 사흘간 영국에서 열릴 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은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부터 한국, 인도, 호주는 G7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부터 주창해온 ‘민주주의 정상회의’ 구상을 ‘D10’ 정상회의에서부터 가시화할 공산이 크다. 한국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경제규모 10위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받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이 바뀌나한미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 때 바이든은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묻는 기자 질문에 “최근에 이뤄진 방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김정은 위원장이 북핵 문제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무언가를 약속한다면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 긴장을 완화하는 데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만나지 못하겠다고 한 바 있다. (…) 내 외교 안보팀이 북한 외교 안보팀을 만나서 (북핵 문제에 대한) 정확한 조건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김 위원장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이 발언을 놓고 북이 먼저 ‘의지를 보이고 무언가를 약속’할 가능성이 없는 이상, 북핵문제 해결에 진전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해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너무 관성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이다. 바이든 정부는 최근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면서 트럼프의 톱다운 방식의 ‘일괄타결’도, 오마바의 ‘전략적 인내’도 아니라는 입장을 밝혀왔다.요컨대 바이든의 현실적·실질적 단계적 접근 방침을 토대로 생각한다면, 북이 비핵화로 가는 현실적 조건들을 순차적으로 제시하면서 미국에도 그에 상응한 조치를 요구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미국 정부가 2018년 4월의 판문점 선언과 6월의 싱가포르 북미회담 등 트럼프 정부 때 일궈 놓은 북미대화의 진척 상황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 북미협상을 진행하는 쪽으로 가자는 한국정부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회담 당시 합의의 요체는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 북미간의 새로운 관계 수립, 북핵문제의 현실적·단계적 해결이다. 북도 이미 합의했던 이런 원칙과 실천 의지가 재확인된다면 경제재건과 체제안전보장에 목마른 북이 협상을 마다할 리가 없을 것이다.

네이선 박은 “역대 미국 정권은 대북정책과 관련한 한국의 역할을 오직 한국정부의 생각 또는 제안이 얼마나 미국의 계획에 합치하느냐는 잣대로만 판단해 왔다”며 “대북정책마저도 최대 당사자라 할 한국 정부를 오히려 뒤로 돌리고 일본과의 협의를 우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의 이해를 일본의 이해에 종속시키도록 압박해 왔다”고 비판했다.한국에겐 지극히 불리한 이런 ‘전통’은 2차 세계대전 뒤 동아시아·태평양 전후질서를 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변하지 않았다. 그 조약에서 미국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일본에게 사실상 전승국 대우를 해주면서 전후 경제부흥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일본과 싸운 피해자들인 한국과 중국에겐 교전국 지위조차 인정하지 않고 그 조약에 초청도 하지 않았다.당시 냉전체제로 돌입하던 미국은 동아시아전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일본의 재건을 서둘렀고 자신들도 책임이 있는 ‘분단 한국’을 ‘한일협정’에 종속시킴으로써 한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하급 파트너’ 지위를 특징으로 하는 불균등한 한일관계를 구축했다.한반도 분단체제를 토대로 한 이런 구조를 미국은 지난 70여 년간 고수해 왔으며, 일본은 언제나 이 구조의 승자였고 ‘분단 남북한’은 늘 패자였다.바이든 정부가 이번 성김 대표 임명과 미사일 규제 해제를 일본과 사전에 협의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상회담 결과를 보건대, 바이든 정부가 이런 패턴에서 벗어날 조짐이라 말하면 필자가 너무 희망적인 독해(讀解)를 하는 것일까.

미국을 바꾼 한국 첨단산업의 힘

미국의 이런 자세 변화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중 최대 요인은 한국이 이제 부하(junior)나 꼭두각시(puppet)로 마구 부릴 수 없을 정도의 국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네이선 박은 ‘한국은 부유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로서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중국과는 얕고 좁은 내해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이 지닌 여러 지정학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더 중요한 것은 글로벌 차원에서, 그리고 미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안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한국의 힘과 영향력 증대이며 그 핵심에는 반도체, 배터리 분야의 첨단기술 경쟁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그는 봤다.

예컨대 바이든 정부가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인프라 건설에 2조30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는데, 그 핵심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다. 그런데 미국 자체의 산업·기업만으로는 그런 첨단기술 분야의 인프라를 건설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미국은 핵심 원천기술이나 설계, 장비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지만 전기자동차나 스마트폰, 첨단산업의 부품 제조 기술은 지난 세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나라 바깥으로 대부분 이전됐다. 그 결과 반도체 제조분야는 한국과 대만에 과도하게 집중됐다. 반도체가 21세기의 ‘원유’로 불리면서 한국과 대만은 ‘뉴 오펙’(New OPEC, 새로운 석유수출국기구)이 됐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반도체 부족사태가 확산되자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 물량 확보와 함께 자국 내에 일관된 완성형 공급망을 만들려 허둥대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원천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제조공정에서 손을 놓아버려 기술자와 전문 인력, 부품·장비, 조립라인이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을 다시 갖추려면 천문학적인 비용과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을 애써 되살려봤자 경쟁력이 떨어져 허사가 될 공산이 크다. 나노 급(級)의 초미세 첨단기술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경쟁력이 취약한 기업들부터 차례차례 도산하고 결국 몇 개만 살아남기 때문이다.미국이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을 미국 내로 끌어들여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미국에겐 장차 중국과의 경쟁도 중요하지만 유럽쪽 기업들의 경쟁력을 의식해야 한다. 거기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선 한국과 대만이 필요하다.

2024년 美 대선, 국내정치에 LG·SK 변수

한국 기업들의 영향력은 반도체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각기 상대를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관련으로 제소해 ITC가 지난 2월 SK측에 ‘10년간 미국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조지아 주(州)에서 난리가 났다. SK측 공장이 있는 조지아 주지사와 두 명의 상원의원 등 고위 공직자들이 백악관으로 달려가 로비를 벌였고, ITC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서 SK가 LG측에 2조원(18억 달러)을 지불하는 것으로 일단 사태를 마무리했다.

포드자동차와 폴크스바겐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는 SK이노베이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조지아의 지역경제와 고용 문제가 불거질 것이고, 각종 선거에서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인 지역에선 그것이 정치쟁점으로 비화된다. 지난 11월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막판에 압승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경합주인 조지아에서 신승한 덕도 적지 않다. 2024년 차기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을 노릴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네이선 박이 보기에, 민주당이 정권을 연장하려면 조지아 주 선거인단 확보는 필수적이다. 조지아 주에는 텔루라이드를 생산하는 현대기아차 공장도 있다. 미시간에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은 GM, 현대기아차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는데, 바이든 정부로서는 둘 다 살려야 할 상황인 것이다. LG는 오하이오, 테네시에서도 GM과 합작해 배터리공장을 세울 계획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처럼 반도체 부품뿐만 아니라 전기차 배터리, 그리고 이른바 ‘4차산업혁명’의 핵이자 기술패권전쟁의 승패를 가를 5G, 6G, 수소연료 및 수소자동차 등 첨단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리고 절대로 중국 쪽으로 넘어가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삼성, LG, SK, 현대기아차 입장에선 미국을 기반으로 글로벌 사업을 확대하고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커다란 투자기회가 아닐 수 없다.이를 두고 코로나19 백신을 얻기 위해서라거나, 대북정책에서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미국에 갖다 바치는 정치비용'이라고 보수 야당이 폄훼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악의적인 정치공세에 가깝다. 닛케이 등 일본 매체들은 이미 뒤처진 일본의 동종 소재·부품 업체들이 미국 내 공급망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한국 기업들의 약진을 부러움 반, 걱정 반으로 쳐다보고 있다.

미국에 줄서는 유럽과 일본

바이든 정부는 중국 견제 내지 첨단기술 이전 억제라는 전임 트럼프 정부의 기본방침을 계승하되 ‘아메리카 퍼스트’가 아니라 망가진 관계를 재건해 동맹국들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대응방식을 바꿨다. 그러자 엉거주춤하게 양다리 걸치기를 하던 유럽이 미국과의 협력 쪽으로 방향을 확실히 틀고 있다.유럽연합(EU)은 지난해 말 중국과의 포괄적 투자협정 비준을 타결했지만 최근 이를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신장위구르 인권탄압문제로 중국과 서로 제재를 주고받은 불협화음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거대한 중국시장은 탐나지만 국유기업에 대한 정부보조금과 외국 기업의 기술 탈취, 지재권(IP) 침해 등에다 때로는 일방적인 ‘보복’조치까지 휘두르는데 대해 중국에 대한 반감을 표출해왔기 때문이다.유럽은 미국이 ‘중국 견제’의 방향타를 확실히 잡자 그 흐름에 가세하는 분위기다. 덩치 큰 껄끄러운 나라에 함께 맞설 리더가 없으면 상대적 약자들은 눈치를 살피며 각자도생을 꾀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정부 때 미국 동맹국들이 딱 그랬다. 그러나 여전히 최강인 미국이 중국 견제에 앞장서면 사정이 달라진다. 일본이 최근 확실하게 미국 쪽으로 기울었다. 중국의 강압적 태도에 대해 불편과 불안을 느끼고 있는 유럽 각국도 꼭 같은 처지는 아니지만 반중 감정을 공유해온 게 사실이다.

중국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가 2019년 12월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의 ‘사드 式 보복’은 불가능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자유항행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기원 찾기에 대한 지원 의향이 명시된 것 등을 놓고 문재인 정부가 좀 더 미국 쪽으로 기운 증표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실 국민감정으로 봐도 한국은 원래 친미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 대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장비의 원천도 대부분 미국에 속해있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심각한 ‘리스크’를 각오해야 한다. 삼성과 SK, LG, 현대기아차 등의 대미 투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돼 온 것이다.한미 정상회담 뒤의 중국정부 반응을 보면, 공동성명이나 기자회견장의 발언들에 대해 별로 문제 삼을 기색이 없다. 오히려 미일 정상회담 때의 일본과는 달리 자국의 레드라인을 넘어서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네이선 박도 예측했듯이, 중국은 향후 수십 년간 이어질 미중 경쟁구도에서 한국을 어떻게든 껴안고 가야 할 처지다. 한국을 반중 진영으로 돌아서게 하거나 완전히 미국 편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중국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한미 미사일지침 해제를 두고도 색다른 해석이 나온다. 미국이 중국 대륙을 겨냥하는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는 대신, 한국에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제 미사일 배치 이상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는 거다.

중국으로선 요즘 유럽, 캐나다, 호주, 일본까지 미국 쪽으로 기울고 인도와도 적대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대해 2016년 사드 배치 당시 가했던 보복조치 같은 강수를 동원할 경우 한국의 반중 감정을 증폭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이 역시 한국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통할 만큼 국력이 커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해 한국으로선 미국과 좀 더 가깝지만 중국과도 멀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친중-반미, 친미-반중 같은 양자택일 식의 여론몰이나 담론은 국제정치 현실에 맞지도 않고,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한국의 국익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중 어느 한쪽에 분명한 충성서약을 하라는 양자택일식 선택을 강요하지 말도록 미국에 주문했고, 미국정부도 그런 요구를 대체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 또한 미국이 한국의 국력을 의식한 덕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 백신과 관련한 한미 간 합작생산에 관한 합의도 상당부분 내실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55만 명 분의 한국군에 대한 백신 기부는, 백신을 나누자는 전 세계의 압박을 받고 있는 미국이 이미 필요량의 백신을 확보해 놓은 한국에 당장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 표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D10’ 외교를 향해 나아갈 때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웃나라 일본을 살펴보면 현재 사정도 그렇고, 향후 전망도 밝지 않아 보인다. 반도체나 배터리와 관련된 첨단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대량 제조 능력은 이미 상실했고, 미국이나 유럽처럼 그것을 단기간에 복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은 냉전 시기나 그 직후 대체 불가능했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교두보 지위를 급속히 상실해가고 있다. 동서 냉전이 끝났을 때 이미 그것은 예고된 미래였으나, ‘옛 영광’의 부활에 집착했던 아베 신조 같은 보수 정치인들은 탈냉전으로의 체질 개선을 완강히 거부해왔다.그로 인한 ‘일본 퇴보’의 앙상한 실상은 전대미문의 코로나19에 대한 부실한 대처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최근 ‘징용공’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제의 전쟁범죄 청산문제와 얽혀 증폭되고 있는 한일 갈등의 주요 원인도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본의 보수 우파들은 도쿄올림픽을 통해 ‘후쿠시마 재난’의 기억을 떨쳐내고 ‘잃어버린 30년’의 극복, 경제재건의 기세를 몰아 최종적 정치목표인 '평화헌법 개헌'까지 달성하겠다는 야무진 설계도를 그려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큰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다시 네이선 박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의 희망대로 바이든 정부가 ‘동아시아의 독보적인 교두보’라는 전통적인 대일(對日) 전략이 더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대안을 찾기 시작한 조짐이 이번 한미,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났다고 하면 필자의 생각이 너무 나간 걸까. 물론 그 대안이 한국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하지만 이제 미국이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본위로 짰던 동아시아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것은 한국의 장래에 분명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의 G7 정상회의 초청과 D10 결성 참여도 그런 맥락 위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D10의 역할과 책임을 떠맡을 역량을 갖추고 있다.


한승동 필자

1986년 잡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98년부터 3년간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이후 국제부장, 문화부 선임기자, 논설위원 등을 거쳤다. 동아시아와 민족(통일) 문제는 물론, 환경·생태·과학 분야 등 다른 세상사에도 두루 관심이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적 안목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