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사진=김용훈)

2021년을 규정하는 한국 사회의 시대 담론은 과연 무엇일까? 혹자는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불안과 불만과 분노를 손꼽는다, 불공정, 불평등 문제도 2030세대 사이에서 핫 이슈가 된지 오래됐다. 그래서인지 지난 70여 년간 추진해온 산업화,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복지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광재의 미래대담’⑩에선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과), 안병진 경희대 교수(미래문명원)와 함께 시대정신을 화두로 삼아 혁신, 성장, 복지, 정치의 위기, 대통령 리더십 등을 논의했다. 세 사람은 차기 대통령에겐 경제·안보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이 필요하다고 공감했다. 김 교수는 “대통령이라면 자기 마음속에 ‘5년 동안 적어도 대한민국을 이런 방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핵심 의제(agenda)를 두세 개쯤 갖고 있어야 된다”고 말했다. 안 교수 역시 “차기 대통령은 존 F. 케네디처럼 다양한 옵션을 놓고 각계 전문가나 청와대 수석들과 끝장토론을 할 만한 실력과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재 의원(더불어민주당, 3선)은 최근 목격하는 정치의 위기와 관련해 “권력과 정치가 결별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 대통령은 외교문제, 남북문제에 집중하고 ’대통령 과제‘로 한두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대담은 지난 4일 오전 두 시간 남짓 진행됐다. [편집자]

▲이광재 의원(이하 이 의원)= 오늘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명학자, 사회학자인 두 분과 함께 ‘2021년도 시대정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김호기 교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20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은 산업화, 민주화로 대표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다음의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시대의 화두를 과연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요?

▲김호기 교수(이하 김 교수)=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의 경연장은 역대 대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선 대통령의 역할과 권한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대통령선거를 전후로 시대정신에 관한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21세기 들어 예컨대 2007년 대선에선 ‘선진화’가 제시됐죠. 당시 이명박 후보가 선진일류국가를 내세웠습니다. 2012년 대선 땐 두 개의 시대정신이 크게 주목 받았어요.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경쟁했는데, 하나가 경제민주화였고 다른 하나가 복지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는 사실 민주화의 하위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그런 측면에서 복지국가라는 시대정신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제시된 건 바로 2012년 대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7년 대선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한 ‘비상 대선’이었잖아요. 박근혜 체제라고 하는 구시대적 정치의 극복이 1차적 과제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시대정신이 크게 부각되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민주화 이후에 제시된 대표적인 시대정신을 꼽으라면 저는 선진화, 복지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화가 보수적 담론이라고 한다면, 복지국가는 진보적 담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성장 담론 없는 진보, 복지 비판하는 보수   국민 불안 해소할 '정치적 상상력' 찾아야

▲안병진 교수(이하 안 교수)= 외람되지만 제 생각에 현 시대의 복잡성을 포착하는 담론이 아직 안 나온 거 같아요. 저는 영화나 TV드라마로 비유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우리 의식세계의 혼란을 굉장히 잘 보여주는 드라마들이 얼마 전에 끝난 ‘괴물’, ‘빈센조’, ‘모범택시’, ‘대박부동산’이라 생각합니다. 뭔가 분노를 표출하고는 싶은데, 도대체 기득권의 실체가 뭔지 알 수 없는 모호성이 가득한 상황극들이에요. 조금 더 정치심리학적으로 보면, 기득권의 실체를 어떻게 좀 흔들고 싶고, 유동하게 만들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죠. 이런 시대정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하는 그 막연한 불안감, 이거일 것 같아요.

▲이 의원= 지금은 남녀노소 모두가 불안한 거 같아요.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시대가 성큼 다가왔는데 수명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2030 세대는 일자리가 부족한데 부동산값은 턱없이 올라서 불안하죠. 저출생·고령화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 동력을 잃게 될까 봐 불안하고요. 결국 이런 불안감들을 극복하려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기회가 많아지고 안전판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기회라는 영역에서 보면 여야 정당이 현금을 주는 방식의 복지를 이야기하는데 막상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성장 담론이 보이지 않거든요. 진보 측에서는 성장 담론을 ‘기업이 하는 거라 필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교수= 성장 담론에 관한 진보 측 시각에는 시장의 영역, 기업의 영역이란 평가들이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정부와 시장은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시장이 활력을 가질 수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정부와 시장을 완전히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진보라고 하면 성장보다는 분배 혹은 복지를 강조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시간이란 변수를 고려하면 분배나 복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성장이 꾸준히 진행돼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성장과 분배를 일종의 선순환 구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또 하나의 선순환 전략이 필요합니다. 대외 개방, 대내 복지의 선순환이 필요한 것이죠. 저는 이중(二重)의 선순환이라고 더러 이야기합니다. 우리 인구가 5180만 정도 되는데, 어찌 보면 내수 시장이 작은 편입니다. 따라서 한국경제가 일정 부분 세계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통상(通商) 선진화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대내 복지를 확충하는 게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입니다.

▲안 교수= 모든 건 마음의 공간, 사고의 공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조금 더 성찰해보면 한국의 진보 진영이 많은 성취를 이뤄냈지만 우리가 추구했던 민주화에는 ‘혁신’이라는 진정한 진보주의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지 않았어요. 이 의원님께서는 공화(共和)에도 관심이 많잖아요. 공화주의의 핵심은 공동체가 부패하지 않고 부단히 역동적인 활력을 구성해나가는 것이거든요. 활력은 곧 혁신이고요. 그런 혁신적인 DNA가 우리 사회구조 속에 얼마나 박혀 있는가? 저는 부정적입니다. 서구의 리버럴(liberal)은요, 보수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혁신이 몸에 배어있어요. 만약 진보 진영에서 새로운 방식의 대선 캠페인을 한다고 상상해보죠. 그것을 본 삼성 임직원들이 ‘아,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진보의 방식이 아니에요. 진보는 항상 영감을 주고 사고를 전환시키고 미래의 틈새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김 교수= 간단히 덧붙이자면, 우리가 보수 대 진보를 나누는 기준으로, 일종의 대립 쌍들이 여러 가지 있잖아요. 자유 대 평등, 성장 대 복지, 아니면 국가 대 시장, 개인 대 공동체, 안정 대 변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전에 안 교수님께서 말씀했지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의원= 그러려면 20세기적 패러다임(paradigm)을 넘어서야죠. 20여 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일찌감치 ‘벤처 경제’를 주창하고, ‘생산적 복지’라는 파격적 개념을 내놓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형 통상국가’라는 기치 아래 한미 FTA를 추진하고 오늘날의 기본소득 같은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왜 이런 혁신적인 발상을 발견하기 어려울까요? 기본적으로 민주화를 얘기하다 보니 뭔가 저항하는 생각과 인식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가상자산, 주52시간 노동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이른바 ‘혁신 경제’에 속한 분들과 기존 생산라인에 계신 분들 사이에 차이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文 정부의 진보 정체성, 세계 시간과 격차   386세대, 신세대의 에너지 못 빨아들여

▲김 교수= 지난 10여 년은 끝없는 혁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미국의 정보경제학자들이죠. 앤드류 맥아피와 에릭 브린욜프슨이 쓴 책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에 그런 내용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머신은 인공지능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 바로 플랫폼 기업입니다. ‘크라우드’라는 것은 바로 군중, 즉 집단지성입니다. 이 세 개가 지금 끝없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저는 보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젊은 세대에게 무척 익숙하지만 우리 기성세대에겐 낯선 것들이죠.이런 끝없는 변화들로 인해 제가 공부하고 있는 사회학의 영역에서는 ‘초연결’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소위 포스트-트루스(탈진실) 현상 때문에 사실보다는 신념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이와 연관돼 부족주의, 집단주의, 포퓰리즘이 강력하게 부상한 거잖아요. 이런 변화들이 다 금융위기 이후에 발생한 겁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만 하더라도 진보 세력이 나름대로 유연하게 이런 지구적 변화들을 추적하면서 한국적 대안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에 비해 지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지구적 변화들을 우리가 제대로 못 쫓아가고 있지 않나, 이거는 뭐 보수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만,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안 교수= 요즘 서양 경영학의 특징이 동양의 불교나 오래된 정신적 전통들을 최신 트렌드로 녹여내려는 것입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학자 중에 MIT의 오토 샤머라는 경영학자가 있는데요. 《본질에서 답을 찾아라》라는 책에서 오토 샤머는 ‘결국은 마음의 공간에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보수든 진보든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의지, 열린 가슴을 가지지 않으면, 현상유지세력일 뿐이라는 거죠. 이 사람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불안하게나마 미래로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것이 ‘전환’이라고 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보수-진보는 열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니까 메타버스라든지 가상자산 같은 것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없는 거죠. 그것들을 이해 못한다면 일단 알려는 노력부터 해야 되는데, 그것을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 세상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 교수= 그건 일종의 작은 반작용 같아요. 진보 세력이 이것들에 대해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대안들을 개발하지 못한 내적 원인도 있겠죠. 그런데 워낙에 이념적 경쟁이라는 게 작용과 반작용이잖아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만 하더라도 세계 시간과 한국 시간의 격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두 개의 보수 정부가 들어섰는데, 하나는 뉴라이트 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적인 박정희 체제를 그리워하는 정부였죠. 그 속에서 진보도 한국의 보수에 대응해 어떻게 보면 1987년 이전에 민주화 세력이 가졌던 본래의 자세로 되돌아가지 않았나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정체성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달리 세계 시간과 한국 시간과의 격차가 상당히 존재했던 것 같아요.

▲이 의원= 요즘 50대 이상 세대의 행태에 대해 20세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로 김대중 대통령은 DJP(DJ+JP) 연합을 했잖아요. 그리고 강봉균 장관처럼 YS(김영삼) 정부에 있던 사람을 쓰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이종교배를 했던 거죠. 노무현 대통령도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해 386세대가 그때 발현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흑백TV 시대로 돌아간 거죠. 그리고 386세대들은 정치 중심부에 올라왔는데, 과거 3김(金)처럼 새로운 세대의 에너지를 빨아들이지 않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 정체 현상을 겪으며,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요즘 2030 세대의 평가 같습니다. 당신네들도 잘 모르면서 왜 우리한테 모른다고 하느냐는 부분도 또 하나의 세대적 단층현상이라 생각됩니다.

#정치의 위기와 사회 불안의 해소

-정치권에서 책임 윤리는 실종되고옳고 그름 따지는 신념 윤리만 무성▲안 교수= DJP 연합과 관련해 삐딱한 이야긴지 모르겠는데 과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정치인에게 (DJ처럼) 세상을 진심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어요. 저는 없다고 봐요. DJ 그분인들 DJP 연합을 정말 좋아서 했을까요? 한국을 바꾸고 싶어서 그랬던 거죠.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국회에서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민의힘' 의원들 방을 일일이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건 진심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아닐까요.그런 점에서 20대에 대한 태도, 혁신에 대한 태도, 또 다른 다양한 측면에서 세상을 진심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진정성을 갖고 서로 같이 할 부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그에 대해서는 일단 처절한 반성부터 해야 하고요. 수십 년간 혁신이란 게 어디에서 나왔느냐? 반골(反骨)에서 나오고 주변부에서 나왔지 주류, 메인스트림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김 교수= 제가 한 마디를 더하자면 우리 시대의 ‘정치의 위기’가 심화됐다고 봅니다. 정치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한 사회의 최종 의사결정일 겁니다. 아까 안 교수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막스 베버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했던 겁니다. 신념 윤리란 말 그대로 옳고 그름의 윤리입니다. 책임 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입니다.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2003년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가 요청한 이라크전쟁 파병 건이었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정체성을 보면 당연히 파병 요청을 거부해야 했죠.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정치가입니다. 우리 같은 연구자들이야 그냥 신념 윤리만 중시하면 되지만, 정치가는 결과와 함께 책임 윤리까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회에 가서 파병 요청 연설을 했죠. 우리나라 정치인이 책임 윤리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뜻에 반해서 공동체 전체의 가치와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을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최근 한국정치를 보면 이런 책임 윤리들이 거의 실종된 거 같아요. 그냥 신념 윤리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옳고 그름, 진보적인 관점에서 옳고 그름, 이렇게만 따지다 보니 아까 이 의원님이 말했던 DJP 연합과 같은 담대한 정치가 부재한 것이에요. 이거야말로 정치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고, 장차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기로 직결될 수 있습니다.

▲이 의원= 김호기 교수님은 정치의 위기를, 안병진 교수님은 세상 변화에 대한 진정성을 지적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한국 정치가 요즘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담을 쌓고 있기는 하죠. 저는 정치의 위기와 관련해 ‘권력과 정치가 결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권력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고, 정치는 뭔가를 결정하는 능력인데, 정치를 통해서 뭔가 바꾸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서로들 자기 권력만 탐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국민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그런 상황이 다시 정치의 위기를 심화시키지 않나 싶어요. 아까 김 교수님이 지적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정말 적절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그러면 정치권이 국민들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보게 됩니다. 여야 정당에서 요즘 내놓는 해법이란 게 재정을 풀어 돈을 준다는 거죠.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실사구시 정치를 추구해야 할 텐데 아직 그런 큰 그림을 못 그리는 거 같아요.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우리 정치권도 뭔가 나라의 미래를 바꿀 담대한 구상들을 경쟁적으로 내놓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본소득과 다른 복지는 대립 개념 아냐  보편·선별 결합된 한국형 모델 설계해야

▲김 교수= 국민들의 불안을 부추기는 원인이 뭔지 제대로 짚어봐야 합니다. 그 불안들은 세대 별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0대의 불안은 대학입시, 20대의 불안은 취업이죠. 30대의 불안은 구조조정 위험 같은 것이고요. 40대의 불안은 미국 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이 만든 말인데, ‘퇴출의 공포’입니다. 쓸모없음에 대한 두려움이죠. 그리고 50대 이후에는 노후 불안일 겁니다.저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일자리 문제고요. 또 다른 하나는 불평등 문제라고 봅니다. 일자리는 시장이 주도하고 국가가 결합하는 방식이 바람직합니다. 즉 민간 일자리와 공적 일자리가 상호 결합돼 안정적인 노동시장을 만들어야 된다고 봅니다. 국가 차원에서 경제 성장이 필요한 부분이죠.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복지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요즘 제기되는 기본소득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본소득은 복지가 아니라 경제정책이기도 하고, 국민 불안을 해소하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해법이 아니겠지만요.

▲안 교수= 기본소득이란 아이디어는 나름의 족보도 있고, 상당히 의미 있는 해법입니다. 그것을 도입하는 방안 중에도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 △단계적 기본소득, △생태환경이나 일자리를 통한 참여적 기본소득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게 있다면, 이런 아이디어들을 낳는 공통의 지반은 어디에 있고, 서로 합의가 가능한 부분은 무엇인지, 그런 차원으로 논쟁이 발전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의원= 굉장히 좋은 포인트인 거 같습니다. 요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이낙연 전 대표는 신복지 체제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은 또 청년에게 기본자산을 만들어줘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거죠. 서로 논쟁하면서 가장 최적화된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좀 더 토론할 필요도 있고 현장에서 실험을 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기본소득을 찬성하면 선이고 반대하면 뭐고 이럴 일은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한국형 복지에 가장 최적화된 제도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김 교수= 맞습니다. 논쟁의 기본 구도가 무척 중요한데요. 사실 복지국가의 문제의식이 본격화된 계기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무상급식 논쟁이었습니다. 그때 복지 담론의 기본 구도가 뭐였냐면 보편복지 대 선별복지였어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 잘못된 구도입니다. 복지국가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본 권리가 교육과 의료입니다. 그건 당연히 보편복지를 해야 돼요. 그리고 국민들 중에서 특정한 돌봄이 필요한 분들, 예를 들어 나이 많은 어르신, 저소득층 자녀 같은 취약계층에겐 선별복지를 해야 돼요.좋은 복지국가가 되려면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잘 결합돼야 합니다. 저는 기본소득과 다른 복지정책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한쪽에 기본소득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전 국민 고용보험이 따로 맞서는 것처럼 싸우게 되면 바람직한 논쟁 구도가 아닙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약 10개월 정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건데, 이 과정에서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에 어느 정도 합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역할과 청와대 조직 개편

-외교·경제 역량은 차기 대통령의 자질  국민의 기억에 남을 '핵심 의제'는 필수

▲이 의원= 김호기 교수님께서 제안한 것처럼, 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를 놓고 충돌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또 하나 짚어볼 부분은 개헌 문제와 권력구조 개편입니다. 경제와 외교, 특히 외교 분야가 미중 패권경쟁 시대를 맞아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일찍이 한국의 대통령은 외교문제, 남북문제 이런 거에 집중하고 ‘대통령의 과제’로 한두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내치 분야는 총리한테 대부분 맡겨야 이 나라가 제대로 될 거라는 말씀을 하셨어요.우리나라가 장차 외교와 경제에 강한 리더십을 구축해야 하는데, 미국에서 하자는 대로 끌려가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한미동맹의 궤도를 이탈해서도 안 될 겁니다. 국가 장래를 위해 외교 분야의 리더십은 어떻게 구축해야 될까요? 차기 대선 과정에서 이런 논의들을 어떻게 숙려해 나갈 수 있을까요?

▲김 교수= 외교 분야가 정말 중요해졌죠. 대미·대중 관계도, 세계화에 대한 새로운 대응도 중요하고, 기후 위기에 적극 대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대통령의 역량’ 측면에서 경제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함께 외교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차기 대선이 10개월밖에 안 남았잖아요. 여야의 유력 후보감으로 이재명 지사나 윤석열 전 총장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이 분들이 외교 분야에서 충분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한반도가 놓인 지리적 위치가 정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볼 때 국익과 평화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교수=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에 200% 동의합니다. 오히려 그 당시보다 우리가 외교적으로 더 절박한 시대를 맞이했죠. 하지만 저는 요즘 ‘우리나라가 지금 위대한 기회를 맞이했다’고 얘기합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 민주화를 통해 성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이제부턴 국내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인 불평등을 해결하고, 국제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단계에 와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앞장서야 할 중요한 과제이거든요. 그러려면 과거 존 F. 케네디처럼 다양한 외교적 옵션을 놓고 각계 전문가들, 청와대 수석들과 끝장토론을 할 만한 식견과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김 교수= ‘대통령의 과제’라는 측면에서 역대 정부들을 돌이켜보면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압축됩니다. 노무현 정부는 국가균형발전, 동북아 평화체제일 텐데 당시 ‘동북아 균형자론’이 나왔을 때 얼마나 논쟁이 치열했습니까? 그런데 그 이후 정부를 제가 과소평가하고 있는지 몰라도 이명박 정부 하면 4대강 사업 외에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아예 없어요.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임기 1년을 남겨두었지만 아쉽게도 검찰개혁 외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는 대통령이라면 최소 자기 마음속에 ‘5년 동안 적어도 대한민국을 이런 방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핵심 의제를 두세 개쯤 갖고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 의원= 이건 어떨까요? 지금 청와대가 돌아가는 걸 보면 대한민국에 두 개의 정부가 있어요. 하나는 ‘청와대 내각’, 그러니까 청와대 참모진으로 경제수석, 사회문화수석, 무슨 수석들이 포진해있죠. 또 하나는 ‘총리 내각’인데 각 부처 장관들이 일하고 있죠. 이렇게 두 개 내각을 유지하면 결국은 청와대로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이와 관련해 인사검증 시스템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청와대 시스템만으로는 인사검증 대상자들을 일일이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없거든요. 차라리 인사검증 권한을 총리실에 보내든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에 보내든지, 아니면 제3의 기관에 맡겨 대통령의 인사권이 상처를 받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이 주요 핵심 과제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자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보니까 250주 동안 국토균형발전 회의에 무려 72번 참석하셨거든요. 그 결과 세종시도 생기고 지방혁신도시도 생겼습니다. 앞으로 청와대 내각, 총리실 내각의 역할을 어떻게 나눠야 할까요?

▲김 교수= 그 원인은 제도적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지만 사실은 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됐잖아요. 이러다 보니까 두 개의 의사결정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죠. 헌법 정신이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청와대 조직을 아까 말씀드렸던 ‘대통령 의제(agenda)’를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축은 지금도 존재하죠. 그게 국가안전보장회의(NSC)입니다. 여기에 경제사회 의제를 총괄할 ESC(Economic Social Council)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겁니다. NSC는 외교안보 의제를 추진하되, 경제사회 의제는 ESC가 중심이 돼 추진하는 거죠. 그것을 뺀 주요 국정과제나 일상적인 국정 업무는 내각 중심으로 이루어지면 되죠. 내년 대선 이후 차기 정부가 인수위를 구성해 정부조직 개편을 논의할 때 한번 진지하게 검토해볼 만한 사안입니다.

▲안 교수= 우리나라가 압축 성장을 해온 게 원인인지 몰라도 정부조직이나 인수위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미국에선 인수위 관련 연구가 엄청나게 쌓여 있고, 백악관 참모진과 장관의 역할을 둘러싸고 많은 토론이 있습니다. 우리도 인수위 활동기간 중 역대 정부에 대한 치밀한 연구·분석·자문을 통해 수석과 장관의 역할분담을 개선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이 의원= 내각제가 됐든 4년 중임제 개헌이 됐든, 분권형 대통령제가 됐든 내년 3월 대선 이후 개헌이 필요하다는 말씀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활동에 매달리다 보니까 국가 미래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다는 지적도 적잖습니다. 그래서 상원 구조에 준하는 틀이 필요한 거 아니냐는 의견도 나옵니다. 차기 대선 과정에서 국회개혁 어젠다를 논의하고 2024년 총선에서 국민투표를 하는 방안도 거론됩니다.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 국민들은 ‘방역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최근 2~3년 새 방탄소년단(BTS)의 활약에다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님의 아카데미상 수상, 웹툰·게임 시장을 휩쓰는 한류 현상 등을 보면 대한민국에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인류문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는 이도 있어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이 가져야 할 위대한 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청와대·내각의 두 개 정부는 非효율적   인사검증시스템 재정비도 이뤄져야 

▲김 교수= 저는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코로나19 팬데믹이 공동체의 재발견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거죠. 한마디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저는 K-방역이 의학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하는데 그 토대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공동체주의가 아닐까요. 또한 서구 국가들이 우리가 무작정 쫓아가야 할 표준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됐습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민주주의, 공화주의에 있어서는 우리가 세계적인 선도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고요. 차기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불안과 분노를 많이 해소하고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자존심이 더욱더 드높아지기를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안 교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세계적 선도국가, 저는 완전히 공감합니다. 우리가 어쩌면 미국 모델, 유럽 모델을 넘어서 자유민주주의의 보다 성숙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하고, 기성세대는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고 2030세대를 적극 뒷받침해야 합니다.

▲이 의원= 지금까지 대화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불안과 분노를 느끼는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은 일자리와 복지다. 두 번째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데 세상을 바꾸려는 절실함, 강렬함이 있어야 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서로 배우고 혁신해야 된다는 내용이었고요. 세 번째는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 민주공화국, 공화(共和)의 정신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결국 이 공화라는 게 공동체라는 뜻도 되고, 디지털 시대에는 공유경제의 공(共)도 될 거 같습니다. 그 다음에 화(和)라는 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란 뜻도 되니까 우리 헌법에 있는 민주공화국이 그냥 구호가 아니라 국민들이 더불어 사는 삶을 보장하는 국가로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시대의 능력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오늘 오랫동안 참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담 정리=이형진 작가사진=김용훈 사진작가편집=한은지 기자


김호기 교수196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UCLA 사회학과 및 Center for Korean Studies 방문학자로 연구활동을 했으며,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좋은 정책포럼 운영위원장,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 『논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말, 권력, 지식인』,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 등이 있다.

안병진 교수1967년 대구 출생. 서강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미국 정치)으로 한나아렌트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이며 미래문명원장과 총장실 정책실장, 사이버대 부총장을 역임했다. 경향신문 정기 칼럼니스트이고 생태 문명 NGO인 ‘지구와 사람’의 학술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코로나19 동향과 전망』,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예정된 위기』,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