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 문재인 대통령. (사진=AFP/연합뉴스)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가  <피렌체의 식탁>에 특별기고를 했다. 하노이 노딜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척을 위해 오는 10월 로마에서 열릴 예정인 G20정상회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전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과 지난 1월 취임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양 정상 간의 첫 통화에서 가톨릭과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이 전 대사는 두 정상의 삶의 이력을 보았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고 있는 가톨릭의 사회교리 실천에 공감대를 형성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를 근거로 로마 G20정상회의 기간 중 한반도 평화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미 간 중재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망한다. 아울러 본인이 직접 겪었던 교황의 방북 추진 비화를 공개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숨 가빴던 물밑 움직임도 생생하게 전한다. <피렌체의 식탁>은 설 연휴를 맞아 이 전 대사의 특별기고를 상·에 걸쳐 독자들에게 선보인다.[편집자]

#문재인·바이든 '가톨릭' 공통분모  첫 통화에서 교황 이야기로 화기애애  #프란치스코 교황, 바이든과 코드 맞아  문 대통령의 사회교리 실천도 호평#교황청 중재외교, 세계사 흐름 바꿔  로마 G20정상회의 교황 역할 주목#교착 상태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가톨릭 코드’ 활용한 해법도 가능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의 종교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신실한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티를 내지 않는다. 지난 2월 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한미 정상 간의 첫 통화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종교 이야기를 먼저 꺼냈고 문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문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라고 하시니…, (나의) 당선 직후 교황께서 축하 전화를 주신 기억이 난다. 당시 기후변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문 대통령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 우리 두 사람이 견해가 비슷한 것 같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저도 교황과 대화한 일이 있다. 교황께선 동북아 평화 안정, 기후변화 등을 걱정하셨다. 자신이 직접 역할을 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교황님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문재인 대통령

이후 첫 통화에 대한 언론의 해설이 쏟아졌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 통화가 이른바 ‘코드가 잘 맞는 대화’를 했다고 자평했다. 한미 정상 간 통화를 부드럽게 만든 것은 가톨릭(catholic)이라는 공통점이었다. 여러 언론 보도 가운데 한겨레신문의 ‘문 대통령-바이든 통화에 등장한 프란치스코 교황… 왜?’ 기사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32분의 짧은 전화 통화, 더구나 첫 통화에서 중요한 정책 이야기를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정서적 공감대만 확인해도 큰 성과다. 이런 점에서 한미 정상 간 통화는 대성공이었다. 바이든의 코드를 확인했고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근저에 바이든의 가톨릭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바이든과 바티칸의 합작품

2015년 12월 17일,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할 때 TV를 지켜보던 미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두 번 놀랐다. 처음은 오바마가 쿠바의 국교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식 선언할 때였다. 미국과 쿠바는 반세기 넘게 ‘철천지 원수’로 지내온 이웃 아닌가! 그리고 오바마가 두 나라 간의 중재에 힘써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감사의 뜻을 전할 때 또 한 번 놀랐다. 물론 같은 시간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도 오바마와 똑같은 내용의 특별 성명을 발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세계의 이목이 바티칸에 집중되었다. “어느 정치 지도자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교황이 이런 일을 어떻게 하셨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를 위해 물밑에서 중재했고, 결국 성공시켰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당시 바이든 부통령의 역할이다.

외교전문가인 바이든이 쿠바와의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는 사실상 프란치스코 교황과 바이든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부통령 자격으로 교황과 대업을 도모했던 바이든이 이제 대통령이 되어 교황과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황이 2015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 의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황 전용기가 도착한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가족, 그리고 바이든 부통령 부부가 나와 교황을 극진하게 모셨다. 외교 의전 차원에서 최고 예우를 해 준 것이다. 어느 나라나 국가의 넘버 원과 넘버 투가 공개 행사에 동시 참석하는 의전은 거의 없다. 이날의 공항 영접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교황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아주 이례적인 의전이었다.

백전노장의 정치인 바이든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실천을 정치적 소명으로 여기고 긴 세월 정치활동을 해왔다. 전형적인 ‘리버럴 가톨릭(liberal catholic)’이다. 바이든은 부통령 선거에서도 대통령 선거에서도 “나는 실천하는 가톨릭 신자다."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 성장했다.”고 말하곤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성향이다. 교황과 바이든의 종교적 지향점이 같다.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국 방문 당시 미 의회에서 합동연설을 마친 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통령이었던 바이든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과 코드 맞아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식에서부터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냈다. 취임식은 가톨릭 이벤트를 방불케 했다. 취임식 기도를 예수회 소속의 리오 오도너번 신부에게 맡겼다. 가톨릭 신자인 레이디 가가가 축가를 불렀고 어맨다 고먼이 축시를 낭송했다. 국방, 내무, 보건복지, 농무, 상무, 노동, 에너지 등 내각의 30% 이상을 가톨릭 신자 장관으로 채웠다.

교황과 바이든의 가톨릭 신앙과 관련하여, 예수회가 주목받고 있다. 교황이 예수회 회원이다. 바이든도 예수회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바이든은 선거운동 내내 교황을 비롯하여 나치에 의해 처형된 예수회 사제 알프레드 델프 등을 언급해 왔다. 예수회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가톨릭을 위협할 때 내부개혁을 통한 가톨릭 수호에 크게 기여한 수도회다. 예수회는 가톨릭 개혁과 함께 남미와 아시아 선교에 적극 나섰다. 중국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파한 마테오 리치가 바로 예수회 사제다. 영화 ‘미션(남미 선교)’과 ‘침묵(일본 선교)’의 스토리도 예수회 선교활동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회는 동양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 조상제사를 허용하는 등 현지화 전략을 적극 구사했을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보수적이었던 교황청과 갈등이 생겨 수도회가 해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예수회는 지금도 교리해석과 사목활동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이든의 가톨릭 신앙이 어떤 것인가, 그의 신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바이든의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신앙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인간에 대한 사랑만 있을 뿐이다. 현실 세계는 다르다.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론에 따라 진보와 보수로 나뉜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다. 보수와 진보가 조화를 이루어가며 세상이 발전한다. 가톨릭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다. 바이든은 진보적 가톨릭(리버럴 가톨릭)이다. 교황과 문재인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세 지도자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리버럴 가톨릭은 사회교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사회교리의 궁극적 지향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있다. 민주주의(정치 참여), 인권(불평등 해소), 생태 환경(기후변화), 평화운동(전쟁 반대) 등의 사회적 현안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사회교리 실천의 기본이다. 교황청은 물론이고 세계 각 교구와 주요 수도회 본부는 내부에 각각 정의평화위원회를 두어 사회교리를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사회교리 지침을 집대성해놓은 ‘복음의 기쁨’을 즉위 이듬해(2014년) 반포했다. ‘복음의 기쁨’은 현재 사회교리 실천의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신자유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신자들에게 정치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리버럴 가톨릭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교황은 당시 한국정부 당국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호 유가족을 끌어안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왼쪽 가슴에 노란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녔다. 귀국길에 기내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 한국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니 세월호 리본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교황은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사회교리를 충실히 실천하는 행동파 사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도덕적 권위는 현존하는 글로벌 리더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교황의 말 한마디가 세계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갤럽 인터내셔널이 2018년 말과 2019년 초 2개월에 걸쳐 세계 4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글로벌 리더 호감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51%를 얻었다. 다음으로는 메르켈 독일 총리 45%,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38% 순이었다. 한국의 경우 종교를 불문하고 압도적으로 교황을 좋아하는 것(76%)으로 조사되었다.

교황청 중재외교 전통, 세계사 흐름 바꿔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장인 교황청은 중재 외교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다. 교황청의 중재외교 전통은 중세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국가와 민족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서로 싸우는 갈등관계에 있었다. 형제끼리 피 터지게 싸우는 형국이었다. 교황청이 나서서 물밑 중재를 했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지만 중재를 시도했다. 이것이 교황청 중재외교의 시작이다. 지금의 유엔 역할을 중세시대에 한 것이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달인 수준의 교황청 외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교황청은 세계사에 남을 만한 역사적인 일을 해놓고서도 보도자료 한 장 내놓지 않는다. 이것은 교황청의 외교 관행 가운데 하나다. 교황청 외교활동의 성과가 대부분 ‘비하인드 스토리’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중재처럼 당사국들이 먼저 공개하는 경우는 있어도 교황청이 먼저 말하지 않는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소와 핵전쟁 저지(1962년), 폴란드 민주화 및 공산정권 붕괴(1980년대), 유럽연합 출범(199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화해(2014년) 등 세계사의 주요 국면에 교황청의 역할이 있었다.

특히 교황청의 중재외교는 한국 현대사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교황청은 1948년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정부가 독립국가로 승인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세례명 사도요한)박사를 특사단 단장으로 파리에 파견하여 교황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프랑스 교황 대사(론칼리 대주교, 요한 23세 교황)와 교황청 국무장관(몬티니 대주교, 바오로 6세 교황)에게 장면 박사를 지원하라고 특별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 비우호적이었던 에바트 의장이 총회 마지막 날(12월 12일) 마지막 안건으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건’을 공식 상정했고, 투표 결과는 <가결 46표 반대 6표>였다.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진영의 방해 공작으로 한국 정부의 승인이 물 건너갈 뻔했지만, 한국 대표단이 ‘9회 말 역전 홈런’을 친 것이다.

교황청의 정무 기능은 외교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의 사도’인 교황은 외교를 통해 하느님의 평화를 세상에 구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어느 교황보다도 활발하게 평화외교를 펼치고 있고,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교황은 무슨 힘으로 이런 일을 해내는가. 교황청은 돈(경제력)도 없고 무기(군사력)도 없지만, 외교력은 세계 최강 수준이다. 교황청에는 탱크 한 대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묵주밖에 없다! 교황청 외교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가톨릭의 조직력과 정보력, 교황의 도덕적 권위, 중재외교의 노하우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교황청은 인구(상주 시민권자)가 800여 명에 불과하고 국토 면적은 창경궁 수준밖에 되지 않는 세계 최소국이지만 영적으로는 세계 최대국이다. 유일하게 북한만 제외하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다.

교황청이 직접 관리하는 교구가 6000여 개에 달하고 각 교구에 소속된 신자를 합하면 13억 명이 넘는다.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등 수도회와 샬트르, 시튼, 바오로딸 등 수녀회가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황청은 현재 180여 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고 국제연합(UN) 유럽연합(EU) 등 주요 국제기구에도 가입되어 있거나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다. 교황청의 대사관과 교구는 물론이고 수도회와 수녀회 등은 자체 수집한 ‘민심 동향’을 교황청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미국 CIA를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교황청의 정보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교황청과 갈등 지속했던 트럼프 정부

세계 최강의 미국도 교황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비중 있는 인물’을 교황청에 배치한다. 트럼프 시대에는 미국 정계의 거물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공화당)의 부부가 바티칸을 지켰다. 뉴트 깅그리치는 트럼프의 ‘정치적 절친’으로 그가 백악관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지원을 했던 정치인이다. 공식적인 대사는 그의 부인(칼리스타 깅그리치 여사)이었지만 뉴트 깅그리치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교황은 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다. 환경문제(파리기후협약 탈퇴), 이민정책(멕시코국경 장벽) 등에서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교황은 2019년 3월 모로코를 방문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장벽을 쌓는 자 장벽에 갇힌다.”고 점잖게 꾸짖었다. 기자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장벽건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

이처럼 미국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사실상 교황이 유일하다. 트럼프 대통령 때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란, 이라크,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 등 중동 국가들이 교황청 외교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교황청의 지원이 필요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슬람과의 대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중동 국가의 지원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2018년 10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 당시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는 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0월 처음 문 대통령을 만났지만, 문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대단했다. 교황은 문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배려를 했다. 나는 주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대통령 행사를 준비하면서 문 대통령의 교황 면담 일정을 잡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주재국 대사에게 대통령 행사만큼 중요한 행사는 없는데, 명색이 특임대사로 왔는데 정상회담 일정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어찌 되겠는가. 교황 면담 일정이 계획대로 잡히지 않아 몸과 마음이 달아올랐다.

문 대통령은 당시 벨기에에서 열리는 아셈(ASEM)정상회의 참석차 유럽에 오면서 교황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10월 내내 주교와 추기경 300여 명이 참석하는 특별 자문회의(시노드)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교황이 소집한 회의기에 교황은 모든 회의에 임석해야 한다. 때문에 교황 면담 일정을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교황청 외교부는 시노드 회의가 열리기 전 오전 시간에 20~30분 동안 면담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2017년 이렇게 만나고 간 사례가 있기는 했다. 교황청 외교부의 제안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일정이 17일 오전 9시 30분에 만나 20~30분 환담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교황청 의전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황께서 결재를 하시면서 문 대통령 면담 일정을 바꾸라고 합니다. 충분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일정을 조정하라고 하시는데…. 점심시간도 가능할까요?” 시노드 오전 회의와 오후 회의 중간 점심시간에 만나자는 제의였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18일 점심시간을 약 1시간 확보할 수 있었다.

나는 문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러 가는 날 호텔에서 몇 가지를 귀띔해 드렸다. 그중 하나다. “교황께서 대통령님과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신답니다. 면담 시간을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마시고 말씀을 나누십시오.”

당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것도 교황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정 국가의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그 국가의 정책을 주제로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사가 열린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파롤린 국무원장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국무원장은 교황청 행정을 총괄하는 2인자다. 한국의 국무총리와 같은 자리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문 대통령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문 대통령의 사회교리 실천 높이 평가

교황청 관계자들이 나에게 들려준 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솔직했고 담백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만큼 신실한 가톨릭 신자는 없지요. 또 사회교리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입니다. 교황님도 이 점을 잘 알고 계십니다. 유럽과 중남미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많지만 거의 대부분 냉담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교리 실천에 별 관심이 없어요.” 가톨릭 사회교리 실천에서 문 대통령은 교황의 유일한 친구였던 셈이다.

문 대통령이 이제는 외롭지 않게 되었다. 문재인과 바이든은 ‘가톨릭’과 ‘교황’이라는 접점을 공유했다. 사회교리 실천을 정치적 소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바이든이 교황의 새로운 친구로 등장했다. 종교적 지향점이 같다고 하여 정책이 일치할 수 없지만, 특정 정치 지도자의 종교적 지향점은 그 사람의 정책 방향을 예측하고 협력 방안을 협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사항임은 분명하다. 바이든 시대, 우리는 가톨릭 사회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 등 세계 각 나라의 최고지도자(대통령이나 총리)는 바티칸을 방문해 교황을 개별 면담(개별 알현)하거나 자국에 교황을 초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이 바티칸을 찾아 교황을 면담했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교황청을 외교의 전략적 파트너로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권위주의 시절, 가톨릭이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황청의 외교적 위상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달랐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국에 특사를 보냈다. 뒤이어 김희중 대주교(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를 교황청에 특사로 보냈다. ‘4+1’ 특사였다. 전례가 없는 일이서 한국 외교부의 관계자들도 놀라고 교황청도 놀랐다. 문 대통령은 교황청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특사 파견을 통해 그 뜻을 교황에게 전달한 것이다.프란치스코 교황이 문 대통령을 만나 ‘나는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의 “sono disponibile.”(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하편에서 계속-편집자 주)라는 선물을 준 것도 문 대통령의 이런 전략과 맥이 닿아 있다.

나도 문 대통령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문 대통령은 2018년 10월 18일 교황과의 면담을 앞두고 17일 저녁 대사관 관저에서 양국 간 공식적인 만찬회동을 가졌다. 이날 만찬에는 파롤린 국무원장 추기경을 비롯하여 국무장관 외교장관 등 교황청의 외교라인이 모두 자리를 함께 했다. 교황은 어떤 정치지도자와도 외부에서 식사하지 않는다. 교황청의 외교적 만찬(또는 오찬) 행사에는 국무원장 추기경이 교황 대신 참석한다.

한국에서는 외교장관과 청와대 안보실장 등 주요 참모들이 배석했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나를 이렇게 소개해 주셨다. “저와 이백만 대사는 청와대에 같이 일했던 친구입니다. 추기경님과 장관님들이 저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이 대사를 도와주십시오.” 만찬 뒤 나는 교황청에서 ‘대통령의 친구’로 통했다.

2018년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시 주한 바티칸 대사관 관저에서 열린 한국과 바티칸 간의 공식 만찬회동. (사진=이백만 제공)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전 ‘가톨릭 코드’도 한 방법이다

문재인과 바이든은 비록 전화 통화이긴 하지만 첫 만남에서 ‘가톨릭’과 ‘교황’이라는 공통된 코드를 확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문재인과 바이든을 아우르고 있는 모양새다. 교황의 평양 방문 추진 등 바티칸과 북한의 교류협력이 2018년 말 2019년 초 활발하게 논의되었으나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하노이 노딜(2019년 2월)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불씨는 살아 있다. 올해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릴 G20정상회의가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문재인 대통령, 바이든 대통령! 세 지도자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할 때 한반도 평화를 향한 ‘외교의 큰 장’이 열릴 것 같은 예감이 있다. 2021년 10월, 로마를 주시해야 할 이유다!

※참고: “가톨릭은 교황 중심의 단일조직인데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그렇게 심각한 논쟁을 하나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이다.가톨릭 내부에 진보와 보수가 있다. 교황청 안에도 있고, 한국 가톨릭에도 있다. 진보와 보수는 특정 현안을 놓고 갈린다. 예를 들어 교황 방북이 대표적이다. 가톨릭 진보는 교황 방북을 강력히 지지하는 반면, 가톨릭 보수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신중한 입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쪽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느냐는 상황판단의 문제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문제, 환경문제, 노동문제 등에서 진보와 보수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가톨릭은 외형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단일 종파이고 순명(順命)의 교리가 있어 획일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부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질 때가 의외로 많다. 토론을 통해 답을 얻지 못하면 순명의 교리에 의해 주교나 추기경, 최고 단위의 토론에서는 교황이 결론을 낸다. 결론이 나면 모두 승복한다.


이백만 필자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언론인 출신으로 한국일보 경제부장 및 논설위원을 거쳐 한국경제TV 보도본부장을 지냈다. 2006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과 2007년 대통령 홍보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2018년 1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