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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대부’의 편지, 할리우드 인종차별 문제에 총성을 울리다

By | 2021년 5월 10일 | 기획 · 연재,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영화 <대부>에 출연한 배우 말론 브란도. 미국 내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기 위해 1972년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했다. (사진=예지림 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한국 영화계의 위상을 높인 게 불과 1년 전이다. 올해는 한국 배우 윤여정이 한국계 미국 감독의 영화에 출연해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연 이은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은 한국인들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심겨주었지만, 과거라면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흔히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아카데미상은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라는 미국의 영화인 단체가 주는 상이고, 미국 영화인들의 잔치로 오랫동안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때는 불과 6년 전이다. 2015년, 아카데미상 후보 중 연기자들이 경쟁하는 부문에 올라간 20명의 후보들이 모두 백인 배우로 채워지자 미디어 전략가인 에이프릴 레인(April Reign)이 백인 편중 문제를 지적하는 해시태그인 #OscarsSoWhite(=Oscar’s so white)를 만들어내어 크게 회자되었다. 레인은 할리우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흑인 트위터 유저들 사이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고, 그가 해시태그는 마침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던 BLM(Black Lives Matter) 운동과 맞물려 크게 일파만파로 퍼졌다.

할리우드의 반응은 빨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영화업계가 나쁜 평판에 몹시 민감한 덕에 그렇다고 하지만, 특히 시상식이라는 행사가 흥행이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입소문에 민감하고 바이럴(vira)과 바이브(vibe)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이후 <블랙 팬서>와 <겟 아웃>, <코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같은 백인이 아닌 주인공의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아카데미 후보와 수상작에 선정되기 시작했고, 2019년에 이르면 수상자 중 13명이 비백인이었다. 그리고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이면서도 과거처럼 외국어 영화상 하나에서만 경쟁하지 않고 주요 부분에서 후보에 오르고 작품상까지 받게 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데스 로봇Love, Death & Robots’의 5편 ‘무덤을 깨우다(Sucker of Souls)’에 등장해서 금방 죽임을 당하는 “한국계 대학원생”. (사진=넷플릭스)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소동

하지만 연기와 작품을 인정받는 게 전부는 아니다. 아시안을 뻐드렁니를 한 못난이로 묘사하던 시절은 지났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시안에 대한 묘사는 나약한 이미지의 주변 인물인 경우가 허다하다. 좀비물 시리즈였던 <워킹 데드>에서 한국 계인 스티븐 연이 연기한 인물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스크린 타임을 받지 못했다는 불평이 팬들 사이에 많았다. 다행히도 스티븐 연은 이 시리즈에 등장한 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배우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그 뒤로 큰 명성을 얻긴 했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비백인 캐릭터 가운데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어온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일 것이다. 이들만큼 일관되게 나쁜 이미지로 묘사되어온 인종도 없다. 미국의 서부영화 황금기에 인디언들은 문화도 없는 악당이고, 그저 선량한 백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인디언들이 사는 땅에 들어와 전염병과 총으로 죽이고 삶의 터전에서 몰아낸 쪽은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만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인디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역사왜곡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을 전후해서다. <작은 거인 Little Big Man>(1970), <솔저 블루 Soldier Blue>(1970)등 소위 수정주의적(revisionist) 접근을 한 서부영화가 등장해서 인디언 입장에서 백인들의 행동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었다. 1990년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의 춤을 Dances with Wolves>이 이런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할리우드가 곧바로 인디언 문제에 대한 사과를 하거나 반성의 뜻을 밝힌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는 여전히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게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소동의 배경이다.

이 해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말론 브란도였다. 영화 <대부 The Godfather>에서 주인공 돈 비토 콜리오네를 완벽하게 연기하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 해 최고의 연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브란도는 시상식장에 나오지 않고,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언 배우 샤신 리틀페더(Sacheen Littlefeather)를 보내어 자신은 아카데미가 주는 상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대신 전하게 했다.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부한 말론 브란도를 대신해 그의 편지를 들고 있는 인디언 배우 샤신 리틀페더. (사진=AP/연합뉴스)

리틀페더는 “말론 브란도가 장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시간 때문에 여기에서 읽지는 못한다”고 하면서 브란도가 수상을 거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유는 미국의 영화산업과 영화를 재상영하는 TV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을 취급하는 방식과 최근에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일어난 사태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저녁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며 장래에 우리의 마음과 이해가 사랑과 관용을 통해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합니다. 말론 브란도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And the reasons for this being are the treatment of American Indians today by the film industry – excuse me – and on television in movie reruns, and also with recent happenings at Wounded Knee. I beg at this time that I have not intruded upon this evening and that we will in the future, our hearts and our understandings will meet with love and generosity. Thank you on behalf of Marlon Brando.

아주 짧은 메시지였지만, 리틀페더가 운디드니 사태를 언급하자마자 객석에서는 박수와 야유소리가 함께 쏟아져 나왔다. 운디드니는 미국의 인종차별 흑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미국 인디언 멸망사>로 소개된 D. A.브라운의<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 An Indian History of The American West>에 따르면 1890년 미 육군 제7기병대의 소령 새뮤얼 휫사이드 지휘 하의 군인들이, 자기들이 체포해 강제 이주시키던 수우(Sioux)족 인디언 350명 중 약 300명(여성과 아이들 포함)을 일시에 학살한 사우스 다코다주의 남서부 지역이다. 70년 후인 1960년대 말에 아메리칸 인디언 운동이 일어났고 백인들과 갈등이 커지다가 결국 1973년 초에 인디언들과 그들을 포위한 경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두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는 행사이지만 그중에서도 1972년 시상식은 할리우드의 인종차별 문제가 아무도 피할 수 없도록 정면에 등장하게 된 행사였다. 그 이후로 거의 반세기가 지난 일이고, 당시 영상도 꽤 오랫동안 잊혀 있었지만 근래 들어 아카데미와 할리우드가 변화하면서 이른바 역주행해 퍼지고 있다. 한국 영화계에게는 지난 두 번의 시상식이 실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1972년 시상식에서 샤신 리틀페더가 읽지 못한 말론 브란도의 편지를 번역해봤다.

_________

지난 2백 년 동안 우리는 자신들의 땅과 생명, 그리고 가족과 자유로울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인디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왔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으시게 친구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공존할 수 있네. 자네들이 무기를 내려놓은 후에야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고, 자네들에게도 이로운 협정을 맺을 수 있다네.”
For 200 years we have said to the Indian people who are fighting for their land, their life, their families and their right to be free: ”Lay down your arms, my friends, and then we will remain together. Only if you lay down your arms, my friends, can we then talk of peace and come to an agreement which will be good for you.”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자 우리는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들을 속여 그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굶긴 끝에 조약이라고 부르는 가짜 협정을 맺었고, 그걸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태고적부터 그들을 먹여 살려 온 그들의 땅에서 구걸하는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좋게 해석하고, 어떻게 왜곡해도 우리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한 행위는 적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인디언 부족들을 회복시키거나 맺은 협정을 준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력으로 타인의 권리를 공격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땅과 자유를 지키려는 그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선한 의도를 범죄로 만들고, 우리의 악행을 선한 의도로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When they laid down their arms, we murdered them. We lied to them. We cheated them out of their lands. We starved them into signing fraudulent agreements that we called treaties which we never kept. We turned them into beggars on a continent that gave life for as long as life can remember. And by any interpretation of history, however twisted, we did not do right. We were not lawful nor were we just in what we did. For them, we do not have to restore these people, we do not have to live up to some agreements, because it is given to us by virtue of our power to attack the rights of others, to take their property, to take their lives when they are trying to defend their land and liberty, and to make their virtues a crime and our own vices virtues.

하지만 우리의 사악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엄중한 판결입니다. 역사는 우리를 반드시 심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의 심판에 관심이나 있습니까? 도대체 어떤 도덕적 정신분열을 갖고 있기에 전 세계에 소리를 높여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노라고 외칠 수 있는 겁니까? 우리 역사의 모든 페이지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지난 1백 년 동안 목이 마르고, 굶주리고, 모욕을 당한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이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But there is one thing which is beyond the reach of this perversity and that is the tremendous verdict of history. And history will surely judge us. But do we care? What kind of moral schizophrenia is it that allows us to shout at the top of our national voice for all the world to hear that we live up to our commitment when every page of history and when all the thirsty, starving, humiliating days and nights of the last 100 years in the lives of the American Indian contradict that voice?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원칙에 대한 존중,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힘으로 성공한 일이라고는 친구와 적을 막론하고 새롭게 탄생한 나라들의 희망을 꺾어버린 것뿐인 듯합니다. 우리는 인도적인 나라가 아니고,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 나라 같습니다.
It would seem that the respect for principle and the love of one’s neighbor have become dysfunctional in this country of ours, and that all we have done, all that we have succeeded in accomplishing with our power is simply annihilating the hopes of the newborn countries in this world, as well as friends and enemies alike, that we’re not humane, and that we do not live up to our agreements.

여기까지 들으시면 여러분은 이게 아카데미상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고 물으실 겁니다. 왜 이 여성이 여기에 서서 우리의 저녁시간을 망치는 것인지, 우리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침범하고, 우리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우리의 집에 침입하는 거냐(TV 중계로 보는 시청자들을 의식한 표현으로 보인다–옮긴이)고 하실 겁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인디언들을 비하하고 그들의 캐릭터를 조롱하고, 그들을 야만인이고, 적대적이고 악한 존재로 묘사한 영화계도 똑같이 책임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자라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디언 아이들이 TV를 보고 영화를 볼 때 그 속에서 자신과 같은 인종이 묘사되는 걸 볼 때 그들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입는지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Perhaps at this moment you are saying to yourself what the hell has all this got to do with the Academy Awards? Why is this woman standing up here, ruining our evening, invading our lives with things that don’t concern us, and that we don’t care about? Wasting our time and money and intruding in our homes. I think the answer to those unspoken questions is that the motion picture community has been as responsible as any for degrading the Indian and making a mockery of his character, describing his as savage, hostile and evil. It’s hard enough for children to grow up in this world. When Indian children watch television, and they watch films, and when they see their race depicted as they are in films, their minds become injured in ways we can never know.

최근 들어 이러한 상황을 고치기 위한 소수의 어설픈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설픈 시도였고, 너무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인의 한 명으로서, 미국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밤 이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상황이 급격하게 나아지지 않는 한, 이런 시기에 이 나라에서 상을 주고받는 일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성경 창세기에서 동생을 죽인 카인이 신에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의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옮긴이) 최소한 그의 사형집행인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Recently there have been a few faltering steps to correct this situation, but too faltering and too few, so I, as a member in this profession, do not feel that I can as a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accept an award here tonight. I think awards in this country at this time are inappropriate to be received or given until the condition of the American Indian is drastically altered. If we are not our brother’s keeper, at least let us not be his executioner.

오늘 제가 여러분께 직접 말씀을 드렸어야 하지만 제가 운디드니로 가서 불명예스러운 평화협정이 맺어지는 걸 저지하도록 돕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께서 부디 제가 드리는 말씀을 무례한 침범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이 나라가 앞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태고적부터 자신들을 먹여 살린 땅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게 될 문제에 (여러분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진심 어린 노력으로 보아주시기 부탁드립니다.
I would have been here tonight to speak to you directly, but I felt that perhaps I could be of better use if I went to Wounded Knee to help forestall in whatever way I can the establishment of a peace which would be dishonorable as long as the rivers shall run and the grass shall grow. I would hope that those who are listening would not look upon this as a rude intrusion, but as an earnest effort to focus attention on an issue that might very well determine whether or not this country has the right to say from this point forward we believe in the inalienable rights of all people to remain free and independent on lands that have supported their life beyond living memory.

리틀페더씨의 친절과 도움에 감사드리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Thank you for your kindness and your courtesy to Miss Littlefeather. Thank you and good night.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여러 언론사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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