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AFP/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오는 20일 열리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미국을 방문한다. 송 의원은 여야 의원 6명으로 구성된 외통위 방미단 대표로 오는 19일부터 24일까지 위싱턴D.C.를 방문해 미국의 한반도 관련 인사들을 두루 만날 예정이다.송 위원장은 방미에 앞서 <피렌체의 식탁>에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한미동맹과 대북관계 등을 주제로 자신의 칼럼을 기고했다. 송 위원장은 바이든 정부가 노딜로 끝난 하노이 정상회담이 아니라, 북미간 협정을 맺었던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바이든 당선 이후 첫 공식 행사가 필라델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헌화로 시작된 것을 환기하며 가치동맹으로서 한미동맹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편집자]

#트럼프의 일방주의 대외정책 폐해  바이든 정부, 북핵문제 새 접근 필요#바이든, 부시의 햇볕정책 묵살 비판  싱가포르 회담 정신 계승·발전할까?#北 대표는 대리인, 김정은 손에 달려  정상 간 접촉하며 협상 진전시켜야#인권문제 정치적 무기로 남용 경계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인 조 바이든 행정부가 곧 출범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전 세계는 미국의 벌거벗은 민낯을 많이 보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 정권의 슬로건이 필자에게는 ‘Make America Greedy Again’으로 들릴 정도였다. 바이든 정부가 ‘아메리카 퍼스트’ 식의 탐욕(greed)이 빚어낸 과오를 되풀이하진 않으리라 확신한다. 과도한 방위비 분담 압박 등으로 동맹관계를 삐걱거리게 했던 한반도정책과 소리만 요란했지 별 성과는 없었던 북한정책에도 큰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싱가포르·하노이 회담, 그리고 이란의 한국 선박 나포

기존 국제관계의 룰을 파괴하는 듯한 트럼프 정권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의 폐해를, 우리는 최근 이란의 한국 화학물질 운반선 나포사건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이란의 한국 선박 나포는 트럼프 정권이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함께 참여한 이란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깬 뒤 경제제재를 강화하면서 한국의 이란산 원유 대금 지불을 동결시킨 데 그 원인이 있다. 이로 인해 한국과 이란 간에 급증하던 교역도 멈춰 섰다. 연이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등을 통해 급진전하는 듯 보였던 한반도 정세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도 미국이 그어 놓은 대북제재 한계선(레드라인)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맥락에서 탈(脫)트럼프주의를 선언한 바이든 정권의 출범에 우리는 큰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에 이란이 한국의 대형 선박을 해양환경오염이란 명분으로 나포한 것은, 역설적으로 경제제재로 국내 사정이 어려운 이란이 트럼프 정권 때와는 다른 해결 방식을 기대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려는 시도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체결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즉 이란 핵합의를 탈퇴한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초강대국 미국의 약속과 책임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신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 미국이 6차례 핵실험과 핵보유를 선언한 북한과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은 이중적 태도에 가깝다. 오바마 정권 때 이란 핵합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던 토니 블링큰 국무장관 내정자와 제이크 셜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로서는 황당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북한 역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모두가 참여한 국제적 합의를 정권 교체 후 일방적으로 무효화한 트럼프의 행동에 대해 깊이 우려했을 것이다. 그동안 미국과 합의한 것들이 미국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주장해온 북한에게 트럼프의 이란 핵합의 탈퇴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직접 만나 북핵 해결을 통한 북미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고 했던 시도 자체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글로벌 이벤트였다. 한때 온 국민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난 서방 세계의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보다 훨씬 먼저 북미 간 정상회담 구상을 펼친 지도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2007년 11월 대선 기간 중에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이에 대해 국정경험 부족의 소치라고 공격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바마는 집권 8년 동안 '전략적 인내'라는 구호 아래 북핵 문제를 사실상 방치했다. 북미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는 이란 핵합의,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를 이루었지만 북핵 문제는 수수방관했다.

바이든 대통령 시대에 북핵 및 대북 정책은 트럼프 정권과 분명히 달라지겠지만, 바이든은 자신이 부통령으로 참여했던 오바마 정권 때의 ‘전략적 인내’의 실패도 되풀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2017년 5월 25일 송영길 대통령 특사가 크렘린궁을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사진=송영길 의원실)

필자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해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인천시장 시절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우호훈장을 받기도 해서 서로 낯익은 사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50분 정도 대담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대통령께서는 북미 간의 직접 대화, 평화적 해결 원칙을 강조하시는데, 문제는 중국과 러시아조차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세계 지도자 중 단 한 사람도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 대화한 사람이 없다. 푸틴 대통령님부터 라브로프 외교부 장관을 특사로 보내서 대화를 시도하실 필요가 있다.”

필자의 제안에 푸틴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대답했고, 결국 북한에 특사를 보냈다.

시진핑 주석도 처음엔 김정은과 만남을 외면했다. 북미 간 접촉이 시도되고 나서야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이 이루어졌다.

사람 사이의 문제도 그렇지만 국가 간 이해가 상충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가 직접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이해 당사자는 물론 주변 국가들이 나서서 만나고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외교를 전개하고 북미 정상회담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 대표적이다. 화염과 분노, 핵단추 크기 논란으로 점증하던 한반도 위기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고비를 겨우 넘긴 뒤 그해 6월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이 첫 회담을 가졌다. 회담은 그래서 더욱 역사적이고 극적이었다. 휴전협정 이후 7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북한 지도자와 미국 대통령이 직접 만나 협정을 맺은 것은 2000년 남북 정상이 분단 52년 만에 처음 만나 6·15 공동선언을 맺은 사건에 비견될 만하다.

그러나 싱가포르 회담 결과에 대해서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세력은 물론 우리나라 보수세력과 언론, 논객들의 비판도 거셌다. 싱가포르 합의는 구체적으로 이행되지 않았고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최종 비핵화 목표를 합의하고 '행동 대 행동'으로 이행하는 포괄적 합의에 실패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필자는 워싱턴에서 스티브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과 한 시간 넘게 대담하면서 하노이 회담 실패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김혁철과 비건의 실무회담에서 실질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깊이 들어가보면 김혁철을 비롯한 북한 협상대표들에게 재량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 협상했다가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북한에서 숙청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재가를 받아야 가능했던 것이다.

북미 간 실무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 없이 모든 의제를 정상회담에 떠넘긴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과잉 기대와 오판으로 합의가 깨진 것이다. 특히 회담 내내 미국 국내에서 진행 중인 마이클 코언(트럼프 개인 변호사) 청문회가 더 큰 뉴스의 초점이 되어 트럼프 대통령은 협정을 체결할 의욕을 상실했고 존 볼턴 당시 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까지 반대하는 상황에 부닥쳐 하노이 회담은 결국 노딜로 끝났다.

하노이 회담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북한의 모든 협상 대표는 단지 대리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협상한다는 생각으로 서면으로 미리 의견을 제출하고 북측에서 검토 분석하도록 여유를 주면서 협상을 진전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바이든, 싱가포르 합의를 발전시킬까?

트럼프-김정은의 싱가포르 합의는 김대중-김정일의 6·15 선언처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또 싱가포르 합의는 제3항에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과연 바이든 정부는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방문 때 바이든 자서전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 나의 삶, 신념, 정치>를 읽어보았다. 바이든 당선자의 삶의 궤적과 철학, 생각을 깊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는 향후 미국의 대(對) 한반도·북한 정책의 향배를 짐작하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바이든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지지자였는데 특히 두 장면이 그 책에서 인상적이었다.

첫째는,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디스 맨(This man”이라고 지칭한 최악의 정상회담 사건 이후 바이든이 부시 대통령을 만난 대목이다. 부시 대통령은 바이든에게 “당신의 친구 김대중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바이든은 그 대목을 이렇게 서술했다.

부시 대통령은 몸을 숙여 몇 달 전 집무실에서 한국 대통령과 함께했던 장면을 재현하듯, 내 무릎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이라고는 거기 있는 그 작은 공산주의자(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지칭)를 믿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어요.”나는 손을 뻗어 대통령의 무릎을 토닥거리며 말했다.“대통령님. 당신이 그의 무릎을 토닥일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지요. 그는 ' 내가 거기 있는 작은 공산주의자와 똑같이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중략)당신은 그(김대중)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 이 햇볕정책은 실패입니다. 우리는 빠지겠어요.’대통령님, 당신은 분명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한국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게 그가 화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한국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햇볕정책은 실패했다고 단정한 부시의 성급한 결정을 바이든이 에둘러 비판한 대목이었다. 북한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한국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셈이니 동맹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이든의 대북정책과 관련한 기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리처드 루거 상원의원과 나는 북한과 직접 접촉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김정일이 핵무기 제조에 이용할 수 있는 더 많은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 불가침조약을 목표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바로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나는 네오콘이 ‘정권교체’를 위협하는 것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마치 가톨릭 신자에게 삼위일체를 부정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회고록 330쪽 하단)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바이든 대통령이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첫 한미 정상회담을 할 때, 부시가 김대중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의 대북정책은 트럼프와 함께 실패했습니다. 4·27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회담에서 우리는 빠지겠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지는 않다. 바이든은 기본적으로 부시나 트럼프와 다르고 오바마와도 차이가 있다. 상원의원으로 38년이나 일했고 상원의원 초선 시절부터 보기 드물게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두 번이나 상원 외교위원장을 역임했다. 군사적 압력과 경제제재보다는 적극적인 개입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11월 방미 중에 만난 브래드 셔먼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과 싱크탱크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트럼프의 대북정책 중 단점은 보완해야 하지만 싱가포르 회담 정신은 계승 발전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회담과 4·27 판문점 선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싱가포르 회담을 부정하는 것은 북미 간, 한미간에 여러 가지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2018년 6월 12일 오후 싱가포에서 열린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문에 서명했다.(아래 사진) 이는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앉은 이)과 북측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한 뒤 65년 만이다. (서울=연합뉴스/카메라프레스·스트레이츠타임스)

북한 인권문제의 정치 무기화 경계해야

인권문제는 인류 모두가 향상해야 할 공감대적 가치이다. 그러나 실질적 인권개선보다는 인권문제가 주권침해, 정권타도와 같은 정치적 무기로 남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아이들과 임산부를 비롯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00만 명에 달하는 북한 주민들이 영양부족과 결핵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들을 구제하는 것은 등한시하면서 김정은 정권 타도와 같은 정치적 대북전단 살포에 열을 올리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지난해 가을 미국 대선 직전 한국을 방문한 바이든 상원의원 보좌관 출신인 프랭크 자누치 맨스필드재단 대표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북한 인권을 바라보는 바이든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그의 발언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바이든은 북한의 인도적 지원에 대하여 적극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북인권법상의 인권특사를 정해 북한 당국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바이든의 구상이었다. 1999년 11월 미국 대선 당시만 하더라도 앨 고어가 당선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시가 당선되어 대북 인권특사를 잘못 선정하였다. 그 특사는 수백만 달러를 쓰면서 서울에 와서는 북한을 비난하는 일만 했다. 북측을 방문하거나 당국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인권문제가 북한을 공격하는 주제로만 활용돼서는 안 된다.”

최근 필자가 대표 발의하여 통과된 남북관계발전기본법 개정안(일명 대북전단살포금지법) 통과를 둘러싸고 국내 보수 야당과 언론, 그리고 미국의 일부 의원과 시민단체가 연일 비판적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필자는 미국의 여야 의원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 매체인 ‘38 North’에 기고도 했다.

군사분계지역의 공개된 대북전단 살포 행위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외부정보 유입과 소통을 방해한다는 것이 탈북한 사람들의 중론이다. 제3국에서의 전단 배포나 USB 살포 등은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모든 살포 행위가 금지되는 것도 아니다. 동법 제24조 제1항에는, ‘누구든지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켜서는 아니 된다’라는 조건이 있다. 즉 국민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키는 경우에 한해서 처벌한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 제한 원칙으로 판결을 통해 확립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과 같은 기준이다.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는 전쟁 중인, 즉 휴전상태이다. 아직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 북한 정권 타도를 선동하는 대북전단은 일종의 심리전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있다. 1994년 제네바 북미회담 미국 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의 ‘VOA(미국의 소리)’ 방송 인터뷰 내용처럼 민감한 지역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행위는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반하는 대북정책의 문제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 그리고 대다수 탈북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해보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일부 유명 탈북자들의 과장된 발언을 중심으로 대한반도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동맹 존중을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에서 미국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된 대한민국의 국회 입법을 간섭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이 될 것이다.

미국은 쿠바 난민, 이라크 망명자 등의 일부 의견을 자기 입맛대로 청취하여 대쿠바, 대이라크 정책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전력이 있다. 필자는 2003년 이라크전쟁 발발 이후 이라크 파병에 앞서 국회대표단으로 바그다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CIA가 선호했던 이라크 망명 정치인 찰라비를 만나 대화한 적이 있다. 그런데 찰라비가 주장하는 내용이 아주 의심스러웠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웠던 이유(대량살상무기 개발, 나중에 허위로 판명)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기 때문이었다. 바이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내의 어느 누구와도 실제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라크 망명자인 아흐메드 찰라비와 소통했는데, 그는 사담 후세인의 대량무기 프로그램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증거를 조작했고, 미군이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환영받을 것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럼즈펠드, 체니, 울포위츠(강경 네오콘들)가 찰라비의 정보를 통째로 사들였다는 은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가장 한탄할만한 것은 (그들이) 이라크에서 지지층도 없는 망명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해 11월 11일(현지시간) 재향군인의 날을 맞아 부인 질 바이든 여사와 함께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헌화하기 전에 손을 가슴에 얹고 있다. (필라델피아 AP=연합뉴스)

가치동맹으로서의 한미동맹 정신 회복

바이든의 대선 기간 선거구호 중 하나가 “Restore the soul of America”다. 아메리카의 영혼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미동맹 정신도 회복되어야 한다. 한미동맹은 단순한 경제·군사적 이익동맹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주의,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가치동맹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을 터무니없이 요구하고, 주한미군 감축 협박 등으로 주한미군을 용병 수준으로 취급하는 트럼프 정부의 동맹 폄하 정책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바이든 당선 이후 첫 공식행사가 필라델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헌화로 시작한 것은 의미가 있다. 지난해 11월 필자가 워싱턴 방문 당시 한미동맹 지지 결의안이 미국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우리 국회에서도 지난해 12월 정기국회 때 한미동맹 지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국과 미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한미동맹 정신의 복원이 긴급하다는 이심전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선 미국의 어떤 전문가들보다 더 우리가 전문가다. 북핵문제와 한반도 문제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생명과 이해가 걸린 당사자다. 따라서 한미동맹에서 적어도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도하고 미국을 설득해 나가는 자주적 자세가 필요하다.

한미동맹의 정신을 ‘같이 갑시다(Go Together)’로 표현하는데, 필자는 이에 덧붙여 역할분담(Role of Division)을 강조하고 싶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조를 맞출 수는 없다. 서로 역할분담을 통해 한미 간에 시너지 효과가 나오도록 북핵문제를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자주적 관점에서 한미 협력관계를 견인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미국은 옛소련과 함께 한반도 분단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냉전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국가로서 냉전시대의 마지막 잔재인 남북한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1965~1975년 사이에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이 1995년 국교 수립을 통해 사실상 친미동맹국으로 변화된 것처럼, 북한에 대해서도 국교 정상화를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친미 국가로 바뀔 수 있도록 과감한 사고 전환과 행동·전략을 추진해나갈 때다.

이와 관련해 전 세계 어느 나라라도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초토화할 수 있는 초강대국 미국의 신중한 자세를 강조한 바이든의 이야기를 그의 자서전에서 옮겨본다.

나는 군사전략 전문가인 엔서니 코데스먼의 청문회 마무리 마지막 발언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 경솔하게 움직이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스미르나 출신 시인 비온이 이천 년 전에 언급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린 소년들은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는 장난으로 죽지 않고 진짜로 죽는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고 안락의자에서 결정할 일도 아닙니다.”

영문 기고문(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210114000688)


송영길 필자

1963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샀다. 광주 대동고 3학년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연세대 초대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됐으며 인천에서 7년 동안 노동운동을 했다. 서른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 인권·노동변호사로 살다 정치에 투신해 인천시장과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외교하는 민족이어야 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신념을 받들어 남북통일과 국리민복을 정치의 본령으로 삼아 활동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