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사진=연합뉴스)

정치권 관찰과 분석에 빼어난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차기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이 시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자격'을 다시 환기했다. 윤 전 장관은 최근 국회 여당 관계자들의 초청으로 진행된 특강에서 'Statecraft(통치술)와 현 정치상황‘을 주제로 한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을 두 시간 가량 가졌다. 이에 앞서 윤 전 장관은 2011년 메디치미디어에서 발간된 <대통령의 자격>을 통해 당시 대통령직에 도전할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능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10년 만에 비슷한 주제를 꺼내든 윤 전 장관은 이날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자 자질로 ‘공공성에 대한 투철한 의식’과 ‘민주주의 가치의 내면화’를 제시했다. 그런 측면에서 YS나 DJ의 한계를 지적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새롭게 평가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아울러 오는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후보들에 대한 평가도 곁들였다. 윤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면서도 "현 시점에서 보면 촛불혁명 에너지를 갖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날 강연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감을 꼭 짚어 말하지 않았지만 유권자들이 참고할 만한 정치적 행보나 주요 자격, 경력 등을 언급한 게 특이했다. 또한 진보진영이 중요시한 복지와 환경이 내년 대선의 시대적 가치가 될 것으로 전망하며 이에 대한 보수의 대안을 물었다. <피렌체의 식탁>은 '선거의 시간'을 맞아 윤여준 전 장관의 강연과 질의응답을 요약·정리해 전한다. [편집자]

#정치계 원로 윤여준 前 장관  차기 대선의 대통령 자질 제시#공공성에 대한 투철한 의식  민주주의 가치의 내면화#국민과 소통 창구인 여당 활용  사적관계서 벗어난 인재 등용 필요#촛불 에너지 활용 못해 아쉬워  시대적 가치엔 보수, 진보 없다

제가 10년 전인 2011년에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자격>(사진)이란 책에서 Statecraft를 꺼낸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기에 차기 대선에서는 대통령의 성공을 위한 담론을 만들어보자는 동기에서였다.

책을 쓸 때 정치학 원로 교수들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Statecraft는 정치학 이론만 갖고 안 되고 현실정치를 많이 알아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학자들이 자신하지 못했다. 미국도 프레지던시(presidency, 대통령직)에 대한 관점은 많은데 통치술에 대한 책을 찾기 어려워 ‘Statecraft’를 주제로 <대통령의 자격>을 냈다.

직역을 하면 Statecraft는 통치술이다. 통치술이라고 명명하면 너무 성리학적인 거 같아서 ‘치국경륜’으로 표현했다. 치국경륜에는 여러 가지 능력이 수반된다.

시대적 과제를 제시하는 능력, 이른바 비전 제시 능력이 필요하다. 정책을 만들어낼 능력과 제도관리 능력도 포함된다. 국정은 제도를 통해 이뤄진다. 인사 능력은 여러 가지 능력 가운데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중견국가이고 남북 분단 상황이다 보니 외교능력도 필요하다. 여기에다 한국 대통령은 북한관리 능력을 갖춰야 한다.

현 시점에서 보면 2022년에 등장할 대통령은 아무래도 IT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문명사적 전환기를 준비해야 한다. 전환의 속도는 코로나19 때문에 더 빠르고 더 급해질 것이다. 뉴노멀(new nomal)이 오고 뉴스탠더드(new standard)가 등장할 것이다. 이런 시대를 넘어가기 위한 브릿지 역할을 할 국가 통치자가 필요하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울 것이기에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걱정도 많다.

치국경륜은 그런데 능력만 갖고서는 안 된다. 능력을 떠받쳐주는 두 가지 기초소양이 있다. 흔히 국내 최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를 볼 때 그 모습에 누구나 찬탄하지만 건물 기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건설업계 사람들 말로는 초고층 빌딩을 짓는 것은 결국 기초를 어떻게 다지느냐에 좌우된다고 한다. 즉 기초가 높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기초소양이 뒷받침돼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초소양이 없으면 오히려 능력이 역기능을 하게 된다.

기초소양 중 하나는 첫 번째로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어 있어야 한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이끈 히딩크 감독이 부임 후 처음 한 게 선수들의 체력훈련이었다. 통치능력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긍정적 작용이 가능하다. 역대 대통령의 부정평가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는 공공성이란 쉽게 생각해서 국민 전체, 국가를 위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공공성을 지키고 봉사해야 하는데 그런 공공성이 아닌 특정 기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벌 공화국’, ‘삼성 공화국’이란 말을 예사로 말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공정한 자유시장질서가 훼손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핵심인 공공성도 훼손된다. 그래서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을 보면 자본이 국가를 접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벌이나 개별 기업을 나쁘게 보려는 게 아니라 자본 때문에 공공성 가치가 위협을 받아서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통령은 공공성의 상징적 존재다. 공공성을 지키고 가꾸는 게 임무다. 그렇게 하려면 투철한 공인의식이 있어야 한다. 공공성 가치를 습득하면 공인의식이 생기지 않겠는가. 공인의식이 부족하면 권력 남용, 정실 인사,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터진다. 불행하게도 역대 대통령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가운데 MB는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공공성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공공성 자체가 없었다. MB 때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란 비난을 받았다. 내각을 구성할 때 개인적 인연을 따라 인사를 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실패가 예견됐다. (MB의 측근들을 겨냥해) ‘만사형통’,’방통대군’ 같은 말들이 나왔다. 마치 조선의 왕처럼 생각했다. (퇴임 후 사저를 마련하기 위해) 내곡동에다가 땅을 살 때 자기 돈으로 사는 건 싸게 사고, 국가가 사야할 곳은 비싸게 샀다. 아프리카 추장도 그러진 않는다. MB는 공공성과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라 평가하기도 부끄럽다.

박근혜의 경우 공공성은 있었지만 그 공공성이 국가주의에 함몰됐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요시 않고 아예 국가우선주의였다. 취임 100일 이후 박근혜의 발언을 분석해보니 국가만 계속 반복했다. 국가에 너무 빠져 있어서 공공성이라고 말하기 팍팍하다.

국회의사당 전경. (사진=연합뉴스)

두 번째 기초소양인 ‘민주적 가치의 내면화’는 단순히 민주주의를 제도나 체제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이나 문화로 이해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제도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YS와 DJ는 민주화 투사였음에도 ‘제왕적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다.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지 않아서다.  군사독재와 싸우다보니 그런 면이 있다고 이해할 측면은 있겠지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두 대통령이 ‘제왕적’이란 평가를 받았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내면화되지 않으면 대통령이란 직(職)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국가의 위계적 질서 속에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동료 중에 1인자라고 이해해야 한다. 동료들이 마치 목마를 태웠다고 할까. 대통령 본인이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수직적 위계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집단이고, 정당도 집단이니까 집단 의사결정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제왕적, 자의적 통치행태가 나온다.

대통령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결국 의회정치를 무시하기 쉽다. 야당을 국정 동반자로 삼지 않고 적대적으로 본다.

다선 의원 출신의 YS와 DJ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의회정치를 무시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 하는데도 만날 국회에서는 야당이 비판만 한다”는 볼멘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당은 다수당이 되려고 선거 때마다 무리하게 된다. 여당이 다수당이 돼 국회를 장악하고 수적 우위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야당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맞서서 국회가 공전되곤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와 통합의 가치를 중시했지만 그게 잘 안 된 이유는 국내 정치의 전통적인 이유들이 있어서 그렇다. 협치와 통합. 이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의회정치 원리를 지키면 협치와 통합은 절로 이뤄진다. 정당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는 헌법적 기능을 한다. 그래서 국가가 정당을 육성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각 정당은 자기를 지지하는 국민을 대변한다. 그러다 보면 갈등이 생기는데 이를 조절하는 게 대화와 타협이다. 이후에는 다수결 과정이 진행된다. 국회에 와서 갈등을 일으키고 표결하고 이런 과정이 길게 진행되는 게 협치다. 그래서 의회가 국민통합의 전당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과정이다. 즉 의회정치의 원리를 잘 지키는 게 협치와 통합인데 문 대통령이 이를 다른 것처럼 말해서 혼란이 생겼다.

대통령과 국민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한데 대부분 기자회견을 중시한다. 제가 보기에 소통의 가장 큰 통로는 집권여당이다. 집권여당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다. 대통령은 집권여당을 통해 국정방식을 끊임없이 알리고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이게 가장 넓은 통로다. 그런데 집권당을 왜소화한다. 대통령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정당생활을 오래한 분이 대통령이 되면 이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질 것으로 본다. 한국의 국회는 늘 국민 지탄의 대상이다 보니 대통령선거를 할 때가 되면 각 정당은 지탄의 현장에 멀리 있던 분을 데려오려는 움직임이 반복됐다. 이런 분들은 정당에서 성장한 분들이 아니다. 대선 후보가 돼 선거를 치르면 정당 중심이 아니라 캠프 중심으로 치른다. 대통령이 되고 나선 정당보다 캠프 출신이 더 많이 등용된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이 집권여당을 존중해주고 다리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진정한 소통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편하다. 집권당이 다 해주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훨씬 편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데 역대 대통령들이 이걸 다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권력이 약해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건 협소한 생각이다. 집권여당을 활성화하고 위상을 높여줘야 국정운영이 훨씬 편해지고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일 텐데 역대 대통령들이 이것을 잘 하지 못했다. 늘 이 지점이 아쉬웠다.

공공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 민주주의 가치의 내면화, 두 가지 소양이 충분하면 국정수행능력을 높이기 위해, 좋은 인재들을 발탁해서 도움을 받으면 된다. 적재적소에 맞는 인재를 찾아보면 소수겠지만 나와 인연이 없건 있건 그에 맞는 사람이 있다. 역대 정부에선 이게 잘 안 됐다. 능력은 남의 걸 빌릴 수 있지만 두 가지는 빌릴 수 없다. 차기 후보들의 자질을 뜯어 볼 때 두 가지를 훨씬 중요하게 봤으면 좋겠다.

◇질의응답

▲2022년 3월 대선은 어떻게 전망하는가?

-대선에 대해서는 요즘 무슨 문제든 예민하게 뜯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와 별개로 염려되는 지점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쨌거나 국민적 지지도가 높다. 임기 1년을 남겨 놓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 정도는 드물었다. 그런데 요즘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지휘계통이 있고 대통령은 그 정점에 있다. 그럼에도 민정수석 사퇴 등의 과정에서 대통령 패싱(passing) 이야기가 나오고 청와대는 명확히 해명도 하지 못했다. 저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제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실세가 누구니, 이런 말을 듣는데 이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전이었던 2016년 12월 10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7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이 지녀야 할 능력 중 인사능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느 진영이 정권을 잡든 인재풀이 좁고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은 인사권자다. 결국 대통령이 인재를 구하는 원칙에 달렸다. 저도 청와대 근무를 하면서 개각 명단 작성에 참여했었다. 복수로 명단을 올려야 하는데 단수를 찾기도 어려웠다. 언론사 인명사전을 다 찾아봤다. 두세 명을 못 뽑아낼 정도였다. 사람 고르는 게 그만큼 어려웠다. 넓게 사람을 찾아보면 분야마다 능력이나 도덕성 측면에서 괜찮다는 사람이 소수이나마 늘 존재한다. 그런 사람을 쓰면 먼저 그 부처의 공무원들이 인정한다. “장관할만한 사람이 왔다”는 평이 돈다. 그러면 민심이 모인다. 청와대 있을 때 보니 장관 하나 잘 쓰고 못 쓰는 것 때문에 민심이 확 변했다.인사가 그렇게 중요한데 대통령은 그렇게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 본인이 아는 사람으론 한계가 뻔하다. 대통령이 “사람을 넓게 찾자. 좋은 사람을 찾아보라”고 강력히 요구하면 민정수석이든 인사수석이든 찾아 낼 것이다. 그래서 늘 사람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대통령들이 그렇게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상당기간 안 고쳐질 것이다. 대통령 주변의 가까운 이들이 천거하는 경우가 많은데. 친소 관계로 천거하면 망한다. 대통령이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적재적소 인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개선할 방안이 있다면?

-사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다만 정치현상 분석할 때 저는 행위자의 문제를 중시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습득할 기회가 별로 없다. 유럽이나 미국은 정당에서 10대부터 당원을 받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양성한다. 지방의회부터 상원까지 정당에서 성장을 해야 정당정치를 습득하는데 한국은 그런 과정이 전혀 없다.개인적으로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의무적으로 정치관련 교육을 받도록 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헌법이 잘못 돼서 문제가 일어나기보다 정치 행위자로 인해 문제가 일어난다. 정당이 인재를 기르는 과정에서 공공성 가치, 민주주의도 내면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에서 공천을 해보니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숙한 민주주의를 한다는 유럽도 여기까지 오는데 300년 걸렸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1987년 이후로 생각하면 그리 낙담할 일은 아닌데 국가 상황이 녹록치 않으니 문제다.

▲그러나 대통령이 야당과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다 보면 “일을 안 하고 무능하다. 성과가 없다”는 비난과 비판을 받는 게 현실이다.

-MB가 “4대강 사업은 심사숙고를 한 만큼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MB도 나름 애국심으로 한 거라고 생각은 한다. 그렇지만 찬반 토론도 않고, 효율성을 내세워 예비타당성 조사를 건너뛰어 지금까지도 말썽이다. 민주주의는 시간의 비용이 드는데 역설적으로 그 과정을 거쳐야 효율적이 된다. 지나치게 효율성을 내세워 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을 생략하면 더 큰 비효율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대통령 단임제라는 제도 탓도 없진 않다. 그러나 무엇이 더 효율적이냐고 궁극적으로 따져 보면 결국 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이 더 낫다고 본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현 시점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국정 에너지를 어디서 끌어내는가. 정권 초반기에는 남북관계 급진전으로 앞에서 끌고, 소득주도성장으로 뒤에서 밀어가려는 거 같았다.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 에너지를 갖고 무엇을 하려 했을까? 솔직히 말해 지금도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 어젠다를 잘 모르겠다. 소득주도성장이 무너질 때 정권이 갈팡질팡했다. 너무 성공을 확신한 나머지 다음 대안을 만들어내지 않았구나 싶었다. 정책이란 게 앉아서는 이상적인데 막상 해보면 안되는 게 많다. 너무 준비 없이 혁명적 상황에서 등장한 정권이 국정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걱정됐다.

촛불혁명은 어떻게 보면 국가가 개조할 때가 됐다는 반증이었다. 70년 동안 보수가 만들어 놓은 것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준비 없이 뜨거운 열정만 갖고서 집권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 있나 아쉽다. 개인적으로 애석하고 속상하다. 따지고 보면 보수냐 진보냐는 지금 관점에서 아무런 의미 없다.

중요한 가치는 복지와 환경이다. 코로나19 이후 상황을 보면 과연 진보만 고집할 어젠다인가 묻고 싶다. 아니다. 오히려 보수의 어젠다다. 국민복지 증진은 헌법 조항이다. 그런데 지금 보수라는 진영에서는 복지 증진을 걸고 넘어진다. 저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게 보수 당신들이야”라고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자꾸 저를 보고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저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다. 중도는 보수건 진보건 필요한 걸 가져다 쓰는 거다.

국민의당 안철수(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 허명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제113주년 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가온 서울시장 판세는 어떻게 보나?

-판세를 보려면 여론조사를 정밀하게 뜯어봐야 한다. 의식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조사를 봐야 한다. 사실 저는 서울시장을 누가 하는지 관심이 없다. 실제로 경기도민이기도 하다. 서울시장 선거 판세는 잘 모르겠고. 지금 여론조사도 잘 믿지 못하겠다. 아예 보질 않는다.

다만 과거의 안철수 현상은 국민이 스스로 만든 신기루다. 어느 자연인의 이름 아래 현상이란 이름이 붙은 건 처음이었다. 변화에 목이 탄 국민들이 만들어낸 신기루다. 저는 ‘저 사람은 아니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지금도 자기가 기대하는 변화가 안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안철수에게 기대하는데 그게 신기루다.

그리고 오세훈의 경우 2006년 서울시장 출마 당시 제가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었다. 오세훈 전 시장이 재선되고 난 다음 무상급식 문제가 나왔다. 저는 ‘이겨도 실익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매일 한다는 근거로 (무상급식 찬반 투표를) 밀어붙였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갖고 이른바 낙동강 전선 작전을 쓴 것이다. 사적으로는 박영선 후보와도 친한데 잘 모르겠다.

선거는 건곤일척 승부를 걸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면 그런 후보는 없는 듯싶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은 아마도 다시 안 나올 듯싶다. 그런 용기와 탁월한 개인기를 가진 정치인을 찾기 어렵다. 보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명예를 위해서 몸을 던지지 않는다. 이게 한국의 진보와 보수의 차이다.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1977년 박정희 정부 때 주일대사관 공보관으로 공직에 진출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으로 일했다. 2000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총선기획단장을 맡아 전국구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제갈공명’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기획위원장으로 활약할 때였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캠프에서 국민통합추진위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2016년 국민의당 창당 때 창당준비위 공동위원장을 지냈다. 요즘 제3후보로 각광받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는 같은 파평윤씨 친척 사이라고 한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뒤 윤여준정치연구원을 운영하며 정치개혁방안을 고민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