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현지시간) 뉴욕상품거래소에서 3월 인도분 은은 전 거래일보다 온스당 9.3%(2.50달러) 급등한 29.41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사진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전시된 실버바. (사진=AP/연합뉴스)

코로나19에 따른 각국의 재정 확장으로 전 세계의 현금 유동성이 커지면서 예전과 다른 경제 현상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특히 갈 곳 잃은 유동성 자금이 증시로 몰리면서 세계 각국의 증시는 오히려 코로나19 이전보다 뜨거워지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한국에서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사 사이의 공매도를 둘러싼 공방은 이제 '은(銀) 투자'로 번지는 양상이다. 한국은행에 입사해 금융결제국장 등을 지낸 차현진 필자는 이른바 '대박'을 꿈꾸며 불붙고 있는 은 투자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들어 강력한 경고장을 보낸다. 은은 기본적으로 주식과 완전히 다른 재화이며 특히 은값의 의도적 상승은 미국과 제조업체의 반발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편집자]

#국제 은값 8년 이래 최고치  개인들이 가격 올릴 수 있다?#금보다 은 생산량 훨씬 많지만  특정 지역에 매장, 화폐론 부적합#헌트 형제, 銀 투자하다가 쪽박  국제 협약도 가격 하락 못 막아#미국·제조업체, 銀 투기에 민감  가격 상승 유도했다간 반발 거셀 것

미국의 게임스톱사의 주식을 둘러싼 공방이 실버(silver), 즉 은(銀)으로 시장으로 번지고 있다. 게임스톱은 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개미(개인투자자)와 공매도(가격 하락을 예상하고 주식을 빌려서 판 뒤 나중에 되사서 갚는 일) 세력인 공룡(기관투자자)이 사고팔기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최근 전 세계 주식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주식으로 평가받았다.

게임스톱은 지난해에 비해서 한때 1600%까지 주가가 올랐다. 이후 헤지펀드가 물량공세를 퍼부으며 2월 들어서 폭락했지만 그래도 연초 20달러 선에서 거래되었던 게임스톱의 주가는 2월 초 90달러 선에서 유지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새로운 투자대상으로 은에 관심을 돌리면서 최근 국제 은 가격이 8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거래량도 폭주하고 있다. 국내외 투자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은 가격은 온스당 25달러가 아니라 1천 달러이어야 한다”는 글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투자자들이 은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추세로 볼 때 은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비교대상은 골드(Gold), 즉 금(金)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 중반까지 금과 은이 함께 돈으로 쓰이면서 가치가 비슷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후 결별했다. 그럼에도 금값을 보고 은값 상승을 기대했다가 쪽박을 찬 사례가 적지 않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개인이 아니라 정부차원의 국제공조를 통해 은값을 올리려고 했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결론적으로 은은 이제 금보다는 철에 가까운 금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개인들의 노력으로 은값을 올릴 수 있다는 상상은 매우 위험하고, 성공할 수 없다. 은을 단기 매매차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 또는 투기대상으로 보느니, 차라리 맹물을 투자대상으로 삼는 것이 낫다. 깨끗한 물은 생수로서 가치가 있고 생수시장의 규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고 꾸준히 확대대고 있다. aT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세계 생수(Packaged Water) 시장 규모는 1717억 달러 규모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생수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은본위 대신 금본위제도 확립 배경 살펴봐야

현재 금값과 은값의 비율은 70대 1 정도다. 지난 30년 간 그 비율이 60대 1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다소 높다. 하지만 금값과 은값의 비율은 생각보다 안정적이지 않다. 좀 더 길게 보면, 금과 은의 가격비율은 역사적으로 계속 상승해 왔다. 그러므로 70대 1을 이유로 은값이 상승여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은은 화폐가 되기 어려운 물질적 속성을 지녔다. 우선 금은 전 세계적으로 아주 잘 분포되어 있는 반면, 은은 특정 지역에 엄청난 양이 집중 매장되어 있다. 은을 뜻하는 ‘silver’의 어원은 앗시리아어(sarpu)인데,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문명이 탄생할 때 은은 특정 지역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러므로 화폐로서 부적합했다. 매장량이 편중된 다이아몬드나 비트코인과 비슷하다. 인류 역사에서 은본위제도가 아닌 금본위제도가 자리 잡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은이 먼저 돈으로 쓰였지만,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면서 금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는 금보다 은의 생산량이 훨씬 많다. 그래서 그리스 문명을 시작으로 고대 시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13대1~14대1의 비율이 유지되어 왔다. 근세에 들어 13세기 초 보헤미아 지역과 15세기 후반 남미에서 엄청난 은광이 발견되면서 그 비율이 15대 1로 껑충 뛰었다.

16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그 비율이 매우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건국 초기에 “금과 은은 15대 1의 비율로 무제한 교환한다”는 원칙을 밝히고 복본위제도(dual standard)를 채택했다(주조법 제14조). 그 무렵 영국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도 14~15대 1의 비율로 복본위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인 1858년 미국 네바다주의 컴스톡에서 엄청난 은광이 발견되었다. 15세기에 스페인이 남미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충격을 가져왔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더 이상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유지할 수 없었다. 1873년 화폐법을 통해 은값을 시장에 맡기기로 했다. 은값이 무한 폭락하고, 금과 은의 비율은 쉽게 30대 1로 상승했다.

하지만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은값 하락을 방치하면, 금본위제도를 따르는 영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의식하고, 종전의 15대 1 비율을 인위적으로 지키려고 했다. 1865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 등이 연대해서 은값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라틴통화동맹(Latin Monetary Union)이라고 한다. 필요할 때 약속된 비율로 서로 금과 은을 교환하기로 한 점에서 오늘날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과 똑같았다.

이 동맹에는 나중에 그리스, 스페인, 로마니아, 합스부르크 왕국, 불가리아, 핀란드 등도 가담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금값이 폭등하는데 금을 빌려주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 빌리려고만 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흐지부지 되다가 은값은 정부의 힘이나 국제협약으로 버틸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고 1927년 공식 해체되었다.

미국 헌트 가문 몰락 ‘은 투자 = 쪽박’의 사례 

20세기 초 정부나 국제협약으로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은값의 하락이었다. 그러면 은값 상승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대표적 졸부였던 헌트 가문의 형제들이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헌트 형제는 헤지 수단으로 은을 골랐다. 헌트 형제들은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이 달러화의 금태환 중단을 선언해 금값이 폭등한 상황을 틈타 은값도 뛸 것으로 믿고 은 선물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최근 은에 눈을 돌리고 있는 개인투자자들과 완전히 똑같은 이유였다. 참고로 금태환은 중앙은행이 지폐(은행권)을 약속된 가격으로 금과 교환해 준다는 약속이며, 금태환을 중단한다는 것은 중앙은행의 금이 충분하지 않아서 약속된 가격으로 금과 바꿔줄 수 없다는 말이다. 금태환은 중앙은행이 금 부족을 공식 선언하는 것이므로 금값은 폭등하게 된다.

헌트 형제는 1973년 온스당 1.95달러로 투자하기 시작하여 가격이 떨어지면 추가로 더 매입하는 물타기 전략을 써서 끊임없이 포지션을 늘렸다. 그들이 사들인 은의 양은 5천만 온스, 즉 세계 은 재고의 3분의1 수준이나 되었다. 이런 무모한 작전에 힘입어 1979년 여름에 이르러 은 선물가격은 48.7달러까지 치솟았다. 형제들은 곧 세계 은 시장을 독식하는 듯했다.

그러자 당국이 나섰다. 시카고 상품거래소와 시카고 선물거래소는 선물거래 시 이행보증금 수준을 연속적으로 올리고,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기존 계약자의 추가적인 계약 확대를 막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매수 제한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79년 8월 취임한 제12대 연준 의장 폴 볼커는 취임 직후 통화주의를 선언했다. 물가안정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금값과 은값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현찰 동원력이 한계에 이른 헌트 형제는 추가매입을 주춤거렸고, 1980년 2월을 넘기면서 그들의 은 투기는 막대한 손해로 접어들었다. 거기다가 그동안 그들의 가격조작으로 손해를 봤다는 투자자들이 헌트 형제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질 것이 분명해지자 국세청(IRS)은 헌트 형제들의 재산을 차압했다. 공매도하기도 힘들고, 현찰도 부족해진 형제들은 물려받은 유산을 헐값으로 팔아서 손해배상하는 데 다 탕진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었다.

헌트 집안은 은에 투자하기 전부터 ‘국민 밉상’이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 트럼프가 보여준 이상으로 온 집안 식구들이 남들에게 거슬리는 언행으로 가십거리를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미국 3대 방송사 중에 하나인 CBS는 그 집안을 소재로 드라마까지 만들었다. 텍사스주의 상공업 도시인 댈러스를 무대로 교외의 대목장에 사는 석유재벌 유잉 가문을 소재로 한 <댈러스>다. <댈러스>는 혼외정사와 음모가 난무하여 대표적인 막장 드라마로 손꼽히는데, 그 드라마 속의 유잉 가문은 석유 재벌 헌트 가문을 모델로 했다는 것을 미국 시청자들은 다 안다. 지금도 50대 이상의 미국인들은 <댈러스>를 기억하면서 헌트 집안과 그들의 투기 실패를 조롱한다.

윌리엄 허버트 헌트(William Herbert Hunt, 왼쪽)과 넬슨 벙커 헌트(Nelson Bunker Hunt). (사진=AP/연합뉴스)

미국 '은 투기' 가장 강경,  은값 상승 확률 극히 낮아 

1636년부터 1년간 벌어졌던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을 필두로 18세기 초 아이작 뉴튼마저 손해를 피하지 못했던 영국의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 버블, 북미 식민지의 황무지를 투자대상으로 삼았던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의 공통점은 당시 아주 생소했던 것들이 투자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창 투자 열풍이 불 때는 그것의 성공 여부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오늘날의 암호자산 투자 열풍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서 은 투자는 분명하다.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 확실하다.

은은 수 천 년 동안 전 세계에서 화폐로 쓰였기 때문에 재고가 많다. 과도하게 올랐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공급물량이 쏟아질 수 있다. 은은 주식이나 암호 자산과 달리 산업용 수요가 크기 때문에 가격이 불합리하게 오를 경우 상당히 많은 기업들이 어려워진다. 이들은 선물시장에서 공매도 세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게임스톱이라는 주식의 경우 헤지펀드가 공매도를 주도했지만, 은에 대해서는 전 세계의 관련 제조업체들이 일제히 공매도 세력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국제 은시장에서는 펀더멘털의 힘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겁다.

미국 정부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은 투기에 대해서 가장 강경하다. 은값 때문에 미국 사회가 심하게 분열된 경험이 있어서다. 미국의 은은 네바다주를 중심으로 중서부 지역에 집중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은값이 떨어지면, 중서부 지역 경제가 상당히 나빠진다. 그래서 남북전쟁이 끝난 뒤 중서부 지역 주민들은 건국 초기와 마찬가지로 은을 화폐로 쓸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앞에서 설명한 1873년 화폐법을 통해 연방정부가 은값의 하락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자 엄청난 저항과 사회 분열을 경험했다.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은값의 변동은 미국 정부가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다. 헌트 형제를 타깃으로 삼았던 개인매수 제한조치가 그 예다.

지난해 금값과 은값이 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4~5차례 증거금 수준을 인상했다. 완화적 통화정책 때문에 투기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이상 조짐이 보인다면, 훨씬 강력한 규제방안들을 계속 내놓을 것이다.

단언컨대, 게임스톱 주식투자와 은 투자는 완전히 다르다. 은값의 의도적 가격 상승 유도는 은을 수요로 하는 전 세계 제조업체와 미국 정부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지금 은값 상승을 바라는 것은 은의 생산에 크게 의존하는 멕시코와 페루, 칠레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점들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와 비춰보았을 때 은을 향한 무모한 게임은 스톱(stop)되어야 한다.


차현진 필자

금융전문가. 서울대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유펜) 와튼스쿨에서 공부했다. 대통령비서실, 미주개발은행(IDB)에서 일했으며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을 거쳤다. 저서로는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