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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칼럼] 공주가 반했던 소년은 73년 간 英 왕실을 어떻게 바꿨나

by | 2021년 4월 19일 | 국제

2012년 5월 9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왼쪽)과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Prince Philip)이 런던 국회의사당에서 의회 개회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AFP/연합뉴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公(공)이 100세 생일을 두 달 남기고 지난 9일 소천했다. 필립공은 소원대로 자신의 주말 숙소인 런던 히드로 공항 인근 윈저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9일장으로 치러진 17일의 가족장 형식의 장례식도 같은 윈저성 안의 왕실 직속 성 조지 예배당에서 치러졌다.

필립공의 유해는 장례식장 바로 밑 지하실(vault)에 임시로 모셔진다. 이곳에는 6번의 결혼을 한 헨리 8세와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참수된 찰스 1세 등 영국의 역대 왕과 왕비들이 안장되어 있다. 필립공은 나중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세상을 뜨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이라 부르는 아주 작은 공간에 여왕과 같이 묻힌다.

영국 언론에 나오는 필립공에 대한 초기 평가는 ‘떠돌이(crusty)’이고 ‘반동분자(reactionary)’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제로 필립공은 외향적인 성격에 몸 쓰는 운동을 좋아하고 과격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넘어 시간이 갈수록 ‘완고한(hidebound)’왕실을 시대에 맞게 시간을 두고 주위와 합의해서 온건하게 개혁을 추진한 ‘현대화 추진자(modernizer)’라는 평이 힘을 얻고 있다. 필립공으로 인해 “영국 왕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현대화되어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2년 6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왼쪽)과 그의 남편 필립공이 영국 왕립 경마 축제에 참석한 모습. (사진=AP/연합뉴스)

왕실의 살림 도맡은 주부, 필립공

필립공을 이르는 언론의 수많은 묘사 중 가장 정확하게 필립공의 왕실 내 역할의 호칭은 바로 ‘왕실 회사의 총무부장(general manager of The Firm)’이다.

‘The Firm’은 ‘The Institution’이란 단어와 함께 영국에서는 왕실을 칭하는 별명이다. 필립공이 왕실 내의 대소사를 직접 다 챙겼다는 뜻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더 크라운>에도 나오듯이 결혼 전 필립공은 장인 조지 6세에게 “내 임무(job)가 무엇 입니까?” 라고 물었다. 조지왕은 여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바로 저 여인이 너의 임무 일세”라고 했다. 결혼 후 왕실 내에서 누구도 필립공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들도 전례가 없어 무엇을 왕의 배우자(Royal Consort)가 해야 하는지를 몰랐으니 필립공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결국 필립공은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해야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외부 일로 바쁜 여왕을 대신해 왕실 내의 모든 살림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주부의 역할이었다. 필립공이 왕실에 들어가 처음 놀란 점은 영국 왕실 역사에서 왕의 배우자도 왕실 내의 대소사를 필립공처럼 직접 챙긴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필립공 성격상 이 일이 정말 잘 맞았고 또 잘 해내서 왕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선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던 왕실 재산 관리와 지출을 틀어 잡았다. 왕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챙겼다. 왕궁 내의 정원에 무엇을 심는지 까지 필립공의 결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장악하고 관리했다.

자녀 교육방식도 바꿨다. 전통적으로 영국 왕의 직계 가족은 외부 학교를 가지 않고 궁내에서 교육을 받았다. 왕족이 어떻게 일반인들과 같이 어울려서 교육을 받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립의 생각은 달랐다. 왕실이 현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왕과 왕족이 일반 국민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해서 자신이 졸업한 스코틀랜드 고든스톤 학교에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찰스는 고든스톤의 겨울철 냉수 목욕과 벽난로가 없어 냉골의 침실, 황무지와 산 달리기, 학교 짓기 노력 동원 등의 철저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너무 싫어서 아버지 필립공을 증오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자신이 완성되어서 아버지 교육이 옳았다고도 인정했다. 찰스 이후 왕실 가족은 모두 외부학교로 교육을 나가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에서 필립공이 이룬 가장 큰 공헌 중에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불필요한 관습 없애고 변화 불러와

필립공이 개혁을 하는 중 제일 거센 저항은 바로 왕실 내부에서 나왔다. 아주 간단한 일이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왕실 내 하인들이 분가루를 묻힌 가발을 쓰는 관습을 없애는 일이었다. 왕실 중신들마저도 반대했다. 다른 문제는 바로 왕족 사이의 소통 방법인 쪽지를 폐지하는 일이었다. 필립공은 전화가 들어온 지 70년도 넘는데 왕실 내에서 아직도 시동을 통해 쪽지 전달로 소통한다는 사실에 놀라 궁내 전화 설치를 서둘렀다. 중신들은 물론 여왕의 할머니 메리 여왕도 시종들 가발 폐지와 함께 극심하게 반대했다.

또한 왕궁에 존재하는 왕족과 왕실 직원들을 위한 두 개의 부엌을 하나로 합친 것도 필립공이 한 일이다. 두 개 부엌 유지의 낭비는 물론 차별을 없애자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라 1년에 한 번 성탄절에 여왕 주최의 왕실 직원들을 위한 연회를 열어 주는 관습도 필립공이 주창한 일이다. 필립공이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못했을 변화들이었다. 이렇게 필립공은 왕실에서 전혀 존재감이 없이 봉사하는 그늘진 곳의 하급 직원들까지 챙기면서 그들을 우군으로 만들어 갔다. 그래서 영국 내 추모 방송에는 필립공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는 전직 직원들이 증언이 이어졌다.

1969년 6월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로열 패밀리>의 한 장면. 1월1일 아들 찰스 왕세자(오른쪽), 딸 앤 공주(왼쪽), 필립공과 함께 엘리자베스 여왕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BBC)

왕실은 왕실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필립공은 왕실 개혁과 함께 변하는 시대에도 왕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들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1953년 여왕의 대관식 생중계도 필립공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왕실 중신들은 왕실 행사를 그런 식으로 일일이 세상에 알리면 신비감이 떨어져 왕실 권위에 금이 간다는 주장을 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도 엄숙해야 할 대관식이 극장 공연 같이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필립공은 왕실의 존재는 왕족이 국민들의 가시권에 있어야지 괴리되어 존재하면 안 된다(couldn’t be remote; it had to be visible)고 했다. 또 왕실이 왕실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타성에 젖어있는 왕실 측근들을 설득했다.

이런 맥락에서 1957년 여왕을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성탄절에 영국을 비롯해서 영연방 국민들을 대상으로 TV로 성탄 축하 연설을 하게 했다. 이 성탄 연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인들은 여왕의 성탄 연설을 들으면서 한 해를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1961년 필립공은 자신이 직접 TV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첫 왕실 인사가 된다. 1969년 영국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왕실 생활 다큐멘터리가 필립공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카메라가 왕궁 안까지 들어와 왕실 가족의 내밀한 실내까지 보여주고 여왕과 필립공은 어떤 식탁에서 식사하고 왕족들이 같이 TV를 보는 거실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어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필립공은 총무부장답게 모든 장면에 일일이 개입했다. 자신이 바비큐에서 소시지를 굽는 장면도 넣고 왕실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담소하고 심지어는 논쟁하는 자연스러운 장면까지 넣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필립공은 어느 별의 이야기 같았던 왕실이라는 실체를 국민들 근처로 불러들이고 왕실이 박물관 전시품(a museum piece)이 되는 걸 막았다.

영국 언론은 필립공의 이런 노력과 시도가 결국 왕실을 보호해서 21세기까지 살아남게 했다고 평가한다. 결국 반대하던 측근들과 왕족들마저 필립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해 다음부터는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렇게 필립공은 왕실을 인간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만들었다.

필립공은 1956년 자신의 작위를 따서 ‘듀크 오브 에든버러 상(償)’라는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의 모험심과 봉사 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자기계발 및 탐험 활동으로 지금까지 세계 700만명 이상이 이 과정을 밟았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공공봉사로 英 자선활동 문화를 주도

필립공은 또 여왕에게 비공식적인 오찬을 자주 열도록 해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도왔다. 여왕으로 하여금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세상 사람들을 알게 만들었다. 또 1년에 두 번씩 왕실에서 런던의 버킹검궁과 에든버러 홀리루드궁 정원으로 각각 8000명의 일반인들을 초대해 다과를 같이 나누게 하는 가든파티도 필립공이 주선한 일이다.

여기에는 이름 없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봉사하는 환경미화원, 경찰관, 간호사 같은 보통 국민들이 초대 받는다.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영광이어서 초대장을 액자에 걸어 거실에 걸어 놓고 자랑한다. 지방이나 외국 방문 중 중간에 차에서 내려 연도에 늘어 선 인파들과 악수하고 담소하게 만들고 그들이 들고 온 꽃다발을 직접 받기도 하는 관례를 도입했다. 그렇게 해서 여왕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인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방법도 배우게 했다.

무엇보다 필립공의 영국 사회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자선단체 후원을 규범화 한 것이다. 필립공은 800여 개의 자선단체와 기관의 수장으로, 혹은 단순한 후원자로 참여해서 활동을 직접 도와주기도 하고 단순히 이름만 빌려 주고 모금 파티에 참석해서 모금을 도와주는 식으로 자신의 일을 개척해 나갔다.

이는 여왕을 비롯해 왕실 가족 전체가 하는 공공봉사(public service)의 규범이 되었다. 필립공 이전의 영국에는 일반 대중들이 활발하게 참여하는 자선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그냥 일부 귀족이나 사회지도층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 사이에서 모금하고 봉사하거나 조금 더 넓혀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해서 제한된 모금 활동 정도를 했다.

그러나 필립공이 참여하면서 일반인들의 자선단체 가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 현대식 자선활동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여왕도 뒤 따르고 왕실 직계 가족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귀족들과 사회지도층 정치인까지로 넓혀졌다. 현대 영국 자선활동의 시작을 필립공으로 꼽는 이유다.

유일한 일반인 출신, ‘현대화의 수호자’로

해군복무 시절의 필립공

필립공은 21세에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갑판사관(first lieutenants)이 되고 29세에는 1350톤의 구축함 함장으로 선원 200여 명을 2년간 지휘한 능력자였다. 그때의 경험은 바로 왕실 총무부장을 할 때 큰 자산이 되었다.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실무경험으로 단단히 준비된 필립공은 왕실에 들어가자마자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왕실 살림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년 시절 필립공의 별명은 ‘현대화의 기수이자 수호자(modernizer and protector)’였다. 필립공이 왕실 개혁을 통해 왕실을 수호했다는 뜻이다. 개혁이란 ‘힘을 가진 새로운 피를 가진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새로 들어온 사람만이 기존 구성원 눈에는 안 보이는 모순과 문제가 보이는 법이다. 필립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시 왕족 중에는 유일한 일반인 출신이었다. 필립은 비록 그리스 왕족이지만 한 살 반 때 광주리에 실려 여왕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보내 준 배를 타고 탈출한 이후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친척집으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어렵게 했다.

이렇게 여왕과 결혼하기 전 거의 30년을 일반인으로 살아온 필립은 기존의 왕실 일원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각에서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 8년의 해군 생활은 어떻게 주위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거기다가 필립공은 여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개혁을 밀고 나갈 힘이 있었다.

여왕을 사람으로 대한 유일한 1인

사실 소극적이고 조심스럽고 내성적인 성격의 여왕과 필립공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필립공은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호기심 많고 카리스마 있고 심지어는 장난기로 가득 찬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했다. 심지어는 4-5년 전까지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 위로 훌쩍 뛰어올라 청중들이 놀라는 걸 보고 즐거워할 정도로 장난기가 넘쳤다. 승부욕이 강하고 운동을 좋아했다.

스피드광이어서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면 과속을 했다. 당연히 옆자리의 여왕은 속도를 줄이라고 잔소리를 했다. 한 번은 여왕과 삼촌을 태우고 폴로 시합을 가던 중 필립공이 속도를 심하게 내고 운전하자 여왕이 옆자리에 겁이 나서 숨을 크게 내 쉬고 들이쉬고 했다. 그러자 필립공이 여왕에게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내면 길에 내려 버리고 간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여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창문 손잡이만 잡고 발발 떨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뒤 시삼촌이 “그런데 왜 말을 안 하고 입을 닫았나요? 여왕 말이 맞았는데. 그는 정말 빨리 달렸어요”라고 하자 여왕은 “그가 하는 말을 못 들었나요? 그렇게 소리 지르는데 내가 뭘 더 이상 말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필립공이 여왕에게 소리 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이다.

대개의 경우는 필립공이 소리를 질러도 여왕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여왕도 항상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필립공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석에서 하면 “제발 좀 입 닥쳐요! (Please do shut up!) 당신은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말을 한단 말이에요”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필립공은 세상에서 여왕을 그냥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고 실제 인간으로 취급한 단 한 명의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열세 살 소녀가 해군사관학교 제복을 입은 훤칠한 키와 그리스 조각같은 외모에 반해 열여덟 살의 필립공을 따라다녀 결혼한 일은 여왕 본인과 왕실, 그리고 영국과 더 나아가 영연방 전체를 위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10대 소녀가 무슨 선견지명이 특별히 있어서 평생을 걸쳐 옆에서 자신의 모자라는 면을 보완해주어 1000년 왕실을 현대 적응하게 만든 필립공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고 그냥 두 사람의 운명이다.

지난 4월 17일(현지시각) 영국의 윈저 캐슬에서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윌리엄 왕자, 팀 로렌스 경을 포함한 왕족들이 장례식을 위해 필립공의 관을 성 조지 성당으로 옮기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무슨 상관이 있나? 죽고 난 뒤인데!”

필립공처럼 잘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인물 중에서 필립공만큼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드물다. 영국 왕실에서 필립공만한 남성적인 모든 매력을 가진 왕족은 없다. 단지 지적인 모습이 부족하다고 느껴졌으나 이제 보니 그도 사실이 아니었다. 필립공의 시와 그림은 아마추어를 넘어 작가 수준에 도달했다. 1만1000 여권의 장서도 서재에 있을 정도로 학문적이고 지적이었다.

특히 TS 엘리엇에 심취해서 연구 논문까지 쓰기도 했다. 이를 측근들에게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하며 부끄러워했다. 왕족 중에서 책을 제일 먼저 쓴 저서 14권의 작가이기도 하고 언론에 기고도 하고 연설문도 직접 썼다. 그러면서도 지식인 인척 하지 않고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필립공의 진면모를 말해준다

필립공의 실언과 농담 같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에 맞춘 흥밋거리만 보도하기 마련인 언론 탓에 세상은 그를 괜히 시비 걸기 좋아하고 센스가 없는(pugnacious and insensitive) 고집불통의 노인이라 여기는 선입견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필립공이 떠나고 나자 그의 실언만을 침소봉대해서 보도하던 언론들마저 이제야 진정한 필립공의 모습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생전의 필립공은 언론에 의해 칠해진 자신에 대한 일방적인 인상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심지어는 나중에 사람들에게서 어떤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냐는 전기 작가의 물음에 무슨 그런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하느냐는 듯이 쳐다본 뒤 “나는 그때는 이미 죽었을 것 아닌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난 이미 오래전에 죽고 난 뒤인데!(I shall be dead. Why should I care? Nothing to do with me. I shall be long gone.)라고 툭 던지듯 대답하는 모습은 아마도 필립공의 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했던 에피소드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영국인들도 필립공의 노년에서야 그의 진가를 알아채고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시선을 달리하기 시작했지만 필립공은 고인이 됐다. 영국 현지에서 필립공 가고 나면 누가 있어 왕실을 시대에 맞춰 개혁하고 보호할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권석하 필자

재영칼럼니스트.1982년 무역상사 주재원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고르바쵸프, 옐친 시절 10년간 소련에도 거주했었다. 영국의 정치, 역사, 문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고 영국인도 따기 어렵다는 예술문화해설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문화권에 대한 폭넓은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인 재발견 1, 2권> <유럽문화 탐사>가 있으며 역서로는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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