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셔터스톡)

최근 오래 알고 지낸 A선배와 온라인에서 짤막한 논쟁을 벌였다. 1970년대 생인 A선배의 이력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지금은 한국서의 삶을 상당수 정리하고 중국 광저우(廣州)부근에서 중국 청년들과 함께 부대끼며 미래의 삶을 개척 중인 이른바 신(新)중년이다.

중국의 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논쟁의 발단은 근래 대중문화계 이슈였던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조기종영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였다. A선배는 조기종영 사태가 현재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중국 혐오(혐중)’과 ‘과한 애국심(국뽕)’이 표출된 사례로 봤고, 이를 근거로 “한국 사회가 편협한 국수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류나 K-모델의 전성기도 조만간 ‘중국의 시대’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덧붙여 “중국인은 딱히 한국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진 않지만, 한국의 중국 혐오가 지속된다면 결국 중국인들은 한국을 적대시할 것”이란 우려도 함께 건넸다.

A선배의 의견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지만 한국인의 편협함만이 현 갈등의 주된 원인이고, 중국의 잘못은 부차적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류를 겨냥한 중국 정부의 ‘한한령’(限韓令)은 국가차원의 혐오 정책이 아니던가? 동아시아 전체를 향한 중국의 터무니없는 영토야욕은 어찌할 것인가? 자국 중심적인 관점으로 이웃국가 시민을 깔보며, 김치와 한복까지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특유의 놀부 마인드는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한국인에게 내재된 중국인과 아세안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소위 서구의 표준을 추종하는 데서 나오는 ‘명예 백인’으로서의 문제가 있다는 반론에는 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사왜곡 논란으로 조기 종영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한 장면. (사진=SBS)

‘문명’의 그림자 ‘혐오’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좋았던 때는 손에 꼽을만하다. 중국인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 지속된 탓이다. 조선 중기 연암 박지원의 기행문 <열하일기>에도 이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열하일기>는 1780년 청나라 건륭제 70세 생일 축하사절로 북경에 다녀온 연암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연암은 동시대 조선지식인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청나라와 중국인을 낮춰보고 깔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나무랐다.

이제는 상식이 되었지만 18세기 말 청나라는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할 정도의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있었다. 반면 조선의 상황은 청나라의 반듯한 도로와 수레, 그리고 벽돌로 지은 탄탄한 건축물을 연암이 몇 번이나 부러워할 정도로 직접 비교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엘리트들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빠져 여진족의 청나라를 문명의 관점으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류의 확산 관점에서 근래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단어가 바로 ‘문명(文明·civilization)’이란 개념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니 과거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문명에 대한 개념을 명쾌하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1970년대 생으로 현재 한국 사회의 허리 세대인 필자가 문명 개념을 잘 모르는데 당연히 20-30대나 50대 역시도 ‘문명론’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으실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문명이란 개념은 ‘문화 혹은 현대’라는 어휘로 대체되었다).

‘역사(歷史)’라는 개념엔 정신적 의미망이 강조되었다면 ‘문명’은 보다 물질적인 인류 진보를 의미한다. 동시에 “예절을 알고 체면을 챙긴다”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실제 중국에서 “문명적이다”는 표현은 ‘문화적’이라는 뜻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를 만들어 살면서 얻게 되는 문명화의 의미는 좋게 말하면 스스로 글로벌 표준임에 가깝다는 것이며, 나쁘게 해석하면 돈과 권세를 좇는 무척이나 세속적인 사회라는 의미도 된다.

다소 뜬금없이 문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혐오라는 사회적인 감정이 문명론과 명백히 같은 층위에서 작동함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즉, 혐오는 덜 문명화된 ‘야만(野蠻)’에 대한 문명인들의 내재된 우월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문명을 누리는 중심부가 변방을 바라보는 감정을 뭉뚱그려 혐오의 감정인 것이고, 자연스레 문명이 있는 곳에 마치 그림자처럼 혐오도 함께한다는 얘기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도시화를 경험한 한국인들은 이 같은 문화적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시골’ 출신과 ‘시내’ 출신의 미묘한 감정과 물질적 혜택의 차이를 한 번쯤은 겪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릴 적에는 화려한 도심 백화점 안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와 자동으로 반응하는 유리문, 자동 되감기 기능이 장착된 일제 비디오카세트레코더, 그리고 비행기 타고 가는 해외여행 정도가 강렬하게 느낀 문명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문명의 혜택’란 시골 출신이 쉽게 접하기 힘든 물질적인 진보를 뜻하는 것이고, 손에 흙을 묻힐 일이 없는 도시인이 변방의 시골 출신을 차별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문명과 비문명의 구분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갖고 있는 이상, 물질적 우월감에 대한 자랑을 억제할 수 없는 일이다.

현 시기의 문명론은 ‘경영학’

문명론을 그리 어렵게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역사에 ‘경쟁’(competition)이라는 프레임을 하나만 더 집어넣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당대 최강이자 표준을 장악한 것이 이른바 문명이기 때문이다. 즉, 문명이란 명백하게 경영학적 관점의 역사라는 점이다. 세속적인 사회의 진면목이란 승자와 패자(루저)를 명백하게 가르는 일에서 시작하곤 한다. 학문적으로는 경영학이 바로 ‘경쟁’에 대한 이론을 다루는 거의 유일한 학문에 속한다. 어떻게 하면 경쟁자를 억누르고 자신의 경쟁우위를 지속하는지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는 게 경영학의 본질이기 때문에 문명론과 긴밀하게 연결된 셈이다.

즉, 경영학은 문명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고찰일 수 있으며 조금은 고상하게 ‘문명학’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이나 기업에만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 국가나 민족, 인종, 단위로 확장을 하게 되면 결국 문명론으로 발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영학에서도 강조하는 경쟁사회에서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다름 아닌 1등 따라하기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수많은 변방 세계가 지향하는 최고문명은 다름 아닌 뉴욕의 맨해튼과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명,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국제정치는 물론 경제와 경영 심지어 학문적 체계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위계질서로 짜였다. 세계의 표준에 가까운 세력이 가장 문명적인 인간이자 기업이기 때문에 그 질서에 편승해야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 누구도 중국이나 중동 동남아 북아프리카를 현대 지구 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시대다. 한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 역시, 일본의 선례를 따라서 서둘러 미국 중심의 질서에 추종했던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1433년 조선 세종때 창건된 화순 향교 대성전에 모신 공자 초상화(왼쪽)와 신윤복의 단오풍정.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중국과 한국 문명의 충돌

한국에 관심을 가진 중국인들을 만나보면 꽤나 빈번하게 꺼내는 주제가 실제로 ‘공자(孔子)’와 ‘단오절 유네스코 등재’ 등의 논란이다. 최근 김치와 한복 공정이 한국에서 화제에 올랐지만 아직은 온라인상의 극히 예외적인 사례로 보인다.

먼저 세계화를 추진한 한국이 중국의 전통과 문명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인 불만의 이유를 찾아 내려가면 중국 특유의 대국주의가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아시아 문명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엔 중국 문명이 있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국과 대만 베트남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아시아의 전통문화는 물론 현대문화까지도 따지고 보면 중국문명의 바탕 위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결국에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 문명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는 셈이다. 미국과 정면대결을 선택한 시진핑의 중국이 한류 금지령까지 들고 나선 이유도 사실은 한류 대신 더 위대한 중국문명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도 이제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반대로 한류(韓流)의 성공에 도취한 한국인이 새롭게 깨달은 현실은 전례 없던 “한국문명론”에 가깝다. 한국문명이 진실로 실재하며 이는 일본과 중국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명’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국뽕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문명이 존재한다는 자신감은 분명 그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뚜렷하지 못했던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SBS의 <조선구마사>의 논란이 된 대목을 전체적으로 검토해보면 지금의 한국인의 눈에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그렇다고 ‘드라마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아니다.

다만 드라마 주변을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이 중국의 자본력과 문화침투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한국문명의 뼈대를 이루는 조선의 건국과정과 세종대왕의 존재감에 생채기를 내는 ‘중국향’의 한국적이지 못한 기괴한 콘텐츠에 총체적인 반발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한국문명론을 주장하는 소비자들이 일종의 문화 독립운동을 벌인 셈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일 수도 있고, 중국의 문화침략에 맞서 굉장히 빠르게 선제적인 조처를 한 것일 수도 있다. 1990년대까지 나름 경쟁력을 갖춘 대만의 드라마 산업이 중국자본에 휩쓸려 한순간에 종속적인 위상으로 전락한 것을 경계하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 자본과 철학이 한류드라마에 침투하는 와중에 터진 <조선구마사>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중국문명의 대(大) 부활이라는 시점에 딱 맞물려 한국문명의 존재 의의와 그 미래를 묻고 있는 일대 사건이라는 얘기다.

동남아시아의 위기와 동병상련

동남아시아 역사와 문명사를 공부하다 보면 놀랍게도 동남아시아의 본질이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경험할 때가 있다. 이는 19-20세기 동남아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데, 정치권력은 유럽이나 이슬람계 등 외부세력이 차지하고, 경제권력은 화교와 인도계들이 확고하게 장악하다 보니 정작 현지 토착민의 목소리가 배제되는 일이 왕왕 발생했던 것이다. 동남아의 본질은 사라지고 외부세력만 남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1980년대까지 유행했던 동남아의 또 다른 이름인 ‘인도+차이나’라는 이름이 현재는 의식 있는 지식인들에게 거부되어 사라진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동남아시아의 미약한 존재감을 한반도의 그것과 비교하는 서양 학자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을 쉬이 잃어버리는 과거 한국의 모습이 동남아와 엇비슷하다는 얘기다. 지금도 일본 극우들은 “한국은 2000년간 중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1910년 한일합방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한국은 자주권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불쾌한 느낌을 전달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국에 만주 역사를 빼앗기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충실히 좇다보면 한국사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다행히도 한류가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를 따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국의 역사가 중국과 일본과 다르며 문명 역시도 명백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7일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 도중 시위대가 중국을 반대하는 구호를 들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중국 주위의 동병상련: 대중은 혐중, 정권은 쩔쩔

중국과 국경을 맞댄 국가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대중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반중 감정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몽골에서부터 시작해 북한, 미얀마, 베트남, 등 중국과 접경국 가운데 중국과 크게 척지지 않은 나라는 ‘파키스탄’ 정도가 유일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 정도로 중국의 부활과 급성장은 인구도 적고 영토도 작은 중국 주변국들에게는 단순한 위협을 넘어 민족의 존망까지 걱정을 끼치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권력을 쥔 세력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중국의 존재감에 전전긍긍하거나 적당한 타협책을 모색하느라 쩔쩔 매기 마련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룡 앞에 당당한 주권 외교는 정말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현재 비극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미얀마의 불복종 운동’의 핵심 갈등 역시 마찬가지다.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적개심도 적지 않지만 미얀마 민중들은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군부를 후원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좇는 중국에 대한 혐오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다. 티베트와 홍콩 및 신장위구르가 단지 중국 내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문제의식도 은연중에 깔려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미얀마나 몽골 북한과 같은 중국 접경 나라들의 반중 감정을 단순하게 ‘혐오’의 감정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미얀마 사태를 미시적으로 하나하나 따져 들어가 보면 딱히 ‘중국 책임론’까지 진지하게 물을 정도로 뚜렷한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조선구마사> 사태와 마찬가지로 중국 냄새는 강하게 나지만 그렇다고 실체나 책임소재 역시 뚜렷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즉, 중국의 돈과 힘에 기대고 싶은 미얀마 군부가 있다는 얘기고 한국의 드라마 산업도 그와 비슷한 논리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논리로 살펴보면 현재 아시아에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유령이 떠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국 문명이라는 공포는 역사적으로 주변국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위협과 함께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A선배와의 대화와 문명론으로 다시 돌아와 본다. 최근 한국사회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반중(反中)’ 정서는 중국을 문명으로 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혐오’의 감정인가, 아니면 너무나도 위협적인 중국에 대한 ‘공포’의 정서일까? 현재는 이 두 가지 감정이 모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감정 모두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문명의 중심에 서본 적이 없던 한국에게는 조금은 충격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중심’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 해도 지금의 경제대국과 민주주의국가로 오기까지 개발도상국→국민소득 증가→ OECD 가입→G7로 승격과 같은 서구권의 평가와 초대에 목을 매야 했었다.

그런데 중국의 업그레이드 과정은 한국과 달랐다. 압도적인 인력과 영토 그리고 역사의 힘을 바탕으로 문명적인 힘을 발휘해 G2의 위치에 가뿐하게 올라섰다. 동시에 베이징과 상하이에는 (제도와 철학적인 논란은 있다고 해도) 서울보다 더 세련된 마천루와 지하철과 고급차 등 이른바 문명적인 신문물이 즐비해졌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제 어떤 문명의 관점으로 21세기 중국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공포와 혐오를 넘어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단순히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21세기 최대 숙제인 셈이다.


정호재/ 아시아연구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에서 짧지 않게 기자생활을 했다. 아시아 각국을 두루 답사하며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번역서로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비즈니스》, 《수상이 된 외과의사-마하티르 자서전》이 있으며, 최근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