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취리히를 연고지로 하는 FC 레드스타 취리히의 경기 모습(사진=FC레드스타 취리히 페이스북)

집에서 걸어서 20분 쯤 떨어진 곳에 ‘FC 레드스타 취리히’의 홈구장이 있다. 자주 산책하는 길이 이 축구장 옆을 지나게 되어 있어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초록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레드스타 선수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건 없건 늘 열심이다. 사실 스위스에서 축구는 대단히 인기 많은 스포츠가 아니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나라가 아닌가. 게다가 레드스타는 스위스 4부 리그에서도 꼴찌 팀이다. 아마 다음 시즌엔 5부 리그로 강등될 것이다.

FC 레드스타 취리히와 슈퍼리그

한적한 축구장에서 연습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내 멋대로 상상을 펼칠 때가 있다. 어느 해, 레드스타의 모든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해 스위스 컵에서 1위를 한다면 어떨까. 이어 유로파 리그에 진출했는데 하필 상태 팀들이 선수 부상이나 말도 만 되는 실수 때문에 줄줄이 나가떨어져 레드스타가 우승을 하는 마법이 일어난다면. 유로파 리그 우승팀은 다음 해 챔피언스 리그에 자동 출전한다는 규정에 따라 챔피언스 리그에도 나가는데, 한 번 성공의 파도에 올라탄 선수들이 한계를 초월하는 집중력과 단합을 발휘한다면, 그래서 취리히 남부의 작은 구단 FC 레드스타가 마침내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이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건 확률이 아주 낮긴 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스위스 축구 4부 리그의 꼴찌팀이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가는 길은 뚫려 있다. 가능성이 낮아서 더 짜릿한 상상이다. 약한 팀을 응원하는 팬은 승리 자체보다는 그 짜릿한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여기 찬물을 붓는 이슈가 있었다. ‘유러피안 슈퍼 리그’ 논란이다.

유럽의 잘 나가는 축구 구단 12개가 자기들끼리 새로운 리그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건 4월 중순이다. 이미 챔피언스 리그와 유로파 리그가 있는데 새로운 리그를 만들기로 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유럽 축구가 재정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실력 좋고 인기 좋은 팀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더 자주 경기를 하고, 그것을 넷플릭스 같은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판매해 수익을 올린다는 게 애초 계획이었다.

슈퍼리그 경기 중엔 챔피언스 리그나 유로파 리그에 참여할 수 없다거나, 선수들이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 경기에서 자국 대표로 뛸 수 없다는 규정도 공개됐다. 현재 유럽 축구 리그는 (레드스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가능케 하는)상·하 강등 제도가 있는데, 슈퍼리그는 소속팀을 고정해두고 닫힌 시스템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여기 돈을 대는 건 JP모건 등 미국 자본이다. 한 마디로 돈 되는 초엘리트 위주의 폐쇄적 경기를 하겠다는 거였다.

축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은 물론이고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등 각국 정부도 강력히 반대했다. 당사자인 선수와 감독들도 동의하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건 팬들의 반발이었다. 지난 21일 영국 첼시 선수단이 탄 버스는 홈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앞에서 홈팬 1000여 명에게 둘러싸였다. 팬들은 첼시가 슈퍼리그에 참가하는 데 반대하며 길을 막았다. 결국 처음에 참여 의사를 밝혔던 구단 대부분이 현재 입장을 철회한 상태다. 슈퍼리그는 이대로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슈퍼리그의 문제 - 잘못된 이야기

슈퍼리그의 문제는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본질적 이유를 잘못짚었다는 것이다.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건 팀의 객관적인 실력이 아니다. 막판 역전극, 7전 8기 같은 ‘성공 신화’다. 성공은 신화일 때 벅찬 것이다. 신화는 팩트가 아니다. 이야기다. 슈퍼리그는 이야기의 힘을 무시했다.

지난 4월 13일, 미래 사회의 여러 변화를 놓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이 나눈 대담이 유튜브에 공개됐다. 두 석학은 인공지능의 발전, 경제적 불평등 증가, 가짜뉴스 전파 등 여러 이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사회자가 대담 마지막 부분에 ‘지금 다시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것을 연구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는데, 유발 하라리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시(poetry)”라고 말했다. 문학으로써의 시가 아니라, ‘창조된 이야기’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하라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은 창조된 이야기(fictional stories)였다. 과학과 팩트로 사람들을 묶을 수는 없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하나도 결합하는 건 이야기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상상력의 위기(crisis of imagination)에 처해 있다.”
하라리는 특히 인공지능과 바이오공학 등 과학의 발전과 관련된 이야기 부재를 지적한다. 과학 분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연대해 대비하려면 좋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사이언스 픽션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게 그는 말이다.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처럼 로봇이 나타나 인간을 죽이는 이야기는 나쁜 이야기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로봇에게 살해당하는 게 아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냄으로써 간단히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사이언스 픽션은 무엇인가. 그가 예로 드는 건 영국 사이언스 픽션 <블랙 미러>의 몇몇 에피소드다. 사람처럼 생긴 로봇의 악행이 아니라, 편리한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인류를 함정에 몰아넣는 이야기들 말이다. 기술이 인간을 해킹하는 미래에 대비하려면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정말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까. 쥘 베른의 이야기는 책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예다. 18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쥘 베른은 <지구에서 달까지>(1867), <해저 2만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3) 등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쥘 베른의 작품 속에서 당시 ‘담대한 상상력’ 정도에 불과했던 것들이 수십 년에서 한 세기가 지나 실제로 등장했다. 전기 잠수함, 솔라 세일(태양광을 이용해 우주선 위치를 안정시키는 돛), 테이저 건, TV 뉴스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다. 2011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는 ‘현실로 이뤄진 쥘 베른의 8가지 발명품’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야기는 기술이 나아가는 길에 영감을 제공한다. 쥘 베른이 닦아둔 길 위를 발명가들이 걸어갔다. 이야기는 장밋빛 미래를 예견할 수도,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경고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야기, 위기에 처하다

정치야말로 이야기 싸움이다. 인물들이 등장하고, 갈등하거나 화해하고, 결정을 내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야기가 정치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 이야기, 그래서 선택을 받은 이야기는 ‘역사의 법칙’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가장 나은 이야기일 뿐이다. ‘민주주의’, ‘복지 국가’는 성공한 이야기다.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같은 것들은 실패한 이야기다. “민주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정치 체제다, 다른 모든 체제를 제외하면”이라는 처칠의 말은, 민주주의가 법칙이 아닌 이야기로서 가진 경쟁력을 강조한다.

그런데 성공한 이야기에 의심이 스며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민주주의에 대한 의심이라니,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낸 세대나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현상(선거 등)과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2020년 10월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베넷 공공정책연구소가 내놓은 <청년층과 민주주의 만족도>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각 세대가 생애 주기별로 민주주의 시스템에 얼마나 만족하는지를 조사한 내용인데 그 조사 대상이 전례 없이 광범위해서 의미가 있다. 1973년부터 2020년까지, 160개국 약 480만 명을 상대로, 기존에 실시된 총 43가지 설문조사 자료를 조합해 분석했다.

논문은 세대를 연령에 따라 인터워(interwar, 양 세계대전 사이) 세대, 베이비부머, X 세대, 밀레니얼(millennials) 등 네 가지로 나눈다. 기준은 다음과 같다.

논문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는 전 세계 주요 지역에서 지난 사반세기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만족도는 절대적, 상대적 의미에서 모두 떨어졌다. 상대적 만족도가 떨어졌다는 건, 예를 들어 밀레니얼이 30대일 때 민주주의에 대해 만족하는 정도가, X세대가 30대였을 때 민주주의에 대해 만족하는 정도보다 낮다는 뜻이다. 아래 표는 각 세대의 생애 주기별 민주주의 만족도 변화를 보여준다. 가로축은 조사 당시 응답자의 나이, 세로축은 만족도다.

(표) 각 세대 생애 주기별 민주주의 만족도 (출처 : 케임브리지대 베넷 공공정책연구소의 위 논문)

흔히 인용하는 ‘스무 살에 보수주의자인 사람은 심장이 없는 것이고 마흔 살에 진보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는 격언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체제 순응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위 그래프를 보면 이것은 틀린 말이다. 젊은 세대, 특히 밀레니얼은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진다. 일부 특정 국가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 호주, 라틴 아메리카 등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불만족은 공통적 현상이지만 그 원인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민주화 투쟁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젊은 세대가, 민주주의 시스템이 현 정부의 부패 등 당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영국에선 젊은 세대가 부모 때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주택을 소유하기 어렵고 사회생활 초기부터 집세 내느라 저축이 힘든 점에 대해 불만이 높았다. 예를 들어 미국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밀레니얼은 현재 미국 내 부의 3%만 소유하고 있는데, 미국의 베이비부머가 지금 밀레니얼의 나이였을 때는 미국 전체 부의 21%를 소유했다. 2000년대 말 유로존 위기 때 큰 타격을 받은 나라들(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청년층 사이에선, 유로존 위기 후 청년 실업률이 전체 평균 실업률보다 25% 포인트 더 높아지자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족도가 크게 증가했다.

즉, 젊은 세대는 현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청년 실업이나 부패, 부의 대물림, 불평등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시스템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2017년 국제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럽 청년의 48%가 ‘민주주의가 정부의 가장 나은 형태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특히 프랑스(58%), 이탈리아(55%)는 그 비율이 절반 이상이었다.

힘 잃은 이야기를 대체하는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에 의심이 생길 때 나타나는 건 ‘마니교적 포퓰리즘’이라고 이 논문은 지적한다. 마니교적이라는 건 세상이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양분돼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민주주의가 더 발달한 나라일수록, 밀레니얼들은 정치적 반대파에게 ‘도덕적 흠결’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밀레니얼의 41%가 ‘정치적 입장을 알면 그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 알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는 조사 결과는 놀랍다. 젊은 층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족이 5년 이상 이어진 곳에선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한다. 여기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모두 포함된다.

청년 실업, 부와 권력의 대물림, 불평등에 대한 불만. 이건 한국의 젊은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그런데 이 논문에 따르면 한국은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 만족도가 높은 나라에 속한다. 불만이 있긴 해도,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정부 등 공공기관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 시위’를 예로 든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도덕적 기준이 높을 뿐 현 체제에 대체로 만족한다는 게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최근 선거에서 나타난 20대 남녀의 양극단적 투표 성향을 보면 한국 정치 역시 터닝 포인트를 맞은 게 아닌가 싶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서구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양극화를 뒤따르는 듯하다.

이 논문의 주저자인 로베르토 포아 박사(케임브리지대 국제정치학)는 연구 내용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전 세계적으로 20-30대 때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이 다수인 최초의 세대가 나타났다. 이 같은 극단적 태도가 밀레니얼 사이에서 우세하는 것은, 발달된 민주주의 체제가 포퓰리스트 정치의 비옥한 토양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위 세대 분류법에 따르면 이 글을 쓰는 나도 밀레니얼에 속한다. 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체제라는 오랜 합의에는 동의하면서도, 현 정치 시스템이 당면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불만에 공감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사회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 돌리는 유럽 정치인들, 남녀 대결 또는 세대론으로 몰아가는 한국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블랙 미러>가 아니라 <터미네이터> 수준이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축구 선수들의 천문학적 몸값 같은 진짜 문제는 무시한 채 슈퍼리그라는 잘못된 대안을 내놓은 자들과 마찬가지다. 축구건 과학이건 정치건,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필요한 때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