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최근 편집 2021. 05-18. 11:07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트럼프의 방어 논리를 허문 카리브海의 무명 정치인

by | 2021년 2월 15일 | 국제, 기획 · 연재, 박상현의 '리더의 말과 글'

스테이시 플래스킷(Stacey Plaskett)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 파견대표가 2021년 2월 10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의회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두 번째 탄핵재판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미국 현지시간으로 지난 13일 늦은 오후, 미국 연방의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두 번째 탄핵재판의 결과가 나왔다. 이미 한국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결과는 무죄였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탄핵소추를 당한 대통령의 유·무죄 여부를 법원이 아닌 연방의회, 좀 더 정확하게는 상원에서 투표로 결정한다. 물론 이 경우 표결을 하는 상원이 일종의 배심원 역할을 하게 되지만, 엄밀하게는 사법적인 판단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다.

이번 두 번째 탄핵 재판은 지난달 6일에 일어난 트럼프 지지 폭도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과 관련해 트럼프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에 걸쳐 진행된) 첫 번째 탄핵과 달리 전 세계인의 이목을 크게 끌지는 못했다. 민주당이 상원 의석수에서 우세하지만 상원 의장인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을 제외하면 정확하게 50대50으로 갈라져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럼프가 이미 대통령직에서 떠난 상태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미국 의회에서 ‘퇴임 대통령’을 탄핵하는 게 가능하냐는 논란 속에서 민주당이 탄핵을 추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권력의 3부(部), 입법·행정·사법부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삼권분립 체계에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의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을 선동(incite)한 행위는 단순히 정치적 반대세력 공격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법과 절차를 초월한 이런 공격을 처벌하지 않으면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출마를 막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현재 분위기에서 트럼프의 재출마를 걱정해야 할 사람들은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이라고 보는 게 맞다)

첫 번째 탄핵을 주도했던 애덤 쉬프 하원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 나와서 트럼프에 대한 유죄판결 필요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첫 번째 탄핵 때 상원이 대통령의 파면했더라면 지난 1월 6일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직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허용하는 셈이다. 이것이 이번 탄핵에 임한 민주당 의원들의 기본 자세였다.

하원 매니저에 발탁된 ‘버진 아일랜드’ 파견대표

미국 의회에서 진행되는 탄핵절차를 보면 ‘하원 매니저‘(House managers)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원 의석수에서 과반을 넘겨 대통령을 탄핵(impeachment, 우리나라의 탄핵소추에 가깝다) 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주도한 당 소속 의원들의 일부가 상원에 가서 유죄여부를 판단하는 재판에서 일종의 검사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을 하원 매니저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의회에 들어오기 전에 법을 공부하고 검사, 변호사 같은 경력, 특히 법정에서 변론을 해본 경력이 있는 의원들이 맡게 된다.

이번에 민주당에서 상원으로 보낸 하원 매니저들은 수석 매니저인 제이미 래스킨을 포함한 아홉 명이다. 이들은 모두 Representative(대표, 의원)라는 호칭을 갖고 있어서 (하원)의원으로 번역하기 쉽지만 이 중에는 조금 다른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스테이시 플래스킷(Stacey Plaskett, 54세)이다.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 제도(諸島)를 대표해서 하원에 파견된 사람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회 내 표결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의원이 아닌, ‘하원 파견대표(Delegate)’의 자격이다.
물론 그 이유는 버진 아일랜드 제도가 미국령(U.S. Territory)일 뿐 공식적인 주(state)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이와 비슷한 지역들이 있다. 워싱턴 D.C.와 괌, 미국령 사모아, 북 마리아나 제도에서 그렇게 파견대표를 보내고, 역시 미국령에 불과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비슷한 지위의 커미셔너(resident commissioner)를 의회에 보낸다. 이들은 표결권 없이 의회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번에 민주당은 트럼프를 기소하는 역할을 하는 하원 매니저 중 한 명으로 스테이시 플래스킷 파견대표를 임명했다. 이는 미국 의회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플래스킷이 주목을 받은 건 그런 역사적 의미 때문이 아니다. (미국 정치 덕후가 아닌 한 플래스킷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상원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인들이 플래스킷이 누구인지 찾아보게 된 것은 그의 논리 정연한 발언 때문이었다.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들로 구성된 하원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으로 눈에 띌 만큼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 대선 불복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평화적 항의’ vs. ‘개 호루라기’

스테이시 플래스킷의 발언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트럼프 측의 방어논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지난 1월 6일 백악관 앞에 모인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의회로 몰려가라’는 연설(동영상)을 했다. 그는 그래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은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민주당 쪽이 불법적으로 승리를 도둑질했다고 주장한 뒤 다들 의회로 몰려가서 “도둑질을 막으라(stop the steal)”고 부추겼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평화적으로, 애국적으로(peacefully, patriotically)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트럼프의 변호인들은 이 대목을 강조한다. 트럼프는 분명히 평화적으로 항의하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의사소통을 분석한 사람들은 이를 전형적인 ‘개 호루라기'(dog whistle·관련 기사)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개들은 들을 수 있는 호루라기처럼, 트럼프를 포함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겉으로는 무해한 듯 보이는, 즉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발언을 사용하되 서로 간에는 분명히 무슨 메시지인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 호루라기’를 사용하는 이유가 법적인 책임을 피하려는데 있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트럼프는 또한 연설 중에 “싸우자(fight)”, “죽기 살기로 싸우라(fight like hell)” 같은 말을 20번이나 사용(관련 기사)하면서 군중을 선동했다. 트럼프 측에서는 이를 두고 “싸우자”는 말은 정치인들이 항상 사용하는 말이라면서, 이게 물리적으로 의회를 공격하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싸우자”는 말을 사용하는 진보진영 정치인들의 동영상을 증거로 제시했다)

액면 그대로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트럼프가 이런 선동을 한 후에 지지자들이 몰려가서 바이든 선거운동원들을 위협, 공격한 사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논리는 성립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이를 분명하게 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 귀를 사로잡은 트럼프 ‘정죄 논리’

민주당의 하원 매니저들이 맡은 임무는 트럼프 측 변호사들의 그런 논리를 꺾는 것이었다. 비록 일반 배심원이 아닌, 정치적 투표를 하는 의원들이기 때문에 유죄선고에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도 하원 매니저들의 발언은 역사에 기록되는 ‘트럼프에 대한 정죄’라는 크나큰 의미를 갖고 있다.
트럼프는 무죄선고를 받고 빠져나가도 후세사람들이 읽으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사실과 거짓선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트럼프를 기소하는 하원 매니저들은 모두 제 몫을 충분히 해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귀를 가장 확실하게 사로잡은 발언은 스테이시 플래스킷에게서 나왔다. 그의 발언은 전체(동영상)를 다 들어보면 더욱 좋지만 이 글에서는 3분 남짓 분량에 해당하는 내용을 옮겨보기로 한다.

제 동료 매니저들이 여러분께 보여드렸고, 계속해서 보여드리려 하는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거를 저지할 수 없게 된 트럼프 대통령이 폭도로 하여금 이 나라의 의회에 쳐들어가도록 선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폭도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814년 이후 가장 잔인한 폭력을 미국 의회에 행사했습니다.
My fellow managers have shown and will continue to show clear evidence that President Trump incited a violent mob to storm our capitol when he ran out of nonviolent means to stop the election. Once assembled, that mob, at the president’s direction, erupted into the bloodiest attack on this Capitol since 1814.

의원님들 중에는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이 그렇게 폭도로 변할 것을 대통령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폭력은 예측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Some of you have said there’s no way the president could have known how violent the mob would be. That is false, because, the violence, it was foreseeable.

저는 이 폭력이 어떻게 예측 가능했는지를 보여드리려 합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에게 어떤 목적을 위해 싸우라고 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왜 다른지를 보여드리려 합니다. 1월 6일에 일어난 폭력은 그날 있었던 의회에 대한 공격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이 선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트럼프는 그 사람들이 어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고, 그런 폭력을 칭찬하고 부추기는 행동을 반복해왔고, 절대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I want to show you why this violence was foreseeable and why Donald Trump was different than any other politician just telling their fighters, their supporters to fight for something. The violence that occurred on January 6th, like the attack itself, did not just appear. You’ll see that Donald Trump knew the people he was inciting. He saw the violence that they were capable of, and he had a pattern and practice of praising and encouraging that violence, never ever condemning it.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이 공격이 비밀리에 계획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겁니다. 반란세력은 그들이 자신의 대통령이 맡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트럼프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의회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자랑스럽게 공개했습니다. 수사기관들은 이들이 포스팅한 내용을 봤고, 반란세력이 폭력을 사용해 의회를 공격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And you’ll see that this violent attack was not planned in secret. The insurgents believed that they were doing the duty of their president. They were following his orders. And so they publicized it openly, loudly, proudly, exact blueprints of how the attack would be made. Law enforcement saw these postings and reported that these insurgents would violently attack the Capitol itself.

(트럼프의 선동은) 단순히 공직에 있는 사람이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자고 한 발언이 아닙니다. 수개월 동안 폭력적인 집단을 부추기고, 그들의 폭력을 찬양하고, 그들의 폭력을, 그들의 분노를 이 의회로 향하게 끌어낸 것입니다.
This was not just the comments by an official to fight for a cause. This was months of cultivating a base of people who were violent, praising that violence and then leading that violence, that rage straight at our door.

핵심은 이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1월 6일 자신의 지지자 부대 수천 명을 행사에 불러들인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무장을 하고 있었고, 폭력적일 것이고, 실제로 싸움을 할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들을 불렀고, 그들이 어떤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걸 아는 상태에서 의회 건물로 행진하라며 “죽기 살기로 싸워 도둑질을 막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The point is this: by the time he called the cavalry of his thousands of supporters on January 6th and an event he had invited them to, he had every reason to know that they were armed, that they were violent, and that they would actually fight. He knew who he was calling and the violence that they were capable of. And he still gave that marching orders to go to the capitol and, quote, “Fight like hell and stop the steal.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트럼프 대통령은 그 날의 폭력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 폭력은 그가 의도적으로 부추긴 것입니다.
Make no mistake. The violence was not just foreseeable to President Trump; the violence what he deliberately encouraged.

#덧
결과적으로 트럼프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밋 롬니 등 공화당 상원의원 7명이 공화당 다수파 의견을 벗어나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의 편을 들어주었다. 유죄 57명, 무죄 43명으로 집계돼 미국 탄핵재판 역사상 최대의 반란표가 발생했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여러 언론사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신기사 링크

[차현진 칼럼] 가상자산 시장, 국무조정실을 컨트롤타워로 ‘거래소 등급제’ 실시하라

지난 17일 오전 6시, 글로벌 코인시황 중계사이트인 코인마켓캡에서 비트코인은 24시간 전보다 8.23% 급락한 4만 4354달러를 기록했다. 같은 시각 한국의 코인 거래사이트인 업비트에서도 24시간 전보다 4.49% 하락한 5616만 9000원에 거래됐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비트코인 전량을 팔았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자 벌어진 일이다. 가상자산 시장이 걱정스럽다. 지나치게 폭등하는 것도 위태롭고, 일론 머스크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출렁이는...

[조혁 칼럼] 공직자, 7년 이하 징역 가능 ‘이해충돌방지법’ 실효성 높이려면?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기관장이 새롭게 들어서면 연례행사를 한다. 청렴선포식, 청렴글짓기, 청렴비누 제공 등등이다. 역설적으로 공공기관 내 청렴도가 높지 않다는 증거다. 국제투명성기구가 올해 초에 발표한 '2020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 따르면, 한국은 33위를 기록했다. 2017년 51위를 기록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한 것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세계 경제 10위권 국가가 자랑할 만한 순위는 아니다. ‘제2의 김영란 법’(부정청탁금지법)으로 불리는 공직자...

[양향자 칼럼] 의대·공시에만 몰리는 이과생, 510조 ‘K-반도체 벨트’ 자칫하면 헛돈다

21대 국회에서 자타공인 반도체산업 전문가로 평가받는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3일 ‘K-반도체 벨트 구축’ 등을 골자로 한 정부의 반도체산업 전략 발표 이후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기고했다. 양 의원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에서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를 역임한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다. 양 의원은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은 모든 기계장치를 전기 중심의 전자장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핵심은 바로 반도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