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 선거운동 첫날인 지난 25일 여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후보들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서울시장 후보인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사진 아랫줄 왼쪽부터 부산시장 후보인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후보와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 (사진=국회사진기자단/연합뉴스)

4월 재보궐 선거를 시작으로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1년 여동안 정치인들의 시간표는 숨가쁘게 흘러갈 예정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는 이른바 진영간의 갈등만 부추키고 나아가 '정치적 내전'만을 고착화 시킨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헌기 필자는 <추월의 시대>를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를 넘어서는 시대담론을 주도한 80년대 생 중 한 명이다. 하 필자는 협치와 통합을 매개로 공화국의 이익 추구를 본령으로 하는 정치가 실종된 현실을 개탄한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제3세력 논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하 필자가 정치인들에게 원하는 것은 본인들의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이를 위해 도전을 감행하는 모습이다. 설령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실패가 결국은 유권자들을 감동시켜 당대 한국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편집자]

#한국 정치 '이분법' 고착화 상호 '적'으로 규정, 협치 논의 막아#갈등조정 통한 사회통합 요원 제3세력 등장해도 한계 봉착#정치구도 변화 없이 발전 한계 노무현의 부산 도전, 되새겨 봐야

한국 정치를 헌법만큼이나 강하게 구속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분법’이다. 교과서적 의미에서 보면 정치의 본령은 갈등조정 기능을 통한 사회통합에 있지만, 한국은 어느 정당이든 핵심지지층이 협치나 통합 같은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다. 정치에 과몰입한 핵심지지층이 상대 당파를 공화국의 일부인 사회구성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어서다. ‘토착왜구’나 ‘종북빨갱이’와 같은 성마른 단어들이 그 점을 증명한다.

이때에 ‘적’은 소통 상대가 될 수 없으며, 소탕해야 할 대상이 된다. 따라서 한국 주요 당파의 핵심지지층들은 ‘적’에게 손을 내미는 협치를 투항으로 받아들인다. 각 정치 세력들은 이러한 핵심지지층의 정서를 거스르기 힘들다.

그래서 영화 <대부1>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의 대사인 “솔로조와 협상하라고 하는 이가 배신자이다”가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인용은, 한국의 정치가 갱스터들끼리의 다툼만큼이나 적대적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여의도 일각에선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적 내전’ 상태에 처해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종종 나온다. ‘정치적 내전’의 상황에서 각 정치세력은 헌법적 정당성 못지않게 지지층으로부터 정당성을 확보받아야 정치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고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주요 당파 핵심지지층 '이분법' 주도

이런 상황이 던져주는 근본적인 문제는 공화국 전체의 이익과 각 정치세력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화국 전체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집권세력이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집권하지 못한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정된 국정운영이나 개혁의 성공은 본인들의 실패와 같은 말이 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집권세력이 국정운영을 잘할 경우, 그들에게 정권 탈환의 전망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집권세력이 실패해야 대안세력으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야당은 집권여당의 성공에 협조해야 할 유인보다는 흠집을 내어야 할 유인이 압도적으로 더 크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 제1야당이 정권이 하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비토하는 이유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선 야당의 사사건건 비토 역시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코로나19 같은 공동체의 위기에서도 정부의 방역정책에 비토를 하며 백신접종을 왜곡하려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집권세력 역시 야당의 본심을 잘 안다. 정도의 차이, 선정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인들도 야당일 때는 비슷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야당의 견제를 공화국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국정운영의 실패를 획책하여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만 도모하는 일이라고 치부한다. 실제로 그런 부분이 있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정부 여당은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하기가 어렵게 된다. 틈을 주면 곧장 야당이 자신들을 흔들 거라고 생각해 이는 곧 정권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모든 견제’를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와 등치 시키려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집권세력도 무오류일 수는 없다. 국정운영을 하다 보면 시행착오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고, 실책 역시 어쩔 수 없이 생긴다. 시행착오와 실책의 사이에도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또한 야당의 비판이 실책을 조장했는지 아니면 실책 자체를 제대로 비판했는지, 혹은 시행착오를 줄이는 건설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각각의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능성들을 고려할 때엔 설령 야당의 견제가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쉽사리 등치 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반대로 집권세력이 ‘공화국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만 도모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뒷전으로 밀려나는 공화국의 이익 

단지 ‘정권의 안녕’이 아니라 ‘공화국의 이익’이란 차원에서 보면 실책을 반성하고 국정운영의 방향을 수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권이 이러한 합리성을 보여준다면 야당의 비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 빈틈을 공략하여 야당은 ‘책임론’과 ‘심판론’을 들고 정권을 흔들기 시작할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보니, 한국 사회의 양대 당파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서로 상대를 ‘공화국의 이익’보다 제 ‘정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들이라고 여긴다. 이런 시선에서는 가치관의 충돌까지 나아가지도 못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당파는 가치를 추구하지만 상대 당파는 이윤을 추구한다고 몰아붙여서다.

한국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당파에 대해 붙어 있는 부정적인 ‘스티커 메시지’가 ‘탐욕’이라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당파에 대해 붙어 있는 부정적인 ‘스티커 메시지’가 ‘위선’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진보가 보수를 해쳐먹는 집단이라고 공격할 때, 보수는 진보를 겉과 속이 다르며 뒤로 해쳐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3세력을 자처하는 이들, 중도파를 논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까. 물론 그들은 거대 양당 모두가 자기 정파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집단이므로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흔히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들고 나오는 가치 역시 정치의 본령인 ‘통합’의 관점은 아니다. 그보다는 ‘중립’에 가까운데, 본질적으로는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하기에 양 당파의 시민을 아우르기는커녕 그들 모두를 경멸하고 배제하려는 행위로 향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공하기가 힘들다. 거대 양당의 핵심지지층들이 그들의 노선을 긍정하고 이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이 집권하기 위해선 조금씩 노선을 변경하며 그때그때 양 당파에 포섭되지 않은 이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까지 노선이 불분명하고 핵심지지층도 존재한 바가 없어 실패하곤 했다.

사실 이른바 중도파가 원하는 것은 거대 양당의 중간지대 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위에서 앞서 서술한 ‘공화국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선’을 갈구하는 것이다. 집권세력이 잘못했을 때엔 실책을 인정하고 방향을 수정할 줄 알기를 바라고, 야당은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견제하고 더 나은 대안을 내놓는 집단이 되기를 원한다. 그 사이에서 ‘공화국 이익’에 더욱 부합할 세력에게 표를 주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갈망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정치세력이라기보다는, 그 정치세력들을 규율할 새로운 게임의 문법, 더 합리적인 경기규칙이다.

통합적 관점의 소멸, 정치적 내전 반복

그 규칙, 혹은 문법이 부재한 지금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비리가 연일 드러나도, 유권자는 정부 여당이 제 실책을 인정하지 않으면 정부 여당을 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곤 가장 당선 확률이 높은 반대파에 표를 던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현재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 정국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상황이다.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상대 후보의 비리가 훨씬 더 많은데’라고 생각하겠지만 가령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여당에 대해 시민들의 마음이 차가워져 있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계속 뻣뻣한 자세를 고수하면 그들에 대해 ‘공화국의 이익에 부합하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는 셈이다. 막상 집어 든 회초리의 상태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절망하기도 하고 신음하기도 한다.

그렇게 통합적 관점이 소멸한 상태에서 선거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패배한 정치세력과 고관여층은 ‘저들이 저렇게 나쁜데도 불구하고, 혹은 저들이 저렇게 무능한데도 또 권력을 주다니 아직 국민들이 정신을 못 차렸다’는 식으로 ‘국개론’(국민개XX론)을 설파한다. 경쟁에서 패배하면 위기의식을 가지고 변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적 내전 상태가 심화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유권자 그룹이 정말로 그토록 이분법적으로 양극화되어 있고 답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지난 21대 총선의 정당 지지율을 기준으로 본다면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33.35%였고 당시 미래통합당은 33.84%였다. 여권 계열 정당으로 취급받는 열린민주당의 5.42%까지 합산할 경우에도 38.77% 대 33.84% 정도의 격차다. 그러나 의석수 비율을 살펴볼 때는 친여계 정당의 의석수가 180석으로 60%에 육박했다. 의석수 기준으로 볼 때 미래통합당은 34.3%였다.

의석수만 보면 국민의 절대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민주당에서도 국민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고 홍보했다. 자신들의 정치 행위가 국민 다수의 열망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사람들의 의중을 잘못짚은 것이었으며,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착각한 행위였다.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아닌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약 20%를 뒤지는 여론조사 결과에 당혹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당혹감 역시 기존의 상대평가의 지형도가 극적으로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정치의 불합리한 구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연정을 추구했고 임기 말까지 이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핵심지지층이 이탈하면서 위기를 초래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한 3당 합당과 DJP연합은 당시 공고했던 지역주의의 연합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하며 이 문제를 돌파하려고 했지만 역시 한계에 부딪혔다. 그것은 패권주의나 야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핵심지지층을 유지했지만 그에 비토하는 강한 반대층을 형성시키는데 일조했다.

평범한 사람 설득에서 현실정치 시작

여기까지 말하면 개헌론자들이 등장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말하며 내각제를 추진하거나, 대통령 4년 연임제나 중임제로의 이행을 말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경기규칙에 있다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응일 것이나, 유권자들(특히 양 당파의 행태에 부정적인 중도층들)은 개헌론을 여의도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분점의 시도 정도로 파악하고 민생경제 노선을 중요시 여긴다.

또한 개헌론자들은 다소 이상주의적으로 내각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으나, 한국 유권자들의 역사적 경험과 경로의존성을 봤을 때 대통령제에 대한 지지나 그 효용 역시 그리 쉬이 무시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바꾸지 않고 본인이 바뀌면서 그 평범한 사람들을 설득해 가면서 세상을 바꿔내는 것이 현실정치일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하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한국 정치인의 행동강령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정치지형에서 상실된 ‘공화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줄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 본인에게 일정 부분 손해가 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것둘째, 그 행동의 일환으로 민생을 위한 정치노선을 추구할 것셋째, 그러면서도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게임의 룰’을 전환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본인의 노선에 동의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당파를 포괄하여 개헌연대 등 제도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서 성취할 것
2000년 총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 출마를 소재로 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중 한 장면(사진=인디스토리)

모순적이고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일 수도 있다. 그러나 87년 대선 이후 지역주의가 그토록 강고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부산에 세 차례나 출마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생각해본다.

'정치의 본령' 보여줬던 노무현의 부산 도전 

노무현은 지역감정에 따른 분열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이자 국가발전의 장애물로 봤다. 이를 극복하고자  노무현은 YS의 3당통합 이후 부산에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야당 후보로 시장과 국회의원 등 총 세 번의 선거에 나가 낙선했다. 이후에도 노무현은 당대 정치의 가장 큰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발견해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면서 세상을 바꿨다. 지금의 세상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때 그가 대면했던 지역감정 문제들은 상당히 완화되었다.

결국 오늘날의 정치적 과제도 저 위의 문제들을 집약하여 ‘당시의 노무현처럼 오늘날의 상황에서 부산에서의 선거에 도전한다는 것’이 어떠한 행위인지를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다시 정치의 본령으로 돌아가 민주공화국 정치인들의 궁극적 목표는 공화국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기 위한 통합에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거나 양당에 대한 혐오에 기반한 제3세력의 등장을 반복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이를 타개할 방법과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특히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방법과 대책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하고 기존 체제의 유지만을 목표로 한다면 공화국 전체의 이익은 갈수록 요원해진다. 이런 상황이 고착화될수록 추격을 넘어 ‘추월의 시대’에 돌입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정치인 자신들이 될 것이다.


하헌기 필자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 국회에서 일하다가 양극화된 정치적 소통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었다. 뉴미디어 운영과 기성 방송 매체 출연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매주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공저로 ‘추월의 시대 (메디치미디어)’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