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극우 정치조직인 FPI(이슬람 수호자 전선)의 지도자 하비 리지크(Habib Rizieq·55). (사진=Youtube)

어느 나라나 극우(極右)의 사고방식은 엇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개 인종적 기반을 공유하며 국가의 성장기에 큰 배경이 되어준 주류 종교를 공통분모로 한다. 힘의 논리에 의존하며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확신까지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일방적이다. 인도네시아에도 극우 세력이 있다. 근래 인도네시아 정치권의 가장 큰 부담이자 골칫거리로 작용하면서 국제뉴스를 양산해 내는 인도네시아의 극우 정치조직인 FPI(이슬람 수호자 전선)와 그 지도자인 하빕 리지크(Habib Rizieq·55)가 그 장본인들이다.

인도네시아,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는 너무 크고 인종도 다양해서 쉽게 그 성격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 신자(전 국민의 88%, 약 2억 2000만 명)를 보유한 동남아의 섬나라, 그리고 대통령이 조코 위도도(59세)라는 것 정도가 한국인들에게는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발리(Bali)라는 천혜의 관광지도 유명하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서 지분이 가장 큰 나라다. 한국의 신남방정책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되고 실제로 한국과의 관계 역시 상당히 끈끈한 편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내밀한 국내 정치 사정을 4500km도 넘게 떨어진 한국에서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정치만 해도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숱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던가? 지역갈등도 있고, 주변 4대 강국과의 외교관의 차이도 있으며, 전통적인 부자와 빈자 혹은 도시와 농촌의 갈등도, 때론 개혁관이나 사상의 차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당연히 인도네시아 정치도 수없이 다양한 변수들이 모이고 분열하며 그 과정에서 세력의 새로운 균형점을 만들고 있다.

다만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다른 2~3가지의 절대 변수를 꼽아볼 수 있다. ①인종 ②종교 ③군부(軍部)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세 가지 변수는 동남아시아 국가 어디라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주제다. 세 가지 변수 안에서 '모더니즘 vs 봉건주의'가 편을 갈라서 싸움을 벌이는 모양새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인도네시아 정계의 가장 큰 대립각을 세웠던 정치인은 아혹(阿學,55세) 자카르타 전 주지사와 그와 상극에 섰던 FPI의 하빕 리지크다. 이 둘의 치열한 전투는 현재 진행 중이며 사실상 동남아 정치의 최전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계 극우집단 FPI, 인니 정국의 뇌관 부상

동남아 최신 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도네시아 FPI의 지도자 하빕 리지크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먼저 FPI란 명칭은 영어가 아닌 인니어 'Front Pembela Islam'의 약자다. 이를 영어로 바꿔 표현하면 'Islam Defenders Front' 즉 '이슬람수호자전선'이 된다.

회원 수백만 명을 가진 시민(종교)단체이지만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다. 평소 5% 남짓의 미약한 지지율을 보이는 이슬람계 극우정당의 기반이 되는 조직이다.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거리에서 과격한 투쟁의 정치를 펼치기에 그 존재감이 과잉 대표되어 버렸다. 주장하는 바도 대부분 종교, 민족주의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가 실제로 신의 아들이냐?”고 되묻고 “자카르타 시장을 화교 출신이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외치는 수준이다.

이들의 존재는 지난해 11월 약 3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하빕 리지크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오면서 다시 부각됐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코로나19 집단 발병 사례들이 대개 FPI와 연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망명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해 막강한 정체적 영향력을 행사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79년 이란 혁명의 주역인 호메이니(1902-1989)가 있다. 당시 하빕 리지크의 귀환은 일견 호메이니의 그것을 어느 정도 닮았기에 화제였다. 수천 명의 이슬람계 지지자들이 인도네시아 국제공항에 집결해 하빕 리지크가 고향집에 돌아가기까지 그를 호위하면서 열광했다.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면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거리에 모인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12월 7일 사건이 터졌는데, FPI 소속이자 하빕 리지크의 개인 경호원을 포함한 6명의 무장 종교인이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 또한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 정부와 FPI의 극단적인 대립과 무관치 않다. 경찰과 총격전 끝에 아무리 무장한 종교인이라고 해도 6명이나 사살 당한 일은 그리 단순한 사건은 아니다. 결국 인니 정부는 2020년 12월 말일을 기점으로 FPI의 강제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FPI는 극렬히 반발하고 있으며 인니 정국의 심각한 정치적 뇌관으로 변하는 중이다.

정권 잃은 군부와 극우 대중조직의 '잘못된 만남'

인도네시아가 무슬림 사회인 것은 맞지만 중동의 아랍 국가들처럼 강성 무슬림 국가는 아니다. 10세기 이후 꾸준하게 아랍 상인들을 통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나 원래 동남아 사회가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토착종교가 아주 오랫동안 자리 잡아온 다민족 다종교의 열린 사회였다. 특히 해양부 동남아를 대표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대개 무슬림 인구가 많고 주류이기는 하지만 아랍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냉전시대를 관통해 온 인도네시아의 군부체제가 깨어진 시점이 바로 1998년의 아시아 외환위기 무렵이다. 5월 폭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당시 사건이 얼마나 컸냐면 시위대와 군인 경찰이 뒤엉켜 무려 1만여 명이 사망하고, 그 와중에 화교들도 대거 습격을 당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부가 이끈 나라 경제가 파탄이 나면서 동시에 중국 화교들의 경제지배에 극렬 반발한 무장폭도가 봉기하면서 철권 지도자 수하르토는 실각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FPI였다. 그리고 그 조직의 지도자가 당시 33세 청년 하빕 리지크였다.

젊은 청년 종교지도자의 성공 비밀은 ‘선명성’이었다. FPI는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샤리아법의 엄격한 시행을 주장했으며,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슬람의 성월(聖月) 라마단 기간 동안 가게 문을 닫으라고 폭력적인 계도에 나서는 지극히 근본주의적 종교단체를 출범시킨다.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대한 공격도 빼놓을 수 없다. FPI의 하빕 리지크는 수차례의 폭력사태와 수 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지휘하면서 인도네시아 극우세력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FPI가 반사회적인 테러단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용인하기에도 어려운 수준의 폭력을 동반한 것도 사실이다. 10년 전부터 중동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ISIS와의 연계성도 주목을 받기도 했다. 결정적으로는 인도네시아 군부와 경찰이 이들의 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 군부체제의 붕괴와 극우 대중조직의 급부상에는 모종의 연관성이 보인다. 권위주의로 나라를 이끌던 군부는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며 공권력을 상실하자 FPI와 같은 실행력을 지닌 이념적 조직과 서로 공생관계를 이루곤 한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이후 군부와 경찰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은 FPI는 전국에 수 백여 개의 지부를 갖추고 수 백만 명의 지지자를 지닌 대중적인 정치조직으로 성장한다.

FPI의 악명을 높인 사건이 바로 2016년 무렵 자카르타 주지사 아혹과의 극단적인 대립이다. 현대적 정치인 아혹과 극우 종교인 리지크의 대결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정치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아혹(왼쪽) 전 자카르타 주지사와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진=아혹 페이스북)

아혹 전 자카르타 주지사 '차세대 정치인' 부상

아혹은 1966년생, 리지크는 1965년생이니 나이도 엇비슷해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리지크가 그의 이름과 외모처럼 집안 대대로 이슬람을 신봉하며 차근차근 종교지도자로 성장했다면, 아혹(阿學)은 그의 본명이 중반혹(Tjung Ban Hok·鐘萬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하카 화교 출신이며 명문 뜨리삭띠(Trisakti Univ) 대학에서 지질학과 경영학으로 석사를 마치고 고향에서 광산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유망한 사업가였다.그에겐 인도네시아 식 ‘푸르나마(Prnama)’ 라는 이름도 있지만 ‘아혹’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YS나 DJ와 똑같은 정치 닉네임으로 생각하면 쉽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조코위’로 줄여 말한다.

세계 4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의 화교 비율은 1.2%(약 250만 명)에 불과하다. 수도 자카르타 시내의 고층빌딩의 3분의2가 화교 소유라고 말할 정도로 인니의 경제권을 휘어잡고 있으나 정치권에서 화교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군부독재 시절 강력하게 동화정책을 펼친 탓도 있고, 돈만 밝히는 이방인 화교들에게 인도네시아인들이 절대로 표를 줄 리가 없어서다. 화교들은 지난 세기까지는 정계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무너졌다 이미 4대를 넘어 5대, 6대, 그 이상으로까지 이어진 동남아 신세대 화교들은 이미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획득했다. 게다가 20세기까지 지속된 화교 왕따 정책과 토착세력의 정치독점은 아세안의 고질병을 낳는다. 도를 넘어선 부패와 관료주의다. 경제를 책임진 화인(華人) 사업자들이 관료제의 약탈 대상이 되고, 인니계 정치인들은 끼리끼리 부패를 저지르는 관행이 이어지면서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초거대도시 자카르타의 지독한 교통난과 환경오염 역시 부패한 정치 탓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에 속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이같이 달라진 인종간 역할 분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 인물이 바로 2004년 지역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아혹이다. 당초 사업가의 길을 걷던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계기 역시 사사건건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들의 부패를 경험하면서부터다. 부패를 피해 해외로 이주를 꿈꾼 그에게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화교 출신 정치인이라는 고행 길에 나선 것이다.

부패와 금권정치에 질린 유권자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똑똑하고 깨끗한 정치로 무장한 아혹의 성장은 빨랐다, 2004년에는 주의원, 2005년에는 중소도시의 시장 당선, 2009년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중앙 정계로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2012년에는 조코위의 러닝메이트로 발탁되어 수도 자카르타의 부지사로 당선이 된다. 이후의 성장은 더 극적이다. 2014년 조코위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자 그가 바로 주지사 자리를 이어받으며 정권의 2인자로 급부상했다.

광역권 인구 2000만 명 자카르타의 관료주의에 찌든 행정은 복마전(伏魔殿)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아혹은 사상 처음으로 그런 관행과 정면 대결하면서 스타 정치인으로 성장해 갔다. 그의 별명은 “자카르타의 배트맨”이었다. 부자 출신이지만 서민을 위해 싸운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행정개혁의 예를 들어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수수료를 공무원이 직접 받으면서 생기는 관행을 해결하기 위해 수수료의 정가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은행계좌에 입금하는 방식의 현대화를 처음 시도한 것이다. 도심 정비를 위한 무수한 이권 갈등에도 아혹은 굴하지 않고 파격적인 행정개혁을 교통, 환경, 치안 등 자카르타의 전분야로 확대해갔고, 2012년부터 2016년까지 계속된 조코위와 아혹의 콤비플레이는 "인도네시아의 미래"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아혹의 실력과 인기와 더불어 그에게는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인니 정치계에서 소수계인 화교라는 점과, 심지어 그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지점이었다. 아혹의 급부상은 곧바로 인도네시아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나선다던지 노골적으로 이슬람 국가인 인니답지 않게 여러 종교에 평등한 정책을 편 것이 원인이 되었다.

“아혹은 반 이슬람”, 극우파 선동으로 날개 꺾여

화교이자 기독교도 아혹 자카르타 주지사가 조코위의 강력한 파트너를 넘어 차기 지도자로까지 거론되자 FPI가 행동에 나선다.

문제의 발단은 2016년 9월의 발언이었고 이 사건은 ‘가짜 뉴스’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아혹이 이슬람 경전 꾸란 알마이다 51절 “믿는 자들이여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그리고 보호자로서 택하지 말라”라는 구절을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아혹의 원래 의도는 자신이 선거에서 불리한 이유를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 발언에 교묘하게 왜곡되어 SNS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된 것이다.

FPI는 아혹의 발언을 “쿠란=위협, 속임수”인 것이냐며 포장해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에 자극받은 무슬림들 수십만 명이 수개월에 걸쳐 자카르타를 넘어 전국적으로 봉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혹 주지사를 “신성모독죄”로 체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같은 보수파의 주장을 받아들인 법원에 의해 아혹은 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까지 포기한 채 수감생활을 했다. 21세기 현대국가에서 중세 종교국가에서나 가능할법한 ‘신성모독죄’가 적용이 되었다니 황당하지만 정치라는 생물이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2019년 교도소에서 풀려난 아혹은 현재는 정치권에서 한 발짝 물러선 공기업에서 활약 중이다. 그의 정당성은 차치하더라도 현역 정치인으로 복귀하기에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그렇다면 아혹을 정치권에서 몰아내고 조코위 대통령을 위기에 빠트린 리지크의 정치적 입지는 더 커졌을까? 그러나 현실은 또 뜻밖의상황으로 흘러갔다. 2017년 리지크는 다소 황당하게 ‘포르노 금지법’으로 기소가 된 것이다. 그는 설교 도중 한 여성과 그래픽 메시지와 누드 사진을 교환하고 국가의 이념을 모욕한 혐의를 받은 것이다. 그가 실제로 누드 사진을 교환했는지 사실 확인은 어렵지만, 평소 그가 난잡한 성생활에 강력하게 규탄해 온 이슬람 지도자라는 대목이 무척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검찰의 기소가 다가오자 그는 2017년 4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하여 3년간 망명 생활을 내고 최근 인니로 돌아왔다.

이처럼 인니 정국에 FPI는 뜨거운 감자였으며 조코위 정부의 커다란 혹이자 개혁의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사태 와중에 리지크의 복귀와 여러 폭력사태,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행정조처의 위반집단으로 조코위 정부의 “단체 해산” 명령까지 받게 된 것이다. 2020년 12월 인니 정부는 "FPI는 폭력, 무단 습격, 도발 등 법률은 물론 공공질서와 안보를 침해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자연스레 수백만의 회원을 가진 FPI의 반발이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시위중인 FPI 단체 소속 무슬림들. (사진=AFP/연합뉴스)

아세안 내 군부와 종교 집단 '정치적인 힘' 무시 못해

하빕 리지크와 FPI의 지난 20년간의 영향력 확대는 인니 정치의 현대화에 막대한 장애물이 되어 왔다. 물론 그것이 아시아 정치의 거부할 수 없는 한계이자 현실일 것이다. FPI의 해산명령은 조코위의 사실상 가장 강력하면서도 마지막 승부수에 가까울 수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 공포로 인도네시아 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극우 종교인들의 발호를 묵과하다간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박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코위 대통령은 원래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나름의 합리성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어 재선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에 가깝다. 대통령 선거에는 승리했지만 의회의 장악력은 크게 부족하다. 아혹 사건에 크게 데인 그는 2019년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77세의 이슬람 성직자 출신 마루프 아민을 지명하게 이른다. 아혹 파동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55대 45로 이겨 압승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승리에 그치고 만다.

아혹 축출로 촉발된 인니의 보혁대결이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자 조코위는 자신과 대결을 벌인 군부 출신 야당 지도자 프라보워 수비안토(69세)를 2019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는 사실상의 ‘대연정’ 카드를 꺼내게 된다. 군부와 극우파 무슬림을 껴안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선택이었다.

프라보워 장관은 30년간 인도네시아를 독재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인데 수하르토 축출 후 요르단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2014년 대선에서 조코위 현 대통령에게 패한 프라보워 장관은 2019년 대선에서도 정권을 잡지 못했다.

이후 프라보워는 선거 불복을 선언했고 조코위는 보수세력을 달래는 차원에서 프라보워에게 국방장관 입각을 제의했다. 최근 인도네시아 군부가 한국과의 KFX 협상을 파기하다 시피하고 프랑스 라팔과의 협상에 나서는 돌발행동도 역시 연속적인 극우세력의 발호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전히 아세안에서 군부 정치와 종교 정치는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호재 필자

아시아 연구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서 짧지 않게 기자생활을 했다. 아시아 각국을 두루 답사하며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번역서로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비즈니스>, <수상이 된 외과의사-마하티르 자서전>이 있으며, 최근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