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도종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때때로 정치인들은 ‘정책’ 보다 ‘태도’로 몰락하곤 한다.

정책을 잘 만들어도 태도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쉽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핵심인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는 당연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김영춘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으로부터 들은 “옳은 얘기를 어쩌면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할까”는 표현이 대표적 예시다. 유 전 장관은 재직기간 수많은 성과를 남겼고 일 잘하는 장관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싸가지 없음’이라는 이미지에 한동안 갇혀 정치적 패배를 거듭해야 했다.

우리 역사에서 ‘태도’로 몰락한 사람을 꼽는다면 조광조(1482∼1519)와 그를 따른 젊은 선비들은 반드시 들어간다. 조광조가 꿈꾸었던 세상 자체는 모두가 동의한 일종의 ‘이상적 사회’로 여겨지기에 더욱 그렇다.

흔히들 조광조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운의 개혁가’이거나 ‘모략에 희생당한 젊은 정치인’이다. 그의 죽음을 불러온 1519년 기묘사화가 워낙 급작스럽게 전개되었던 탓이 크다. 국왕 중종과 조정은 하룻만에 조광조 일파를 체포해 귀양을 보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조광조에 사약을 내렸다.

중종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중종이 그의 죽음을 결정한 당일, 사관은 “왕과 조광조의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웠는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다. 전일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고 기록했다. 조광조도 왜 자신이 몰락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체포된 사람들과 같이 올린 상소문에서 “한번만 왕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그래서 당시부터 중종이 조광조를 싫어하는 신하들의 참언에 속았다는 말들이 돌아다녔다. 기묘사화 다음날. 영의정 정광필(1462∼1538)은 주위에 “왕이 평소 대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일이 있을리 없다. 모함이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종의 후궁이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성을 가진 자가 왕이 된다)를 꿀로 잎사귀에 발라 이를 벌레가 먹게 한 뒤, 왕에게 보여줘 기묘사화가 발생했다는 야사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정작 기록이 전하는 사실은 다르다. 기묘사화 다음날, 조광조 등이 국사를 그르쳤다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중종 본인뿐이었다. 정광필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의 만류로 결국엔 귀양에 그쳤지만 중종은 정 그러면 조광조라도 사약을 내려야겠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중종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쌓여있었다. 이 묵혀진 감정은 한 달 뒤 드러난다. 중종은 조광조 등이 국문장에서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걸 문제 삼아 기어코 사약을 내리는데 남곤(1471∼1527)이 이를 말리자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나도 그 사람을 조금은 아는데 그는 마음이 곧지 않은 사람이다”고 일갈한다.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마저도 사약에 반대했지만 중종은 ‘곧지 않다’는 이유로 조광조에게 이승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광조 일파, 부의 집중 막으려 개혁 시도

중종은 왜 그렇게 조광조를 싫어했을까. 조광조 일파들은 당대 권력층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청렴했고, 삿된 이익에 구애받지 않았다. 국왕과 나라를 위한 충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는 당시에도 인정받았다. 그들 나름대로 국가 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광조 일파는 조선의 문제를 오늘날로 따지면 ‘중산층의 붕괴’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개혁하려 했다.

조선 중기, 나라에는 심각한 균열현상이 발생했다. 국가의 부가 소수 특권계층에 몰렸지만 병역과 조세의 의무는 일부 백성들에게만 과중하게 몰렸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특권계층의 노비로 들어갔고, 공신과 대신으로 대표되는 특권계층들은 노비와 땅을 늘려나갔다.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선비들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 노비의 자연적 증가속도를 최대한 억제하려 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토지의 한계치를 정해 부의 집중을 막으려 했다. 조세 체계를 개편하려 했다. 조선왕조 최고의 조세 개편이라고 불리는 대동법이 바로 이들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기존 집권층들과 대립한 건 당연했다.

문제는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과 이중적 태도

문제는 ‘정책’이 아니었다. 추진하는 ‘태도’에서 보여준 일종의 이중성이었다. 조광조 일파는 자신들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군자와 소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조정 중신, 공신들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그동안 조선의 병폐를 이끈 ‘소인’이고, 자신들은 ‘군자’이니 소인을 배격하고 군자의 정책을 사용하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도덕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만 군자를 자처하고 스스로에게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징조가 나타났다. 현량과가 대표적인 사례다.

중종 13년, 조광조는 관리 선발체제를 바꾸자고 중종에게 건의한다. 기존 과거제도로는 제대로 된 인재 선발이 어렵다면서 추천을 통해 관리들을 선발하자고 했다. ‘묻혀있는 인재들을 공정한 추천을 통해 선발해 고위관리에 임명하자’는 것이 조광조의 논리였다.

이조판서 출신 남곤이 제동을 걸었다. 남곤은 중종에게 ‘과거 중국에서 비슷한 제도를 시행했지만, 결국 연줄이 있는 사람들만 추천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조광조 등은 이 우려를 무시하고 현량과를 시행했지만 결과는 남곤의 예측대로였다. 장원을 차지한 김식(1482∼1520)은 조광조의 오래된 친구였다. 조광조의 후원자였던 조정 중신 안당의 세 아들 모두 현량과에 합격했다. 28명의 합격자 중 12명이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조광조 일파가 추진한 현량과는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추진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화도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시험에서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답안지에 게재된 이름을 가리도록 했는데, 조광조 세력 중 강경파 김식은 “공정한 마음을 가지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가림 종이를 없앴다. 정작 채점 결과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도 합격했다. 시험 전에 채점관들이 몰래 주제를 가르쳐 주는 일도 있었다. 김식은 기묘사화 이후 유배지에서 탈출하는 전례 없는 일을 저지른다.

조광조와 그를 추종했던 선비들은 본인들만 ‘군자’라고 주장하고 자처했지만, 자신들 역시 파당을 짓고, 끼리끼리 모이며 남을 비방했다. 그 태도가 몰락을 불렀다. 그들이 무너지면서 조선은 개혁의 중요한 시점을 놓쳤다. 30여년이 지나 훈구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들은 조광조 등이 제시한 개혁정책을 외면했다. 그리고 병든 조선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조선중기 문신 조광조의 묘 및 신도비(왼쪽)과 조광조의 초상.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주당의 패배는 '태도'에 대한 심판

더불어민주당이 4·7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했다. 승자는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이지만 언론은, 그리고 민심은 제1야당의 승리보다 민주당 패배에 주목한다. 2016년 총선 이후 이어진 민주당 우위 선거 구도가 끝났다.

민주당은 왜 패배했을까. 선거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물러난 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도종환 의원은 첫 회의(4월 9일)에서 “내로남불의 수렁에서 하루 속히 빠져나오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민주당이 보여준 행태가 ‘나에게는 로맨스, 남에게는 불륜’이라는 정서로 인식됐다는 걸 인정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여당의 오만함’이 국민이 든 회초리의 주원인인 게 관측된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4곳(한국리서치·코리아리서치·케이스텍·엠브레인)가 12∼14일간 전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1%는 이번 선거 결과를 ‘민주당이 잘못해서’라고 답했다.

패배한 원인을 묻자 “주택, 부동산 등 정책 능력의 문제”라고 답한 사람이 43%,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답한 사람이 18%였다. “야당과 협치하지 않고 일방적인 정책 추진”은 15%였고. “전임 시장의 성추문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 부재”는 10%였다. 여당의 태도를 문제삼은 비율이 정책의 문제를 삼은 비율과 엇비슷하다. ‘그동안 쌓아온 여당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차에 부동산 정책이 비판의식에 불을 댕겼다’는 분석은 경청할 만 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제도

사실 민주당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조국 사태’, 윤미향 민주당 의원을 둘러싼 논란,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들의 성추문과 그 대응. 재보선 패배는 이 누적된 행보에 대한 국민의 응답이었다. 정책 이전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태도’로 심판받은 민주당이 직면한 이 정치적 위기는 그래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라는 책에서 2016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서 뒤졌던 도널드 트럼프가 어떻게 해서 승리했는지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대신 구글에 인종차별적인 단어들을 검색했고, 구글에 쌓인 데이터는 이들의 불만이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숨겨진 인간의 욕망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500년 전, 유배지에서 탈출을 시도한 김식의 욕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은밀한 마음속에 ‘비도덕적인 나’를 숨겨놓고 산다.

민주주의는 인간을 선으로 규정하고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체제는 숱한 시행착오 끝에 인간의 욕망과 불완전성과 비도덕성, 이기심을 상수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수를 제어할 수 있는 명제도 도출했다. 바로 ‘나의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조금이나마 보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강제로 듣게 만든 것이 어쩌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인간을 다양한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선이고 내 의견에 반대하면 악’이라는 이분법에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군자지만 남들은 소인이라는 태도 역시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다.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난 1년간 행동에 대해 ‘내로남불’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걸 뼈아프게 들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민주당의 지난 1년에서 ‘나는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군자고 남들은 소인’이라는 이분법에서 빠져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만 옳다'는 태도를 버려야

군자로서 ‘완전한 선’을 꿈꾸다 무너진 조광조와 그 일파의 과거를 이 시점에서 다시 소환하는 건 결국 ‘우리는, 우리만 옳다’는 잠재의식의 위험성을 말하고 싶어서다. 조광조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군자’가 정치를 하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었지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현 시점에서 보면 자신이 소인일 수도 있고 남이 군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점이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이었을 수 있다. 중종의 마음이 돌아섰던 원인일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고,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협의라도 해야 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그 체제를 움직이는 것이 정치며 이를 수행하는 것이 정치인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벌이는 갈등과 반목을 조율하는 것.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한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 ‘최대한의 동의’여야 한다. 이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나지 않는 ‘정치’의 본질이고 그 본질은 정치집단의 태도를 통해 구현된다.

그래서 불과 1년전 180석을 차지하며 거대 여당이 되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이 시점에서 민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교훈을 찾아야 하는가. 조광조와 그 사단에게 죄를 물을 때 조정이 내린 공식 '죄목'에서 힌트를 찾을 수 얻을 수 있다.

"조광조 등을 보건데 서로 붕당을 맺고 친한 자는 천거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했습니다. (중략)...후진을 유인해 언행이 정상적을 벗어나고 격렬하게 만들었습니다...(중략)...그 죄를 분명히 하소서"(중종실록, 중종 14년 11월 15일 기사)


이도형 필자

세계일보 기자. 국회에서 대부분의 기자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다. 역사를 좋아하고 훗날 궁궐 탐방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때로는 소속 매체와는 무관한 글로 독자들과 이야기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