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에서 본 한국과 일본 일대(사진=셔터스톡)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낙연 대표가 지난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에 '추월의 시대'를 언급했다. 한국이 따라가야 할 나라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세상에 없던 첨단 제품과 세상에 없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대표는 대표연설 이후 언론과 공동 인터뷰에서 <추월의 시대>를 보고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한윤형 필자는 지난 연말 출간한 <추월의 시대>의 공동저자로 '추월의 시대'가 현 시점에서 필요한 한국 사회의 새로운 담론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헬조선'이라는 표현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는 선진국 역시 겪고 있는 여러 사회 문제들과 겹친다고 주장한다. 결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성취한 한국의 여러 좌표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해 '추격자'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 차원 더 높은 도약을 하자고 강조한다.[편집자]

#혁신국가 세계 1위 한국  이낙연 대표 '추월의 시대'로 정의#한국 사회 선진국형 문제 겪기 시작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 대표적#한국 근현대사는 선진국 추격전  산업화와 민주화로 역량 쌓여#다양한 성과 자학할 필요 없어  도약을 위한 객관적 인식 필요

며칠 전 블룸버그는 지난해 가장 혁신적인 국가 랭킹에서 한국을 1위로 선정했다. 2위는 독일이었다. 관련 기사 링크가 카카오톡 단체방을 돌자 대기업을 다니는 한 40대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오버하네. 혁신보다는 제일 열심히 갈아 넣는 나라 정도가 맞지 않으려나? 전 국민을 갈아 넣어 만들어낸 영광이지”. 이에 대해 필자가 "그 말도 맞는데 단순히 갈아 넣는 게 아니라 R&D 비용도 많이 쓰고 교육도 잘 되어 있으니 그렇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선배는 여전히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그거야 가진 게 사람밖에 없으니 교육이랑 R&D겠지. 히틀러의 인간 개조론 같은 거지”.

이런 반응은 단순히 그 선배 한 명만의 사례는 아니다. 1970년대생 40대 선배들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를 칭찬하면 어딘지 석연치 않아하고 단서조항을 달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배와 대화 이후 몇 해전 ‘헬조선’이란 말이 청년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무렵이 떠올랐다. 선배들은 헬조선이란 말을 듣고 의아해 했다. 한국처럼 잘 살게 된 나라도 흔치 않은데 어떤 이유로 ‘헬조선’이냐는 것이었다. 그때도 속으로 웃었다. 대기업에 다니거나 큰 언론사 기자인 그 선배들의 소득이 높은 것은 분명했지만, 단톡방에서 살펴본 그들의 일상은 ‘저녁이 없는 삶’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잘 살아도 형들처럼 사니까 ‘헬조선’이라 그러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 역시 ‘헬조선’이란 말을 입에 달기 시작했다. 필자의 예상처럼 주로 퇴근을 하지 못할 때 말이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 말을 애용하고 있다.

'헬조선'과 '흙수저'에서 '추월의 시대'로?

헬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헬’(hell)에 ‘조선’을 합성한 말이다. 인간의 고통이 극대화된 지옥과 신분을 세습했던 봉건국가 조선을 합쳐 한국 사회를 자조하거나 자학하는 데 쓰인 말이다. '헬조선'은 ‘흙수저’와 함께 2010년대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부모들의 경제적 계층에 따라 자식들의 앞날이 결정되는 현상에 대한 청년층의 좌절을 표출하는 강력한 어감의 단어들이었다. 헬조선은 그저 신조어가 아니라 청년층이 한국사회를 인식하는 틀이기도 했다. 일례로 2019년 11월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 발표한 설문조사(19~34세 청년세대 3000명)에 따르면 청년세대의 80.6%가 한국사회는 헬조선이라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나선 이낙연 민주당 대표. (사진=연합뉴스)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새삼 다시 언급한 이유는 지난 2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당 대표 연설에서 현재 한국의 상황을 ‘추월의 시대’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당시 연설에서 “지난해 세계 1위 제품 수에서 우리는 공동 3위였습니다. GDP 대비 연구개발비는 세계 4위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상에 없던 첨단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없는 정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추월의 시대’입니다.”고 말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다수의 청년이 헬조선 담론에 동의했던 한국이다. 그런데 갑자기 선진국을 추월하는 국가로 도약했다고 주장하면 당연히 반론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추월의 시대’라는 담론 자체가 자칫 여당의 정권 연장을 위한 ‘레토릭’으로 취급당할 여지도 있다. 가령 현재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문재인 정부 시대가 되니 이른바 ‘국뽕’을 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이 대표는 교섭단체 연설 후 언론과 인터뷰에서 필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책 <추월의 시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우연치 않게 여당의 당대표가 ‘추월의 시대’를 공론화한 셈이다. 국민소득 500달러도 채 되지 않던 가난한 국가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한국은 이제  '추격자'가 아니라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는게 <추월의 시대>의 주제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새로운 담론을 제기했던 저자 입장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논쟁을 위한 보론 성격의 주장을 <피렌체의 식탁>지면을 빌려 펼치고자 한다.

정파성과 선진국형 문제가 결합된 '헬조선'

먼저 ‘헬조선’이란 말의 유행에는 애초에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다. 하나는 정파성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청년층의 의욕 부진이라는 선진국형 문제였다. 정파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박근혜 정권의 상황과 연관성이 컸다. 당시 헬조선 담론은 보수정권과 여당의 실정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곤 했다. 때문에 ‘헬조선’이란 말이 뜨자 당황한 보수세력은 “그 말은 북한에 어울린다. 남한은 ‘헤븐(heaven)조선’이다”라고 대응했다.

이후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을 거쳐 보수정권은 야당이 됐다. 그리고 진보정권과 민주당에 반대하는 세력에서는 ‘문재앙 정부’ 운운하며 오히려 헬조선 담론으로 현 정권을 공격하고 있다. 특히 ‘태극기 부대’란 말로 표현되는, 반정부 성향의 중노년층 유권자들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계속 헬조선을 주장하며 지금은 왜 젊은 층에서 ‘헬조선’을 안 쓰느냐고 투덜댄다. 그분들이 돌려보는 정세분석에 따르면, 나라가 곧 망할 지경이기는 하다. 이에 대해서 현 정부를 지지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헬조선’ 담론 자체가 ‘토착왜구’나 ‘일베’가 한국 사회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란 식으로 반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헬조선’이란 말이 생길 때엔 ‘토착왜구’란 말이 대중적으로 회자되지 않았다.

이렇게 설명이 왜곡되는 현상은 단순히 ‘정치중독’에 의한 ‘양극화’의 발로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에선 시간선이 파악되지 않는다. ‘헬조선’이란 말을 받아 들었을 때 2015년의 그 느낌으로 지각하는 게 아니라 현시점에서 받은 느낌으로 재구성한다.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며, 그 설명을 자기들끼리 정설로 만든다. 결국 야구의 공수 교대처럼 한국의 현 상황을 ‘헬조선’이라 공격하는 측과 그에 대해 방어하는 측이 완벽하게 반전된 것이다.

모범답안은 없다, 자기 객관화가 디딤돌

이런 정파성에 따른 ‘헬조선’의 공수교대와 별개로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헬조선’ 담론은 유효하다. 코로나19를 통해 선진국의 방역 역량이 오히려 한국보다 못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가 자부심이 크게 상승하는 현상은 ‘추월의 시대’의 중요한 포인트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해븐 조선’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갈수록 취직은 어려워지고 부모의 자산 여부에 따라 경제적 계층이 나뉘는 현상은 그대로이거나, 강화되어 간다. 이를 놓고 일부 기성세대들이 ‘청년층의 의욕 부진’이라고 ‘노오력을 하지 않아 그렇다’고 힐난하지만 본질은 기회의 박탈에 따른 청년층의 좌절이다. 이는 선진국형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지점에서 볼 때엔 지금도 ‘헬조선’ 담론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청년세대의 무력감 문제를 포함하여 현재 한국 사회가 대면하고 있는 사회문제 대부분은 선진국형 문제들이다. 보수 정객들이 현 정부를 규탄하면서 낸 책들을 보면 그 문제의 목록들은 탈원전 망국론, 복지 망국론, 난민‧이주노동자 망국론 등이다. 사회적 어젠다 자체가 거의 선진국과 동일하다.

따라서 ‘헬조선’ 담론은 ‘추월의 시대’라는 진단과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디딤돌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와 공저자들은 먼저 정파성의 문제에서, 본인들이 한국 사회의 위대한 승리를 일구었다고 선전하면서도 상대 당파가 집권하면 망국을 예감하는 그 극심한 널뛰기를 벗어나기 위해 진보와 보수, 혹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성공 서사를 통합하려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예비군 정훈교육 영상을 보면 산업화의 공로를 논하고 ‘월남 패망’처럼 우리도 무너질 수 있다고 공포 마케팅을 펼치다가 느닷없이 ‘점프’해서 자긍심을 가지자고 강조한 뒤 한류 열풍으로 날아갔다. 반쪽 짜리 서사이기 때문에 단락이 심한데, 더구나 사실상 “선진국이 되려면 저들을(상대 당파를) 몰아내야 한다”고 결의하고 있으니 그 소음과 낭비는 어마 무시하다.

때문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객관적인 수준을 인식하고, 그 레벨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잘 나가는’ 선진국의 제도를 이식해서 금세 효력을 볼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 선진국들도 현 시점에서 우리와 같은 문제를 풀고 있기 때문에 모범답안이 없는 것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표상하는 청년층의 무력감 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란 말을 접했을 때 비웃기보다 일본을 ‘동(東)조선’이라 칭하면서 자조했던 이유다. 미국이나 유럽의 젊은이들도 알게 된다면 비슷한 감상을 가질 것이다.

추격의 동력은 '자기 경멸', 현재 성과 인정해야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내실은 부족하다면서 전근대사에 있었던 악습을 논하는 이들도 흔하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자국의 전근대사에서 유래된 문화가 근대 이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직 문화적으로는 미성숙’을 논하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에 대한 ‘카피 앤 페이스트’(copy&paste)가 아직 완벽하지 않다고 한탄하는 것인데, 어떤 영역에선 한국에서 모범사례가 생기기도 하는 시점에선 그런 말의 설득력이 점점 멀어져 간다. 필자를 비롯해 '추월의 시대'에 참여한 공동 저자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실을 처음으로 동시에 누린 80년대생이다. 그래서 필자들은 ‘한국이 이미 선진국’이고 ‘서로 부정하며 싸워온 기성세대의 성취를 온전히 인정해야’ ‘현재의 우리 위치를 받아들이고 쓸모 있는 사회비평도 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도 ‘국뽕’처럼 들려서 거북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뽕’이 아니라 객관화이다. 그 객관화가 ‘국뽕’처럼 들리는 이유는 ‘추격하던 시대’엔 자기 경멸을 자양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추월의 시대>의 핵심 논지를 한국 사회에 익숙한 방식, 자기 경멸과 추격의 형태로 다시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는 이미 외형적인 잣대로는 선진국의 성취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 시민들은 특히 상대 당파에 대해서 ‘미개하다’는 딱지를 붙인다. 이 ‘미개’의 딱지를 남발하는 태도는 ‘추격의 시대’의 유산이다.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서술 행태를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 저렇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저 행태 역시 ‘추격의 시대’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를 모두 이룬 선진국이므로 그 부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다음 과제를 봐야 한다고 서술한 것이다. 이게 ‘국뽕’으로 보인다면, 많은 한국인 식자들에게 자기 경멸이 기본 값으로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봐야 한다.

심지어 본인이 주관적으로는 내셔널리즘을 뛰어넘었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그러했다. 한국 사회에서 탈민족주의자들의 발화는 상당 부분 ‘여전히 민족주의가 만연한 미개한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을 제1세계의 코즈모폴리턴들과 동등한 정신적 경지에 오른 자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면서’ 경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탓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 역시 ‘탈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개조론자’라고 느낀다. 이는 ‘민족개조론=춘원 이광수=친일파=토착왜구’ 같은 프레임을 뒤집어 씌워서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20세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민족개조론자였다는 의미다. 아마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민족개조론’은 애국‧애족 운동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당대의 다른 민족주의 운동의 결을 살펴봐도 어느 정도는 민족개조론적인 속성이 있었다. 이런 측면을 경계하고자 우리는 <추월의 시대>에서 (민족주의 우파 계열에서 나오는) 한사군을 사실과 달리 한반도 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었던 우리의 욕망을 응시했다. 즉 한반도의 역사를 과장해 한민족이 고대사를 지배했다는 식의 주장은 멀리했다. 물론 이런 부풀림 자체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후세에 <환단고기>는 고대사 책이 아니라 20세기의 현상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한국의 전근대사, 한반도 왕조들의 역사들을 좀 더 담백하게 바라보면서 그 생존을 위한 고투를 존중하고자 했다. 그런 차원에서 한반도를 ‘호랑이’ 모양에 욱여넣지 말고 ‘토끼’를 닮았음을 인정해보자고 했다.

열등감 벗고 한 차원 더 높게 도약하기를

아마 열등감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의 ‘국뽕’은 점점 더 억지나 환상으로 ‘뽕’을 넣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담담한 자기 긍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헬조선’이라는 와 닿는 신조어로 세상에 대해 투덜거리는 한국인들이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온 주인공들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다시 처음의 카카오톡 단체방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가 블룸버그 혁신 국가 순위 기사를 공유했을 때 1970년대생 40대 선배가 못 마땅해 하며 ‘히틀러의 인간 개조론’까지 말하고 나니 중견기업에 다니는 1980년생 선배가 기사를 읽어보고 다른 말을 한다. 그는 10위 안에 싱가포르와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 “10위권에 드는 국가 중 적대적인 큰 나라에 둘러싸여 있다는 공포와 스트레스, 거기에 대응해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라가 한국 외에도 싱가포르와 이스라엘이다"고 답했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여기서 또 하나 상기해야 할 지점은 그런 국가 중에 한국은 인구와 국토가 상대적으로 많고 큰 나라며 미래에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구과 국토, 경제력 규모에서 한국보다 훨씬 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싱가포르나 이스라엘과 또 다른 환경이다.

이점은 한국의 국력을 객관화하는데 큰 장애로 작용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북유럽 국가들이나 싱가포르 등을 롤모델로 꼽고, 대만을 모범사례로 끌어오며 강소국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냉정히 보면 이런 국가 중에서 한국의 인구와 국토면적과 동등 비교할 만한 국가는 없다. 대만(면적 3만5195km², 인구 2300만명)도 싱가포르(692km², 인구 556만명)보다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지만 한국 사회 전체의 롤모델이 되기는 어렵고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계의 고민거리일 뿐이다.

한편, 한국이 오매불망 넘어서고 싶다는 일본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구가 많고 국토면적이 넓다. 인구는 1억2650만명이고 면적은 37만7915km²에 달한다. 대한민국의 국토면적은 10만210km²이며 인구는 5180만명 선이다. 그런데 일본은 혁신국가 순위에서는 10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은 혁신국가 모델로 비교할 때 대만보다는 독일(면적 35만7021 km², 인구 8302만명)과 비교하는 게 걸맞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문제 해결에 쓸모 있는 대안을 내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추월의 시대>는 이처럼 한국의 여러 좌표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다시 정렬하기를 바랐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확히 파악할 때 한 차원 더 높은 도약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윤형 필자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 문제, 미디어 문제, 그리고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주로 써왔다. 매체비평 전문지 <미디어스>에서 2012년부터 3년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몇몇 여론조사기관과 선거컨설턴트 업체 등에서 일했다. 주요 저서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미디어 시민의 탄생>이 있으며 최근 80년대생 저자들과 공동으로 <추월의 시대>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