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베랑 프랑스 보건부 장관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백신을 맞는 장면을 일부러 언론에 공개했다. (사진=AFP 연합뉴스)

여럿이 모여 사냥을 떠난다. 사슴을 잡을 수도,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 사슴을 잡으려면 협력이 필수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하고, 한 명이라도 맡은 길목을 벗어날 경우 사슴 사냥은 실패한다. 반면 토끼는 혼자서도 잡을 수 있다. 사슴 고기의 양이 훨씬 많기 때문에 함께 사슴을 사냥하는 게 이익이다. 하지만 눈앞에 토끼가 지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망설임 없이 토끼를 쫓아간다. 자기 때문에 동료들이 사슴을 놓친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당장의 이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서 제시한 상황이다. 이 책에서 루소는 수렵채집사회의 인간이 경쟁과 협력에 대해 처음으로 어렴풋이 배우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당시의 인간들에게 앞일을 내다본다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먼 장래의 일을 걱정하기는커녕 당장 내일의 일도 생각지 않았다.”

선진국들의 ‘백신 사재기’와 제3세계의 분노

최근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둘러싼 전세계의 혼란을 보면서 루소의 ‘사슴 사냥’ 이야기를 떠올렸다. 역사상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백신이 개발됐고 접종이 시작됐다. 하지만 백신을 무기로 코로나19를 정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 듯하다. 백신의 효능과 비용, 생산 속도 등 여러 난관이 있지만, 당장 큰 과제는 ‘균등한 배분’이다. 백신이 잘 사는 나라에 먼저 가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은 순위에서 밀리고 있어서다.

특정 국가 사람들만 백신을 접종해서는 전세계에 퍼진 바이러스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이미 강력한 변종이 생겨 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세계 인구 75% 이상이 면역되어야 비로소 이 팬데믹이 끝날 거라고 한다. 그런데 선진국들은 자국민을 위해 인구의 두세배에 해당하는 접종분을 챙기고 있다. 제한된 백신 물량이 한쪽에는 넘치게 가고 다른 쪽엔 부족하다. 눈 앞의 토끼(자국민 접종)를 좇느라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이 되는 사슴(전세계 인구의 고른 면역)을 놓치는 상황이다. 루소가 묘사한 수렵채집사회의 인간 양태가 21세기에 펼쳐지고 있다.

각국의 백신 확보 및 접종 상황을 업데이트 중인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서 90억도즈 이상의 백신이 선주문(예약) 됐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잘 사는 나라에 돌아갔다. 백신 개발의 결과가 불분명했던 시기에 미리 큰 돈을 내고 연구를 지원한 대가로 백신을 먼저 받는 게 왜 잘못이냐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나라들이 실제 접종 인구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예약했기 때문에 제한된 물량이 고루 배분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캐나다와 영국은 인구 대비 3배 이상의 백신을 확보했다. 블룸버그가 공개한 자료에 따른 인구 대비 백신 확보 물량 왼쪽 표와 같다.

‘백신 이기주의’ 때문에 물량을 못 구하게 된 다른 나라 상황은 어떨까. 인구 대비 백신 확보 물량은 콩고민주공화국 10%, 남아공 6%, 탄자니아5% 등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백신을 이용한 집단 면역은 꿈도 못 꾸는 처지다. 남미는 아프리카보다는 좀 낫다. 아르헨티나 70%, 브라질 64%, 페루 38%, 콜롬비아 33% 등이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1월 26일 다보스 포럼 연설에서 이런 상황을 놓고 “세계 각지에서 백신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나라들을 제외시키고 이뤄지는 ‘백신 사재기’”라고 지적했다. 아프리카 지역 언론들은 ‘백신 아파르트헤이트(Vaccine Apartheid)’라는 말로 선진국들을 매섭게 비난하고 있다. 과거 남아공의 흑백 인종 격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처럼, 백신 공급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국제 기관의 우려도 크다.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이 상황이 “파멸적인 도덕의 실패”라며, “실패의 대가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명과 생계가 될 것이다. 코로나19는 장기화될 것이다”라고 1월 18일 말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한 병원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이 미국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EU-영국 간 볼썽사나운 백신 확보 싸움

선진국들의 입장은 어떨까. 제3세계와 백신을 나누기는커녕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유럽연합(EU)과 영국 간 볼썽사나운 기싸움을 보자. 백신 제조사 중 한 곳인 아스트라제네카가 올해 1분기에 EU에 공급하기로 했던 물량인 8000만도즈를 맞추지 못하고 3100만도즈만 공급한다고 통보한 게 발단이다. 벨기에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 차질이 생겼다는 이유다. 생산된 물량은 선착순을 근거로 영국에 우선 보낸다고 했다. 그러자 EU는 영국에 갈 물량을 EU로 돌리라며 반발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EU에 백신을 원래 계약한 양만큼 보내지 않으면, EU도 유럽 지역에서 생산된 백신을 영국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사실상 협박을 했다. 생산 차질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며 벨기에 아스트라제네카 공장을 긴급 방문하기도 했다.

EU는 ‘백신 무역 전쟁’ 가능성까지 들고 나왔다. 유럽 의회에서 보건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독일의 페터 리제 의원은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유럽의 기금으로 개발되고 유럽에서 만들어진 아주 좋은 백신(*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을 뜻함)을 접종받고 있다. EU 시민 중에 이렇게 질 좋은 백신을 영국으로 보내고 영국 백신 회사로부터 2등 시민 취급 받는 걸 좋아할 사람이 있겠나. 유럽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방법은 당장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 수출을 중단하는 건데, 그러면 우리는 무역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니 영국과 아스트라제네카는 재고하기 바란다.”

EU와 영국 간 갈등의 원인은 백신 공급 때문만은 아니다. 올해 1월 1일부터 브렉시트가 발효돼 영국이 EU를 떠났는데, 이후 양측 간에 빚어지고 있는 혼란의 한 단면이 백신 갈등으로 나타났다. 브렉시트가 아니었더라면 영국도 EU의 일원으로서 EU가 확보한 물량을 나눠 받았을 것이다. EU를 떠난 영국은 화이자-바이오엔테크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세계 최초로 긴급 승인하는 등 유연한 대응을 했다. 반면 27개국을 회원으로 둔 덩치 큰 EU는 재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확보한 백신을 회원국에 보급하고 접종하는 속도가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훨씬 느리다. EU 집행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리엔이 이 때문에 회원국의 엄청난 비난을 받는 중인데, 그 비난의 화살을 영국으로 돌리려다 일이 커진 것이다.

블룸버그가 공개한 접종 현황에 따르면 2월 15일 현재 77개국에서 1억7200만도즈 이상이 접종됐다. 매일 600만도즈의 접종이 이뤄지는데, 이 속도라면 전세계 인구의 75%에 2회 접종을 완료하는 데 5년이 넘게 걸린다. 각 나라별 인구당 접종 횟수(표)를 살펴보면, 영국과 다른 EU 국가들 간에 최소 4배 이상 접종 속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이 타들어가는 EU가 영국을 물고 늘어진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EU의 태도만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 전에 영국이 EU를 도발했다. 영국 집권 보수당은 트위터 공식 계정을 이용해 1월 12일 “(백신 접종에서)우리는 유럽 1위(We are no.1 in Europe)”라고 썼다. 1월 14일에는 “우리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을 합친 것보다 더 백신 접종을 많이 했다”는 트윗을 올렸다.(사진) 반-EU 타블로이드 신문인 데일리메일은 1면에 “아니, EU는 우리 백신을 가질 수 없어!(No, EU can’t have our jabs!)”라는 헤드라인을 실었다. 또다른 신문 데일리 익스프레스 기사 제목은 “차례를 기다려! 이기적인 EU가 우리 백신을 원하다니(Wait your turn! Selfish EU wants our vaccines)”였다.

다행히 이후 EU가 영국에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을 수출한다고 확약하고, 아스트라제네카도 EU에 보내는 물량에 900만도즈를 더 추가하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갈등이 일단락됐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던 유럽이 백신 우선권을 놓고 동네 꼬마들 싸움 수준의 갈등을 전세계에 생중계한 건 되돌릴 수 없다. 치러야 할 비용이 작지 않을 것이다. 미국 방송 CNN은 보도에서 ‘WHO가 두려워하던 추악한 백신 민족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평등을 자랑으로 여겨온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상황은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 누려온 ‘제1세계’의 자격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선진국을 동경하는 이유는 GDP나 복지 시스템만이 아니다. 난관을 타개하는 리더십, 강자의 희생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을 기대한다. 그런데 지구촌 공동의 위기를 맞아 이들이 모범을 보이긴커녕 이기적인 자국 중심주의로 갈등을 더 부추기고 있다. 심지어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 국제 백신 공동구매 및 분배 프로젝트)에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은 참가조차 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바이든 대통령이 참가 계획을 밝혔다. 미국은 백신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킨 다음에야 다른 나라와 나눌 거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고수했다.

중국의 ‘헬스 실크로드’, 제3세계로 뻗어나가다

흥미로운 건 인도, 러시아, 중국의 행보다. 다른 선진국들이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동안, 이들 나라가 개발하거나 생산한 백신이 제3세계 국가들에 대안이 되고 있다.

인도는 백신 개발국은 아니지만 세계 백신 물량의 60%를 담당하는 최대 생산국이다. 1월 16일 인도는 자국 백신 접종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 등 주변국에 백신 2000만도즈를 무상 지원했다. 심지어 3월에는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적국인 파키스탄에까지 700만도즈를 지원하기로 했다. 부탄 로테이 체링 총리는 “자기 수요를 만족시키기도 전에 나눈 것”이라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러시아 백신인 스푸트니크V는 최근 의학저널 란셋에 임상3상 결과가 실려 효능을 인정받았다. 현재 20개국 이상이 스푸트니크V를 승인했는데 그 중에는 EU 국가인 헝가리도 포함됐다. 멕시코는 스푸트니크V 2400만도즈를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아르헨티나도 스푸트니크V 덕분에 1월부터 대규모 접종을 시작하고 2월 중순에 학교 문을 열기로 했다.

중국은 백신 개발 경쟁에서 선두에 서진 못했지만 적어도 제3세계에 영향을 발휘하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 인도네시아의 위도도 대통령이 중국 백신인 시노백을 접종받았다. EU에 속하지 않은 세르비아가 EU 회원국들보다 더 접종률이 높은 건(100명당 10회) 중국에서 받은 시노팜 백신 덕분이다.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은 중국에서 백신이 도착하던 날 직접 공항에 나가 카메라 앞에서 중국 정부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가장 좋은 백신은 우리가 당장 쓸 수 있는 백신”이라는 세르비아 행정장관의 표현은, 백신의 ‘과학적 효능’이 아닌 ‘사회적 효능’을 강조한다.

중국의 백신 외교는 ‘헬스 실크로드(Health Silkroad)’의 일환이다. 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의료 분야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의도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3월 이탈리아 총리와의 통화에서 코로나19 대처를 도울 의료인과 의료 장비를 이탈리아로 보내겠다고 하며 ‘헬스 실크로드’를 언급했다. 지난해 5월엔 중국 백신을 세계와 나누겠다고 공언하면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가격’까지 장담했다.

‘공정’, ‘합리’라는 단어가 서구 국가가 아닌 중국 지도자로부터 나오는 건 낯설기도,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중국 백신의 효과가 아직 불분명하고 정보 투명성 등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이 중국의 움직임을 주시, 경계하는 이유다. 현대 중국에 관한 유럽 최대의 씽크탱크인 메릭스(MERICS)는 지난해 11월에 3회에 걸쳐 보고서를 내고 ‘코로나19 시대에 중국의 역할’을 분석했다. 중국이 ‘디지털 실크로드’와 ‘스페이스 실크로드’에 이어 ‘헬스 실크로드’를 내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이기적 균형’에서 ‘사회적 균형’으로

루소의 ‘사슴 사냥’으로 돌아가보자. 수학자들은 이 일화를 사슴 게임 이론(Stag hunt game)으로 발전시켰다. 두 명이 사냥을 한다고 할 때 그들이 사슴과 토끼 중 무엇을 고를지에 따라 네 가지 선택지가 나온다. (사슴, 사슴), (사슴, 토끼), (토끼, 사슴), (토끼, 토끼)가 그것이다. 이 중 상대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형성된 균형 상태, 즉 ‘내쉬 균형’을 이루는 건 (사슴, 사슴)과 (토끼, 토끼)다. 하지만 두 균형은 다르다. (사슴, 사슴)은 둘의 이익이 최대치가 되는 ‘사회적 균형’이고, (토끼, 토끼)는 적은 이익으로 각자 만족하는 ‘이기적 균형’이다.

현재의 자국 중심주의 백신 싸움은, 이겨봤자 손에 토끼를 쥐는 것으로 끝난다. 사슴 사냥에 협조하지 않으면 금세 또 배가 고플 것이고, 전세계 면역이 이뤄지지 않는 한 전염병은 계속 돌 것이다. ‘이기적 균형’에서 ‘사회적 균형’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뭘까. <사회계약론>의 저자답게, 루소는 ‘사회적 계약을 통한 강제적 협조’를 제시한다. 코로나19 시대에 맞게 풀이하면 코백스의 역할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입장차를 중재할 수 있는 국제 리더십, 자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끌어낼 수 있는 국내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차기 세계 리더는 자국 방역뿐 아니라 타국 방역까지 살필 수 있는 국가, 토끼가 아닌 사슴을 사냥하자고 설득할 수 있는 국가가 될 것이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