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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칼럼] 추월 시작한 80년대생, ‘코리아 스탠더드’ 세워라

by | 2021년 1월 13일 | 정책

1980년대 태어난 아이들이 유년기였던 3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당시에 삼성전자가 일본의 소니를 제칠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한국의 경제력이 G7안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대중문화 콘텐츠 분야를 보자. 한국의 가수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의 프로선수들이 해외 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칠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최근 1980년대생 저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추월의 시대> 에 참여한 양승훈 필자는 신축년 새해를 맞아 어느덧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게 된 한국의 위치를 점검한다. 나아가 한국의 앞날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을 두루 살핀 뒤 대한민국의 성취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수혜를 온전하게 입은 첫 세대인 80년대생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제안한다. [편집자]

#과거와 달라진 한국의 위상
  80년대생 마주한 비관론·낙관론
#선진국, 팬데믹 상황서 위기
  한국, 소프트파워 부상
#’국뽕’이 맹목적인 자화자찬?
  현실인식 속 높아진 자긍심
#추월의 시대, 한국의 방향은
  국제사회에 새로운 롤모델 제시

한국은 분명히 30년전, 20년전, 10년전 보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커졌고 국력이 신장했다. 90년대 이전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국전쟁 후 ‘한강의 기적’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한국의 실력에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국력은 현 시점에서 정점을 찍고 하강할까? 아니면 더 상승할까? 섣불리 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강력하게 한쪽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쌍방으로 탄탄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점은 있다. 앞으로의 시간들은 기성세대가 된 80년대생들이 사회의 중추에 나설 시기라는 점이다.

신축년 새해의 비관론과 낙관론

한국의 하강을 점치는 입장에서 보자. 먼저 인구구조 측면에서는 지난해 사망자 숫자가 출생자 숫자를 넘어서 사상 첫 인구의 자연감소가 이루어지는 ‘데드 크로스(dead cross)’가 닥쳐왔다. 곧 닥칠 일이라고 언론에서 줄곧 언급해 왔던 일이건만, 막상 닥치니 충격이 적지 않다. 연초부터 정치권의 큰 화두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합의의 문제인 것도 서글픈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풀어가는 문제에 있어서, 거대한 경제규모에 비해 취약한 편이다. 태어나는 이도 많지 않은데, 태어난 생명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회라는 비관론이 자연스럽다.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의 장면. (사진=넷플릭스)

한편 전혀 다른 흐름도 있다. 얼마 전부터 <스위트홈>이란 이름의 네이버 웹툰 기반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가 세계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스위트홈>은 <사랑의 불시착>이나 <킹덤>의 흥행처럼 아시아권 중심이나 장르 팬의 일각을 공략하는 것을 넘어서 넷플릭스 세계의 좀 더 다양한 시청자들을 공략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스위트홈>은 한국의 시청자 눈높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난 드라마처럼 보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스위트홈>의 제작비가 많긴 하지만 한국에서 사회적인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드라마로 보기는 어렵다.게다가 한국 웹툰 기반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말하자면 <스위트홈>은 한국의 콘텐츠 생태계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제작됐고 글로벌한 인기를 얻고 있다. 2010년대에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K팝의 확장성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린 것처럼, 넷플릭스 등이 경쟁하는 흐름이 2020년대에 한국의 콘텐츠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거라고 전망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의 국력 상승이란 흐름은 문화콘텐츠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국 내 산업기반이 약해진 이후 오히려 영향력이 커졌던 20세기 중후반 영국의 문화콘텐츠 흐름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애플이 현대기아차를 자율주행 전기차의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뉴스의 신뢰성 여부로 설왕설래하는 연초의 또 다른 풍경을 보자. 유튜브가 K팝을 팝시장의 주류로 끌어올렸듯이 넷플릭스가 K드라마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전망에 포개 본다면, 애플이 주도한 스마트폰 시대가 삼성전자에게 노키아와 소니를 추월할 기회를 제공했듯이 테슬라가 주도한 자율주행 전기차의 시대가 현대기아차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전망 역시 결코 과하지 않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보여준 모습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약점이 많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상황이 전개됐다. 유럽 국가들이 역외생산(offshoring)으로 자국 내에 마스크를 생산할 공장이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처럼 모든 시민에게 마스크 착용을 권장할 수 없었던 약점이 됐다. 2020년 2월 말 ‘마스크 대란’이 발생했을 때는 한국은 대기업 출신의 ‘생산기술 프로’들이 중소 규모 마스크 공장까지 찾아가서 공정 설계를 개선하고 생산성을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 법을 전수하며 활약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었다.

물론 한국 정부가 방역 주체인 의료진과 피해자들인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하고 고통을 떠넘기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문화콘텐츠 수출로 국가 이미지가 개선된 효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가 ‘집콕’을 하는 상황에서 굳이 한국의 식가공제품 수출량이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소프트파워가 소비재 수출을 끌어올리는 효과라 볼 수 있다. 한국의 국가역량을 믿지 못한 야당 측의 ‘K방역’에 대한 비판 공세가 생각보다 먹히지 않고 있다. 정부의 실수와 한국의 국가역량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부를 비판하려니 독감백신은 ‘살인 백신’이라 규탄하다가 급히 만든 비싼 코로나19 백신은 무조건 빨리 내놓으라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지기 일쑤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산업의 역량과 전망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위상은 지금이 정점이 아닐 수 있다. 둘째, 한국 사회가 어떤 구간을 지나고 있는지 오히려 한국인들이 감 잡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더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가 되지 않으면 미래는 어둡다는  지적도 한국 사회가 현재의 서 있는 위치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엔 역량이 있고, 여력이 있기에 생명을 더욱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암담하게 생각하는 다른 사회 문제들도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증명하기도 하고,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와 한계 지점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의 ‘국뽕’은 근거 없는 자화자찬인가?

이런 긍정적인 연상 작용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따라오기도 한다. “그런 시선 자체가 ‘국뽕’ 아닌가?” 한국 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를 해보자는 논의에 대한 답변조차도 ‘국뽕’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이쯤 되면 “왜, ‘국뽕’이면 뭐가 문제입니까”라고 답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전에 용어부터 정의해보자.

소위 ‘국뽕’을 사회학적 견지에서 정의하자면 ‘제 나라의 우수성을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비관적으로 한국의 앞날을 보는 이들은 반대편의 의견에 대해 ‘국뽕’에 정신을 못 차려 한국의 불안한 현실을 망각하는 이들이라고 힐난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한국인이 외국인들에 대해 ‘두유 노?’(Do you know?)를 남발하는 것을 봤을 때, 자국에 대한 (주로 긍정적인) 평가를 강권하는 것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어떤 다른 종류의 자각은 ‘제 나라의 우수성을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상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국우월주의 신앙을 갖기에는 한국이란 나라의 인지도가 아직은 떨어진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알고 있어 되레 ‘두유 노?’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미국이나 유럽의 중소도시에 사는 평범한 시민에게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한국은 원래 우리 지역인데 20세기에 독립한 나라”라고 말하면 이에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 실제로 2017년 미국의 여론조사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60%가량은 한국의 정확한 위치를 세계지도상에서 선택하지 못했다. 한국에 대해 안다고 해도 중국과 일본의 중간 쯤 되는, 혹은 두 나라 사이에서 개성 없는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을 것이 고작이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이 반박하고 다른 내용을 알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과연 ‘제 나라의 우수성을 맹목적으로 신앙하는 상태’일까.

4년 연속 ‘아시안 골든 글로브 어워즈’ 수상자로 뽑힌 손흥민(왼쪽)과 샌디에이고와 계약한 김하성. (연합뉴스=티탄저우바오 홈페이지, ISE 베이스볼 공식 트위터 캡처)

그런 맹목적 ‘국뽕’을 할 수 있는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인지도와 자부심이 충만한 나라들이다. 아시아로 치자면 중국과 일본이 그렇고,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과 러시아가 그렇다.  제3세계라 하더라도 이집트와 터키 등 나름의 역사적 기반이 탄탄한 나라들이 그렇다. 그런 나라의 ‘국뽕’은 한국과 전혀 양상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국뽕’과 비교만 해봐도 안다. 한국인들은 한국적 특수성을 우월성이라 우기지는 않는다. 그냥 남들이 보기에 잘한다고 볼 수 있는 것만 자랑한다. 손흥민의 활약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안에서는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하니, “세상에 안 그런 나라도 있어요?”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의 팬들이나 언론이 유럽리그에서 활약하지 못한 자국의 축구 스타들을 손흥민에 버금가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한국인들은 놀랄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신년 초부터  KBO 키움 히어로즈의 김하성 선수가 몇천만 달러 계약을 맺으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뉴스에 정작 한국 야구팬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국 스포츠팬들은 대체로 ‘국뽕’에 절어 있기는커녕 본인들이 숭앙하는 미국의 메이저리그나 유럽 축구리그 관점에서 한국 선수들을 평가 절하하고 조롱하는 데에 훨씬 익숙하다. 가령 2013년에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진출할 시에는 “메이저리그 팀들은 절대 류현진 따위를 포스팅하기 위해 1천만 달러 이상 쓰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인터넷에 넘쳤다. 손흥민이 토트넘에 입단했을 때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글들은 국내 축구팬들에게서 더 많이 나왔다.

한국의 경우 식자층, 특히 그중에서도 진보적인 이들이 ‘국뽕’으로 자긍심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평가절하하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른바 ‘한푸 공정’나 ‘김치 공정’에서 보인 중국 민족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한국 민족주의는 동일한 수준에서 문제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데, 이런 논란 자체를 ‘동아시아 내셔널리즘의 문제’로 치환하는 시선에선 그 차이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나 애국주의 등을 계속해서 지성적이지 않은 것, 보수적인 것으로만 밀쳐내기만 한다면 유럽과 같은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유럽에선 국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하는 것은 극우파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애국주의 교육을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국기와 애국가는 운동세력에게도 활용되는 등, 저항의 도구였다. 그러나 최근엔 ‘태극기 시위대’로 대변되는 것처럼 극우파의 전유물이 될 조짐도 보인다. 과연 유럽의 길을 우리가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역설적으로 우리는 대중의 낙관과 적극성을 해석해야 하는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최근 필자를 비롯해 80년대 생이 참여한 책 <추월의 시대> 역시 ‘국뽕’이라 폄하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런 일방적 평가에서 벗어나고자 ‘현명한 낙관론’이라고 표현했다. 이를 도출하기 위해 한국의 산업화가 어떤 문맥에서 성공했는지, 그것을 성공시킨 다양한 주체들은 누구인지를 밝혔다. 민주화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두 개의 성공 서사가 서로를 적으로 겨냥하고 있지만 한국의 전근대사까지 포괄하는 좀 더 넓은 역사적 문맥에서 화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성공의 유산 속에서 자라난 후속세대가 그 화해를 더욱 쉽게 주선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한국은 어떤 ‘롤모델’이 될 것인가?

향후 한국의 위상이 더 높게 올라가더라도 한국 사회는 국제 사회에 어떠한 ‘질서’를 제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물음표다. 우선 그럴만한 인구와 국토 등 물리적인 ‘크기’ 측면에서 다른 선진국보다 열세에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세계시민들에게 ‘멋진 삶’ 혹은 ‘롤 모델’로 불릴 만한 하나의 예시, 나아가 ‘코리아 스탠더드’를 세울 수 있다.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수천 년 동안 강대국으로 살아온 경험치가 극히 적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은 따라 할 수도 없는 특질이 있다. 첫째, 동질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규모가 남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다는 점, 셋째, 혁신이 강제된다는 점, 넷째, 식민지 출신이라는 점, 다섯째, 보편을 추구하는 가운데 고유한 특성을 보여주는 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태도일 것이기에, 다른 전근대사를 가진 나라들이 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질들은 강대국의 특질이 아니라 ‘약소국의 축복’이란 점에서, 현재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이 그중 일부라도 따라하고 그 사회의 기준으로 삼기에 더 나은 특질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배울만한 것’으로 다른 사회의 목록에 올라갈 때, ‘코리아 스탠더드’라는 것도 그저 우리의 망상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은 이제 다시금 우리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 왔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또 다른 ‘코리아 스탠더드’를 우리 내부에서 논의하고 이를 팬데믹으로 야기 된 21세기 뉴노멀 시대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향상해야 한다.

한국이 한국전쟁 이후 지난 70여 년 간 추격과 추월을 했다면 이제 목표는 여러모로 우리가 세상의 기준이 되는 방향으로 추월하는 것이다. 저출산, 인구절벽, 산재, 등등의 것들을 지금까지 우리가 축적하며 만들어온 경로를 고려하며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성취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수혜를 온전하게 입은 첫 세대인 80년대생들이 기성세대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선언하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양승훈 필자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산업사회학과 과학기술학을 공부하고 연구한다. 학부에서 정치학을,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대우조선해양에서 5년간 근무했다. 2019년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을 다룬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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