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비이성적·비인간적이며, 우리는 이성적·인간적’이라는 이미지, ‘그들은 무엇이든 모두 틀리고, 우리는 무엇이든 모두 맞다’는 담론의 끊임없는 확산. 북이 이성적으로 보이거나 옳게 보이는 모든 것은 보도되지 말아야 하며 보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비이성적이거나 틀리게 보이는 것에 국한된다. 이를 위해 결국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게 된다.”

‘북의 악마화 프레임’으로 요약되는 전쟁 저널리즘이 한국 보수언론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70년을 넘긴 분단과 대결의 민족문제를 해소하려면 이 전쟁 저널리즘부터 해소해야 한다. <편집자 주>

 

오는 9월로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주요한 걸림돌은 무엇일까?

여러 걸림돌이 있겠지만, 필자는 ‘전쟁 저널리즘에 갇힌 남한의 일부 보수 언론’도 주요한 걸림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부 보수 언론이 ‘전쟁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계속 한반도 문제를 보면서, 남북 정상회담 등 ‘전쟁에서 평화로’ 한반도 상태를 변화시키려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계속 발목을 잡으려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 저널리즘’은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평화 저널리즘’과 대비해 사용한 단어다. ‘전쟁 저널리즘’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출발한 저널리즘이다. 전쟁은 한 정부가 수행하는 가장 비인간적 인간파괴행위이면서, 또 어찌 보면 극단적인 정치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패배하면 해당 정부가 치명적인 손실을 떠안게 되는 탓에, 해당 정부는 자국민이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선전전’을 벌여나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모든 정부는 전쟁 때 전시언론통제를 하고, 이를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들은 다 그르고, 우리는 다 옳다는 보수언론의 전쟁 저널리즘

정부가 이런 전시언론통제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우리’와 ‘그들’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언론을 통해 ‘그들은 비이성적·비인간적이며, 우리는 이성적·인간적’이라는 이미지가 끊임없이 확산돼나가길 원한다. 간단히 얘기하면 전쟁 때 정부는 “그들은 무엇이든 모두 틀리고, 우리는 무엇이든 모두 맞다”는 담론을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보이거나 옳게 보이는 모든 것’은 보도되지 말아야 한다. 보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비이성적이거나 틀리게 보이는 것’에 국한된다. 더 나아가 그들이 옳지 않게 보이게 하기 위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상태가 강화되면 국민들은 그들을 ‘악마’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전쟁 저널리즘은 국민들에게 “악마와는 대화가 불가능하며, 다만 폭력을 통해 무찌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모든 국민은 악마를 무찌르는 성전에 총동원된다.

이런 전쟁 저널리즘의 속성은 현재 남쪽의 보수 언론들이 북한을 다루는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보수 언론들은 ‘현송월 사형 보도’ 등 북한 관련 오보를 양산하고, 북한의 호전적인 속성만 골라 보도한다. 이들은 또 북한이 위협적인 발언을 하든, 대화를 제의하든 상관없이 일관되게 북한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남한이 하면 ‘대화 제의’이지만, 북한이 하면 ‘대화 공세’로 전락하고 만다. 모두 ‘북한 악마화 프레임’에 따른 결과다.

이런 전쟁 저널리즘에 빠진 남한 보수 언론들은 당연히 북한과의 대화에 비판적이다. ‘악마화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상대방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악마는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는 존재다. 악마는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며, 선한 행동이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나 대화에 앞서 악마인 대화상대방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합의하는 데도 머뭇거리게 된다. 악마의 속셈을 모르기 때문이다.

악마화 프레임과 관련해 잠깐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남한 시민들이 놀란 대목 중 하나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밝게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한다!’는 것이었다. 당일 오전 9시 30분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온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은) 남측으로 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 말을 건네자, 즉석에서 웃으면서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고 제안을 하며 문 대통령의 손을 이끌고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김 위원장은 이밖에도 당시 (회담 만찬을 위해)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지고 왔다며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멀리서 온…”이라고 말하다가, 웃음을 머금고 “아,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고쳐 말하기도 했다.

당시 웃고 농담도 하는 김 위원장의 이런 모습은 남쪽 시민들 대부분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남쪽 시민들이 그동안 매스컴 등을 통해 보아온 김 위원장은 호전적이고 포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엔의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미국과 맞짱을 떠 전쟁위기를 부추기는 위험인물이며,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2013년 12월 처형한 냉혈한이었다. 많은 남쪽 시민들은 이에 따라 김정은 위원장을 철없는 어린아이나 미치광이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가 우리가 생각해왔던 측면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 것이다.

4·27 정상회담에서 국민들이 느꼈던 이런 차이야말로 무엇보다 남한 언론이 그동안 전쟁 저널리즘적 태도로 북한을 악마화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 악마프레임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남한 보수 언론의 이런 전쟁 저널리즘과 북한 악마화 프레임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하는 것과 ‘이것은 변하지 않는 상수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남한 보수 언론의 전쟁 저널리즘과 북한 악마화 프레임이 앞으로의 한반도 정세 변화에서도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전쟁 상태에서 평화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정상을 비롯해, 각계각층이 앞으로 더욱 자주 만나고, 새로운 제안을 주고받고, 그것을 실행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북한을 악마로 보는 시각으로 매사를 재단한다면, 이런 변화가 속도를 내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악마화 프레임이 더 강력하다면, 미국 등의 보수적 움직임과도 연동해, 한반도 변화의 큰 흐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질문 중 우선 남한 보수 언론의 전쟁 저널리즘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살펴보자.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형성과정은 국가의 폭력적 개입에 의한 부분이 컸다고 생각된다. 보수 언론의 전쟁 저널리즘도 출발은 국가에 의한 전시 언론 통제적 보도 통제에서 비롯된 바 크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전쟁 저널리즘적 색채가 강한 매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조선일보>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례를 보자. 첫 사례는 1970년대 말 조선일보가 유엔에서 "한반도 중립화 통일안"이 제출된 걸 보도했을 때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조선일보가 중앙정보부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위험한 기사를 보도했다며, 글을 쓴 리영희 기자와 선우휘 편집국장을 구속했다. 이중 선우휘는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또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에는 <월간조선> 등에 대해서도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안기부가 기사 내용을 파악, 인쇄기를 멈추게 하고 기사를 들어내거나 고치도록 하는 일이 거의 월례 행사”였다.

이런 채찍과 함께 전두환 정부 들어서면서 시행된 신문 육성 정책들은 어느새 전쟁 저널리즘이 보수 언론들에 내면화되었다는 평가를 낳는다.

하지만, 문제는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이런 전쟁 저널리즘을 추동하는 주체가 정부에서 보수 언론 자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는 북방정책을 시도했던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고 다시 보수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지나면서 더욱 증폭된 것으로 평가된다.

노태우 정권은 당시 공산권과 수교를 하고 북한과 무역 등 교류를 허용하는 소위 북방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정전상태 해소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또 남한 사회의 중요한 전환점인 1987년 6월항쟁 뒤에 직선제를 통해 성립한 정권이라 정권적 취약성도 크지 않았다. 따라서 노태우 정권은 이런 전쟁 저널리즘적 성격을 유지시킬 이유가 적었다. 아니, 북방정책을 취하면서 오히려 언론의 전쟁 저널리즘적 성격을 불편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이런 불편함은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 교류를 확대해나가려고 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더욱 커졌다.

 

정권보다 앞서나간 보수언론의 북 때리기

이때부터 남한의 보수 언론은 스스로 전쟁 저널리즘을 수호하는 주체가 됐다. 보수 언론은 끊임없이 ‘퍼주기 논란’이나 ‘종북 논란’ 등을 이끄는 주체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에 이르면 북한 악마화 프레임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당시 조선일보의 ‘인간어뢰’ 기사를 보자. 조선일보는 2010년 4월 22일치 1면에 ‘“北 인간 어뢰 조심하라” 해군 올 초 통보받았다’(주용중·유용원 기자)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군 당국은 작년 11월 대청해전에서 패배한 북한이 남한 해군에 대한 보복을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정황을 몇 차례 포착했던 게 사실”이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치 4면에는 ‘‘北 인간어뢰’ 바닷속 자살폭탄‘(주용중·유용원 기자)라는 제목으로 “북한이 동·서해 1개 여단씩 편성”했다며 ‘탈북 시인’ 정진성 씨의 “북한의 인간어뢰부대는 잠수함 승조원들보다 우대받고 있으며 모든 훈련이 자폭위주로 돼 있다”는 내용을 여과 없이 실었다. 이 기사는 그 뒤 국내에선 “오보인데 왜 정정기사를 내보내지 않느냐”는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조선일보 등이 이런 확인되지 않은 이런 ‘인간어뢰류의 기사’를 양산함으로써, 초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던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이 북한에 의해 폭침당했다고 조급히 결론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보수 언론이 오히려 정부를 전쟁 저널리즘과 북한 악마화 프레임으로 끌고가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고 생각한다.

 

비용 너무 큰 북 악마화 프레임, 바꿔야

과연 이런 프레임이 한반도 평화 시대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한반도 상황은 ‘전쟁에서 평화’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런 변화는 우리 국민들이 북한 악마화 프레임에서 벗어난 시대를 의미한다. 또한 시점을 바꾸어 본다면, 보수 언론의 입장에서는 전쟁 저널리즘과 북한 악마화 프레임의 대중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음을 느끼는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커 보인다. 그 비용이 우리나라의 장래 발전 가능성을 좀먹는 것이라면, 전쟁에서 평화로의 변화를 추구하는 정부와 이를 위험한 행동으로 여기는 보수 언론 모두 이런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정부와 언론, 학계, 그리고 시민사회 모두 언론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질 때다. 우리 보수 언론에 내재돼 있는 이런 전쟁 저널리즘과 북한 악마화 프레임을 정확히 진단하고 어떻게 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 우선 서로의 의견을 속 시원히 드러내놓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해본다.

이 과정에서 북한도 주요한 변수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북한이 진정 한반도가 전쟁 상태에서 평화 상태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속내를 몰라준다고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속도감 있고, 과감한 조치로 외부 사회에 그것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야 뿌리 깊은 북한 악마화 프레임을 다시 보자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 전 평화연구소장, 북한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