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셔터스톡)

<피렌체의 식탁>뉴스레터를 통해 천현우 씨의 글(한국 사회가 놓친 '이남자·이여자'의 목소리) 을 읽은 건 토요일 아침. 주말을 맞아 모처럼 부모님 집에 왔다가, 시험감독 아르바이트를 간다는 아버지한테 어릴 적처럼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한 뒤였다. 아버지는 돈 벌어서 다음 주 있을 내 생일에 고기를 사 준다고 했다. 56년생인 아버진 4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 끝에 진작 은퇴하고 연금도 받고 있다. 고기 사 먹을 돈도 연금에서 나오지만,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나가 돈을 벌고 이 돈으로 딸내미 생일에 고기를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남자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굳건히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가장으로 존중받는 것. 오랜 세월 뿌리박힌 남자의 인생에 대한 상은 쉽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젊은 남성에게 연애·결혼·출산이란 3포가 유독 아픈 이유이며, 디트로이트부터 거제까지 산업이 몰락한 지역에서 실직한 가장에게 직업 교육을 한다고 해도 쉽게 지역사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천현우 씨의 글은, 오랜 세월 사회적으로 형성된 ‘남자의 인생’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는데, 가부장적인 기존 남성상은 부정되면서도 대안적 ‘남자의 인생’에 대한 상은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남성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남성을 적대적으로 몰아가는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대기업 1차 벤더에서 일하는 여자 사람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20대 여성’이 결코 기득권 집단도 아니며, 현실의 폭력 속에 고통받고 있고, 페미니즘이 노동계급, 저임금 여성의 존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드러낸다.

때문에 그의 표적은 페미니즘 자체보다는 인터넷상에서 쉽게 접하는 레디컬 페미니즘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너머 젠더 갈등을 부추기면서 청년들이 실제 처한 삶의 문제에 무관심한 정치권, 지식인을 겨냥한다. 남초/여초 카페나 단톡 방에 오른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본 구체적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무 직함도 없는 생산직 중소기업 비정규직 청년이라면서 (공개적으로 진보정당의 당원이라고 밝히며 글을 쓰는 사람은 직함이 없더라고 공적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온갖 화려한 타이틀이 있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쓴 글의 영향을 고려하며 책임 있게 말하는 모습에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보다 권한과 책임이 많은 이들이 미안함을 느껴야 한다.

1. 문제의 원인에 관하여

이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20대 동료 여성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천현우 씨와 좀 더 공유했으면 하는 얘기가 있다.

그는 생산직 젊은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일삼던 주임들이 격렬한 미투 운동/페미니즘 열기로 그나마 조심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며 페미니즘이 여성의 존엄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미래를 살고 있는 지방의 평범한 청년일 뿐. 여자라고 더 혜택 받은 게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에 여성이라는 성별이 추가되면 존엄을 위협받는 상황에 자주 노출되곤 합니다. 당장 인터넷의 어두운 부분만 비춰 봐도 여성의 가난을 이용해 성을 매수해보려는 남자들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안티 페미니즘과 더불어 레디컬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은 여성의 존엄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불필요한 갈등만 부추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이 되는 지점은 첫 번째, 그가 말한 페미니즘의 긍정적 효과가 합리적 대화와 이성적 설득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레디컬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수많은 페미니스트들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딜레마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인 2000년대 초반 페미는 욕이었고, 여성들은 요즘 20대 여성들과 달리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언급하기조차 쉽지 않았으며, 특히나 여성이 인터넷 공간에서 논리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설득하려 하면 성희롱을 당하거나 신상이 공개돼 조리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10년 넘게 온갖 이성적 설득으로도 바뀌기는커녕 더 잔혹한 형태로 진화하던 인터넷의 문화가 그나마 바뀐 것이 메갈리아라는 공간이 출현하며 온갖 비이성적, 폭력적 혹은 광기의 난동이 벌어지고 난 뒤부터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급진의 역할은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급진파가 난동을 부려 기득권이 공포에 질리거나(20대 남성이 기득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거리낌 없이 여혐 해 오거나 이를 방치한 플랫폼 등을 기득권이라 칭한다고 해 두자) 온건파가 협상을 해서 타협적 제도가 만들어지면 운동은 성공한다. 어쩌면 87년 6월 항쟁이 그랬다. 그러나 한 번 급진의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급진주의자가 급발진하다가 고립돼 소멸하거나 운동 자체를 망쳐버리는 일도 흔한 일이다.

일본 전공투, 중국 홍위병, 87년 이후 (공안당국의 공작이 있었지만) 급진화된 학생운동,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의 강성 지지층까지 모두 이 패턴의 변주들이다. 통제불능 급진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다 알 만한 사람이 그것이 오직 페미니즘만의 특성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는 천현우 씨가 아니라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수많은 지식인이 보이는 행태라는 점에서 언급한다.

두 번째, 정치권에서 부추기는 젠더갈등이 대체로 청년의 삶의 문제와 무관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삶의 문제에 절실해 일부러 일으켜야 하는 갈등이 있다. 20대 남성들이 삶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고자 접속하는 커뮤니티의 ‘은꼴사’라거나, 부자연스럽게 가슴을 크게 그리거나 만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노출이 심한 여성 캐릭터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그려대면 오예입니다’ 하는 가벼운 드립, 故설리의 남자 친구의 이름을 빗대어 설리의 기사마다 달린 이른바 숱한 섹드립이(이 댓글을 20대 남성이 달았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그런 커뮤니티에서도 발견된다) 얼굴이나 몸매에 대한 품평 등이 마찬가지로 삶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넷에 접속하는 여성들에게 폭력이었고 십 수 년간 원한을 쌓아간 원인이기도 했다. 페미니즘이란 말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2012년 무렵 쭉빵카페 등에서는 ‘성 유린 댓글 금지’라는 조항이 있었다.

맘카페에는 남성이 가입이 허용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남성이 가입했다 쪽지로 계속 만남을 요청하는 게시글들이 와서라고 한다. 이런 류의 폭력적 인터넷 환경이, 남성들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지 못한 현실에서 여성들이 의도적으로 젠더 갈등을 일으킬 때 여기에, 여성들의 데이트 무임승차나 군대 문제(현재의 착취적 징병제는 반드시 수술대에 올라야 하나 인터넷에서 여성을 상대로 벌어지는 폭력의 문제에 대한 알리바이로 등판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등으로 맞받아치면서 폭력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표류한다.

그렇기 때문에 20대 여성에게는, 젠더 갈등이 허구적 전선이라는 지적과 달리, 분단을 불사하고 분열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 점에서 젠더갈등은 지양될 수가 없다. 다만 구체적 범죄 경우가 아니라면 맞는 쪽이 너무 아프지 않게 할 필요는 있다는 것. 그리고 젠더갈등도 먹고사는 문제가 풀려가는 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 미러링을 지속적 수단으로 삼는 것을 그리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지 않는다. 결국은 여러 가지 미러링의 난반사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20대 남성들을 특별히 ‘여혐’ 집단으로 칭하는 것에 반대한다. 인터넷이 없었을 뿐이지 지금의 50대 남성들도 똑같았으며, 오히려 경험적으로 느껴보면 성폭력이나 성매매에 대해 20대 남성들이 기성 남성 세대보다 더 민감하고 거부감도 크다. 20대 여성의 성을 가장 많이 착취하는 집단은 20대 남성이지만 마찬가지로 50대 여성의 성을 주로 착취하는 이들은 50대 이상 남성들이다.

그러다 보니 통째로 남혐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다만, 남성 사회의 왜곡된 문화와 맞서 싸우는 것과 넷에서 남성 개개인과 싸우고 불화하는 것은 동일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피해자의 위치에 침잠해 내가 상처 받았으니 모두를 상처 입혀도 된다는 태도는 결국 폭력이다. 이 부분만큼은 필자와 의견이 같을 것이다. 다만 요즘 같은 인터넷 환경에서 페미니즘의 자정 노력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모든 20대 남성이 불법 촬영물 영상을 제작하거나 공유하고, 성 유린 댓글을 다는 게 아니더라도, 이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느끼거나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남성들도 문화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면 '레디컬 페미니즘이 문제'라는 언설은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해선 안 된다는 얘기라기보다 현상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실패한 상황에서.

청년 문제를, 좀 더 나아가 갈등만 부추기는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로 이 실패의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2. 문제의 해법에 관하여

편지글에서 읽어낼 부분은 결국은 실패한 정치, 무책임한 지식인이다. 그런 존재로 호명된 사람들로서 생각해 볼 지점들이다.

첫 번째로, 왜 창원의 생산직 남녀 청년들의 이야기는 진작에 여론의 전면으로 등장하지 못했나. 중산층 편향적인, 그것도 서울의 중산층 편향적인 담론이 전부인 것처럼 넷상을 장악하게 됐나.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지식인들이나 언론인들이 대체 수도권 중산층 집단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관심사와 현재 상황이 과잉 대표돼 미디어에, 담론의 세계에 등장한다. 정말 밑바닥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면, 신문을 보기보다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일베를 보는 게 나았다. 현현하게 드러나는 청년 남성과 여성의 이슈 근본적 문제는 결국 일자리 문제이다.

청년 남성의 경우 혐오적 정서를 비판하기는 쉬우나, 남자의 인생에 대한 서사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 그 대안 서사를 만들 만한 물적 토대는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놀랄 만큼 방치되고 있다. 서비스업이 약진하는 시대 여성의 일자리는 더 많이 창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건이 좋은 일자리는 아니다. 게다가 가족으로 묶인 상황에서 남성 일자리가 무너지고 나니, 동생 학비 대고, 아버지 병원비 대야 하는 전통적 맏딸의 역할이 중첩이 돼 버린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목소리 역시 중산층의 관심사가 과잉 반영돼 있다. 기본소득, 기본자산 등 당장 실현은 못 하면서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급작스럽게 점프한 이야기들이 단적이다. 물론 넷은 중요한 현장이지만 요즘의 미디어들을 보면 넷만이 유일한 현장이라는 인상을 받곤 한다.

두 번째로, 정치는 왜 실패했는가. 왜 페미니즘을 비롯해 여러 의견그룹들은 막 나가는 이야기를 거르지 못하고, 정당들은 넷상의 소음과 같은 소리에 끌려가는가. 인터넷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급진과 온건의 역할 분담 이야기로 돌아가고 싶다. 급진파가 난동을 부릴 때 온건파는 이를 지렛대 삼아 협상을 한다. 급진파가 비록 온건파를 비난할지언정 역할분담에 대한 인식이 있고 협상단이 뭔가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면 급진적 행동은 필요한 순간까지 나아가다 어느 순간 제동이 걸린다.

협상의 결과를 구성원들이 수용해야, 즉 리더를 따라야, 결국 타결이 되고 운동은 성공한다. 이 부분에서 전 세계적으로 소위 좌파진영 전체가 실책 한 부분이 있다. 권위, 권력, 리더, 협상 등을 일체 부정적인 가치로 만들어버리고 계속 기존의 권위에 흠집만 낼뿐, 새로운 권위를 만들 생각도, 권위를 존중하는 방법을 그릴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좌파 이념의 주된 축이었던 페미니즘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결과,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도 책임 있는 리더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협상은 이뤄지지 못한다. 남은 건 각자의 욕망뿐인데, 인터넷을 통해 욕망이 같은 사람들끼리 끈끈한 결집이 가능해졌다. 결국 누군가 책임지거나 제도를 통해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치워버리고 그만두게 하는 운동 양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글에서 비판하는 레디컬 페미니즘의 모습도 결국 이런 면모이다. 우파도 마찬가지가 됐고, 나는 현재 여당을 포함해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문제라고는 생각한다.

먹고사는 문제, 폭력과 혐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명한 입장과 대안 마련도 중요하지만, 그 토대를 만드는 데에도 충실해야 한다. 협상과 타협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협상이 가능한 언어를 개발해내고, 타당한 권위에 승복하는 방식에 대해 보다 고민할 필요가 있다. 권위를 해체한다며 해댔던 비아냥, 조롱에 대해 적어도 공적 인물들의 책임 있는 말하기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로. ‘남자의 인생’이라는 당위적 목표이자 지향은 재구성될 수 있을까. 이건 지금 자라나는 남자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과거 ‘남자의 인생’이 가부장제의 산물로서 여러 문제점이 있고 페미니즘의 극복 대상이었다 하더라도, 그래서 부숴야 하더라도, 공백은 문제다. 윤리적 지향이 아무것도 없는데 윤리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혐오는 그런 상태에서 피어난다. 이 대목에서 굳이 청년 남성을 붙인 이유는 그나마 여성에게는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여전한 남성중심사회라 하더라도, 꿋꿋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를 헤쳐 나가는 긍정적인 모습의 상이 여성들에게 계속 제공되고 있다. 페미니즘이 하는 것이 바로 그 역할이다. 반대로 남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무런 답이 없다는 것, 여자들의 페미니즘 없는 유년시절만큼 끔찍하지 않나. 물론 페미니즘이 기존의 남성상을 해체하며 해방을 가져오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내가 되고 싶은 남성성의 모습이 잘못된 거냐?’는 당사자의 혼란에 답할 여력까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의 완성만큼은 지금의 청년 남성이 직접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면서 데이지 공주가 쿠퍼 마왕에게 끌려가면서 "도와줘요 마리오"라고 외치는 것이 참 싫었다. 나만 싫었던 것이 아닌지라 요즘 내 또래들이 만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는 씩씩하고 용감한 공주들만 나온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남성에게 부여된 삶의 조건과 남성의 상에 불만 있는 당사자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나갈 당사자가 새로운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주말 아침 호쾌한 글로 나타난 천현우 씨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대가 손쉬운 비난이나 값싼 위로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윤리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나누면서, 돈과 일을 줄 방법을 고민해야 할 따름이다.

덧. <피렌체의 식탁> 김용운 편집장이 20대 청년 남성의 현실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원글 하단에 90년대생들의 성비 불균형을 통계로 제시했다. 성비 불균형으로 인해 남성들이 특별히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더라도 연애와 결혼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으로 읽히지만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90년대 여성들은 같은 자료를 보면서, 태아 성감별 낙태가 횡행했던 90년대에 대해 질색하며, 자신을 생존자로 여기고, 어머니의 몸에 낙태를 종용한 할머니-방치한 아버지 등을 증오하며, 살아남은 자로서 급진성을 다지게 된다. 20대 여성의 분노를 설명하는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비 불균형에 대한 일방적 해석은 아쉽다. 그 해석이 아니라면 인구통계를 제시한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지점은 비판하지만, 좋은 글을 발굴해 편집하고 피드백 기회까지 마련한 것에는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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