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셔터스톡)

“정보와 자금의 흐름이 동기화돼야 거래 감시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지난 25일 국제결제은행(BIS)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중국인민은행의 한 간부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전 세계적 유통과 정보교류, 감시 등을 위한 국제규칙을 제안했다는 것이다.CBDC는 중앙은행이 법정 통화처럼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이를 상용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미 수차례 자국 내에서 디지털 위안화 사용 시험을 진행해왔다.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인민은행 산하 디지털화폐연구소의 무창춘(穆長春) 소장은 BIS 세미나에서 “정보와 자금의 흐름이 동기화돼야 거래 감시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켰다. 무 소장은 “우리는 블록체인처럼 분산원장기술(DLT)이나 다른 기술로 뒷받침하는 외환 플랫폼도 제안한다”면서 “국제통화 시스템의 안정과 건강한 발전을 뒷받침하려면 전 세계 중앙은행에 의해 적정한 공급이 있어야 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로이터는 무 소장의 주장에 대해 “달러화가 지배하는 국제 금융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나아가 중국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분야에서 계속 선두를 지켜나가면, 장차 미 달러화에 대한 세계경제의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달러화의 위상이 지금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하지만 로이터의 분석과 전망은 상당히 피상적이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점을 간과했다. 만에 하나 국제금융질서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달러화의 위상변화 때문이 아니다. 금융 통신체계의 변화 때문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이 구상하는 것은 서양이 구축한 현재의 중앙집중형 금융 통신체계의 변화다. 즉 금융 통신체계를 1970년대 이전의 다원주의 혹은 무정부 상태로 환원해 미국의 우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중국이 다른 나라의 동참과 협력을 얻어야 한다.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우리나라에게는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 달러화의 장래

지난해 중국인민은행은 10만 명의 ‘인민’들을 추첨하여 2만 위안씩의 CBDC를 발행한 뒤 실거래에서 어떻게 사용되는 지를 실험했다. 미국은 그런 실험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 연준은 법률상 일반 기업과 개인에게서 예금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미국 시민에게 CBDC를 발행하려면 연준이 먼저 예금은행에게 발행하고 예금은행이 다시 일반 예금주들에게 보급하는 이중구조를 취해야만 한다. 현재의 인터넷뱅킹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 연준은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보다 CBDC 발행의 법적 제약이 크다. 그러나 미 연준이 좌불안석하지는 않는다. 미 달러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는 것은 휴대의 편리성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의 편리성이 달러화 수요와 위상을 결정한다면, 70년 전 신용카드가 보급될 때 달러화의 위상이 한 차례 추락했어야 한다.

CBDC의 장점 중 하나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송금하기 편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별것 아니다. 각국의 은행과 선불카드 업자들이 이미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그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면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겠지만, 불공정 경쟁과 혁신의 저하라는 부정적 효과도 커진다. 중앙은행들이 다른 군소 상업은행들과 수신 경쟁을 하던 1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은행업이 질식할 것이다. 그것은 금융의 발전이 아니라 후퇴다. 결론적으로 CBDC가 현재의 화폐제도와 질서를 크게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중국인민은행 디지털화폐연구소의 무창춘 소장. (사진=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연합뉴스)

국제 금융통신체계 흔들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BIS세미나에서 무 소장의 발언은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는 “외환거래에서도 블록체인기술 등을 활용하여 감시가 가능한 투명한 플랫폼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We also propose a scalable and overseen foreign exchange platform supported by DLT or other technologies)고 했는데, 이것은 굉장히 폭발성이 있는 발언이다.

지금 전 세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외환거래 플랫폼은 SWIFT망이다. SWIFT망이란, 벨기에에 본부를 두고 있는 SWIFT사가 운영하는 외환거래 플랫폼을 말한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해외로 외환을 보낼 때 우체국의 통신시설을 통해 은행들이 암호문을 주고받았다. 양자 간 통신시스템이었다. 국제금융거래가 폭증하면서 시스템에 부하가 걸리자 1970년대 후반 15개국의 200여 개 은행들이 외환에 특화된 SWIFT망을 구축했다. 중앙집중형 플랫폼이다.

초창기에는 연간 통신량이 1000만 건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1만 여 은행들이 연간 84억 건 이상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거기에는 북한의 은행들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SWIFT망을 빼놓으면, 국제금융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SWIFT가 현재와 같은 독점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 힘은 보안성에 있다. 2017년 방글라데시중앙은행의 컴퓨터가 해킹을 당하여 8,100만 달러가 털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조사한 결과 SWIFT의 보안망은 완벽했는데, 방글라데시중앙은행의 컴퓨터시스템이 해킹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SWIFT의 보안성이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벨기에에 본사를 둔 다국적 영리기업 SWIFT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 외교정책의 집행기관 역할을 한다.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2005년 대북 금융제재(마카오 주재 방코델타아시아 예금 동결), 2010년 이란에 대한 포괄적 금융제재, 2017년 중국 단동은행 제재, 2018년 라트비아 ABLV 은행 제재 등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은 모두 SWIFT를 통해 지급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SWIFT망에 참여하는 모든 은행들에게 고유번호(SWIFT code)가 부여되어 있는데, SWIFT사가 특정 고유번호의 메시지 송수신을 차단함으로써 해당 금융기관을 국제미아로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SWIFT사를 움직여 국제사회의 이름으로 북한과 이란 등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금융제재를 받는 나라에서 보자면 멀쩡한 자기 돈이 그림의 떡이 되므로 기가 막힐 일이다.

하지만 최근 발전하고 있는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한 개방형·분산형 플랫폼이 구축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시스템은 이론적으로 SWIFT망 이상의 보안성을 갖는다. 게다가 중앙집중형 플랫폼이 갖고 있는 단일장애점(single point of failure) 문제 즉, 중앙 컴퓨터의 장애로 인해 전 세계 은행들이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 시스템 정지 가능성도 없다. 통신망의 독점체제가 깨지면 송금수수료가 낮아지므로 은행이나 금융소비자들은 환영하지만, SWIFT사로서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미·중 금융 헤게모니 싸움에 낀 한국, 대책 마련해야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한 개방형·분산형 플랫폼은 주인이 없으므로 한 은행이 복수의 접속번호(code)를 갖는 것이 통제되지 않는다. 지금 비트코인 시스템과 똑같다. 자연히 자금세탁이나 불법자금 송금을 색출하기가 어려워진다. 금융 통신체계에서 무정부 상태가 도래되면 냉전시대에 성행했던 스위스은행의 비밀금고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중국이 제안한 대로 국제규약이 필요하다. 국제규약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지금 미국이 누려온 기득권은 약화되고 중국의 발언권이 훨씬 강해지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미국 행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SWIFT사를 내세워 집행했던 대북, 대이란 금융제재 등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외환거래 플랫폼의 구축은 새로운 국제금융질서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지위를 흔드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 있다. BIS 세미나에서 그 제안을 한 사람이 중국 인민은행 디지털화폐연구소 무창춘 소장인 점을 보면 그런 심증이 굳어진다.

무창춘 소장은, 저우샤오촨(周小川) 전 중국인민은행 총재의 심복으로서 CBDC나 블록체인기술의 전문가가 아니다. 현장에서 직접 만나본 무 소장은 금융시스템에 훨씬 관심이 많은 과묵한 행정가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확정된 사실만 발언하는 그가 개방형 외환거래 플랫폼 구축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공산당의 의지라는 것을 시사한다. 블록체인기술의 실험까지 마치고 실용화를 눈앞에 둔 단계에서 그 발언이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위안화 CBDC 발행보다 중국이 주도하는 외환거래 플랫폼 구축을 위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이것이다. 중앙은행이건 민간이건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그 결과물이 화폐(CBDC)가 될 수도 있고, 투자수단(비트코인)이 될 수도 있다. 그 성공여부는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화폐적 측면만 보면 미국의 위상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사회에서 미국의 위상 추락은 엉뚱한 방향에서 시작될 수 있다. 현재의 SWIFT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외환거래 플랫폼의 구축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어떤 명분으로든 제동을 걸 가능성이 크다.

지난 수년 간 우리나라를 곤란하게 만든 사드(Thaad)는 군사망이고, 쿼드(Quad)는 외교망이다. 거기에 비해 SWIFT는 금융망이다. 그 셋의 공통점은 동맹 또는 참가자가 많을수록 힘을 받는 네트워크라는 점이다. 블록체인기술을 이용한 SWIFT의 대체재 구축을 두고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서로 동맹을 확보하려는 경쟁구도를 만들기 쉽다. 사드나 쿼드 문제처럼 우리가 힘들어질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긴밀히 협조해 현명한 대응방향을 찾아야 할 시점이란 의미다.


차현진 필자

금융전문가. 서울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와튼스쿨에서 공부했다. 대통령비서실, 미주개발은행(IDB)과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을 거쳤다. 저서로는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