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최근 편집 2020. 01-14. 19:01

[강원국의 ‘리더가 말하는 법’] 소통이 고통인 당신…완벽, 승리, 주역 욕심을 버려라

by | 2020년 11월 24일 | 강원국의 '리더가 말하는 법', 기획 · 연재




소통은 직장생활 내내 화두였다. 나는 스트레스에 매우 취약하다. 소통이 안 되는 조직에서는 불안하고 답답했다.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소통 잘 되는 조직이 필요했다. 소통은 내게 공기와 같았다.
 
소통은 쉽지 않다. 왜 쉽지 않은가. 소통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고, 힘들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베풀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상대를 배려하기까지 해야 한다. 생각의 무게중심을 내가 아닌 상대방으로 옮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소통은 헌신도 요구한다. 소통이 결실을 보려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헌신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소통만 외치고 바뀌는 건 없다. 그래서 소통은 어렵다. 나부터여야 해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소통의 다른 말은 고통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소통을 즐겨하는가

소통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다. 나는 듣기, 읽기만 하면서 50년을 살았다. 남의 말을 잘 듣고 남의 생각을 잘 읽었다. 학교나 직장 다닐 적엔 그러면 됐다. 잘 읽고 잘 들어, 잘 맞춰주면 인정받았다. 소통의 절반, 읽기와 듣기만 잘하면 됐다.
 
2014년부터 말하고 쓰기 시작했다. 강의를 하고 방송을 한다. 내 글을 쓰고 내 책을 쓴다. 해보니까 잘한다. 강의도, 방송도 잘한다. 심지어 진행도 잘한다. 책도 잘 팔린다. 소통의 나머지 절반, 말하기와 쓰기도 잘한다.
 
네 부류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읽기와 듣기에 능하지만, 말하기와 쓰기에 약한 사람, 두 번째는 말하기, 쓰기는 잘하지만 읽기와 듣기에 서툰 사람,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둘 다 못하거나 둘 다 잘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첫 번째와 두 번째다. 나도 직장생활 내내 첫 번째 부류였다. 말귀가 밝고 눈치가 빨랐다. 지금 돌이켜보니 찌질 했다. 읽기, 듣기를 잘하는 것이 뭐 그리 자랑이라고.
 
두 번째 부류, 그러니까 말하기와 쓰기는 잘하지만 읽기와 듣기에 게으른 유형은 사실 성립하기 어렵다. 읽기와 듣기에 게으른 사람이 말하기, 쓰기를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류는 자기 스스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네 가지를 모두 잘하는(?) 네 번째다. 나 같은 부류는 흔치 않다.
 
나처럼 10년 넘게 읽기, 듣기만 하면서 스피치라이터 생활을 한 사람은 많지 않다. 또한 나같이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말하기와 쓰기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도 많지 않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고나 할까. 말하기와 쓰기에서 이룩한 나의 혁혁한 소통 성과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말재주, 글재주를 타고나지 못했다. 노력으로 거둔 성과다. 그것도 가장 최신의 경험이다. 과거에 통했던 방식이 아니다. 지금 먹히는 소통 방법이다.

완벽은 백해무익, 시샘의 대상

나는 왜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왜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나오려고 허우적거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은 완벽해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완벽은 시샘의 대상이다. 질투만 불러올 뿐이다. 백해무익이다.

하지만 남의 밑에서 일할 때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나를 부리는 사람은 내 역량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60점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조직은 80점의 결과물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할 수 있냐고 묻는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순간부터 나는 80점으로 보여야 한다. 내가 60점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한다. 20점의 차이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또 그다음 일이 주어진다. 조직에서는 ‘더, 더, 더, 더!’를 요구한다. 역량이 80점에 이르면 100점의 결과물을, 100점에 이르면 120점을 기대한다. 이것의 무한반복이 직장생활이다. 기대치와 실제역량과의 갭을 메우는 값이 월급이다.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하고 기대에 부응하면 일취월장한다.
 
나의 매력은 허점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내게서 ‘똑 소리’ 나는 말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를 떠올리면 빙긋이 웃는다. 같잖게 여긴다. 그래서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 편한 정도가 아니라 말을 즐길 수 있다.
 
기대치가 낮은 상태에서 말하는 일은 거리낌이 없다. 100점에서 시작하면 떨어질 일밖에 없지만, 바닥에서 출발하면 올라갈 일만 남는다. 못 따봤자 본전이요 따는 만큼 이익이다. 나는 따야한다는 부담이 없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
 
나는 승승장구하지 않았다. 고교 입시에 떨어졌고 고등학교도 1년 꿇었다. 거기서 끝날 수 있었다. 이후는 덤이었다. 대우 다닐 때 사표를 두 번 냈다. 좋은 선배를 만나 대우가 문을 닫을 때까지 다닐 수 있었다. 그 이후 주어진 모든 건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언제 끝나도 감사한 인생이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행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시때때로 불끈불끈한다. 강의를 하고 방송에 나가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그럴 때마다 욕심과 싸운다. 첫째, 욕심 부릴 틈을 주지 않는다. 방법은 말을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특별한 걸 찾으려 하지 않고 평범한 말로 시작한다.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수록 욕심은 더 커지고 더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일단 운을 떼버리는 것, 그러니까 말하기를 시작하는 게 욕심을 다스리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둘째, 남들은 내 말에 그다지 관심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건 실제로도 그렇다. 적어도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관심이 없다. 설사 관심이 있다손 쳐도 사람마다 자신만의 표현방식이 있고, 그것들 사이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방식대로 말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말을 잘할 필요는 없다. 누구는 우스갯소릴 잘하고 누구는 논리적으로 주장을 잘 펼치고, 누구는 감성적인 말을 잘한다. 또 누구는 비판적인 말을, 또 누구는 해학적인 말을 잘한다. 지적으로 해박한 사람도 있고, 정곡을 잘 찌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설명을 잘하는 사람,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말을 잘할 순 없다. 이 가운데 자신에게 맞고, 자신 있는 말 중심으로 하면 된다.
 
셋째, 이번 기회가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고 그중 몇 가지만 보여주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보여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보여줄 만큼만 보여주고 못 다 보여준 건 다음 기회에 보여주자고 마음먹는다.
 
무엇보다 지금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몸이 건강하니, 살아있으니 가능한 일 아닌가. 더 이상 무엇을 더 욕심 부린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가진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자기 실력보다 더 실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일 뿐 현실이 될 수 없다. 시험을 잘보고 싶다고 해서 잘 볼 순 없는 것 아닌가. 공부한 만큼 볼 수밖에 없다. 좋은 점수를 받고 싶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음 시험을 잘 볼 생각을 해야 한다. 지금은 내 실력만큼 말하고 더 노력해서 다음에 말을 잘하려고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욕심은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욕심은 욕심대로 부리되 그에 맞춰 자기 수준을 높이면 된다. 말을 잘하기 위해 많이 읽고 쓰고 듣는 걸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어느새 내 수준이 올라가고, 결국 욕심이었던 게 더 이상 욕심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갈고 닦는 것도 욕심을 이기는 방법이다. 나는 강의할 때마다 이전 강의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말을 한마디라도 추가하려고 한다. 그래서 강의 때마다 그 한마디만큼 성장한다. 욕심을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한다.
 
말로 남을 이기려 하면 지기 마련

말은 상대가 있다.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소통의 걸림돌이다. 남보다 말을 잘해야지, 남에게 지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문제다. 사람에게는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 측은지심이 있다. 잘난 사람, 이기는 사람보다는 못난 사람, 지는 사람 편에 서고 싶다. 거만해 보이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이는 게 유리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져주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길 수 있으면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이기려는 욕심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적어도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내가 이기면 누군가는 지게 되고, 진 사람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어쩌면 말로 지는 게 관계에서 이기는 길 아닐까 싶다.
 
남을 이기려고 말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우선 말의 점유율이 높다. 말의 승부는 양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남보다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짧게 할 수 있는 얘기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이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의식의 흐름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한다. 군더더기와 중복이 많다. 한마디로 장황하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 순진할 뿐이다.

또한 말로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한다. 박학다식을 뽐낸다. 멋있게 말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느끼하다. 마치 조미료 많이 넣은 음식처럼.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참견하고 충고한다. 의도는 나쁘지 않다.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래라저래라 끼어드는 것이다. 문제는 듣는 사람의 느낌이다. 듣는 사람이 ‘당신이 왜 내게 그런 소리를 해. 당신이 뭔데?’ 이런 반응이 나오면 주제넘은 것이다. 과도한 친절은 간섭이고 참견이다.
 
말은 이기고 지는 승부가 아니다. 주고받음이다. 거래를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흥정이다. 이기려 말고 함께 성공하려고 해야 한다. 독식하려 말고 교환해야 한다. 이런 소통을 잘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상대 얘기를 겸손하게 듣는다. ▲들은 다음 궁금한 것을 묻고, 납득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자기주장을 할 때는 이유와 근거를 갖고 말한다. ▲독선적이지 않고 다름을 인정한다. ▲소수 의견도 존중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이 있다. ▲오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과오는 곧장 사과한다. ▲반대만 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한다. 사실 이런 데 서툰 사람이 무조건 이기려고 든다.
 
나는 이기려고 할 때 늘 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이기려는 사람은 나보다 잘난 사람이다. 승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임원 할 때도 그랬다. 아래 직원 중에 도드라지게 똑똑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보고한 문서는 고칠 게 없었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고마웠다. 아래 직원을 잘 둬서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가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내가 이 친구보다 월급도 더 받고 더 좋은 대접을 받는데, 나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는 이 친구가 불편했다. 그러다 어느새 내가 이 친구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기어오르네?’ 급기야 내 존재의미에 회의가 들 무렵, 이 친구를 다른 부서로 보냈다.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부턴 남과 견주지 않는다. 남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과거와 비교한다. 그러면 늘 이전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내가 아는 나는 남들에게 보여 지는 것보다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나를 잘 모르는구먼.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형편없진 않거든?’

 
때론 조연이 주연보다 빛난다

누구나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을 꿈꾼다. 그러나 살다보면 알게 된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저 주인공의 등장에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도 처음부터 조연이나 단역이 목표는 아니었다. 그런데 방송에 나가 말해보니까 주인공보다는 조연이나 감초 역할이 제격이다. 2인자나 넘버 3로서 한마디씩 거드는 역할을 잘한다. 방송이나 토론을 진행하는 역할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북하다. 간혹 진행을 하더라도 그 자리의 주인공을 빛내주는 역할이 내게 맞다.
 
살아온 이력 자체가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리더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늘 참모였고 비서였다. 누군가의 무엇이었지, 내가 누구로서 살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찾아서 하려고 했다.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다’고 했고, 하기 싫어도 ‘하기 싫다’고 하지 않았다. 비겁과 비굴 사이를 오갔다. 그럼으로써 누군가의 인정과 사랑을 구걸했다.
 
주인공이 되는 걸 포기하거나 양보하면 그때부터 소통이 수월해진다. 대화 자리나 회의, 토론하는 시간에 스스로 조연 역할을 자임해보라. 학교 다닐 적 부회장이나 부반장이 느끼는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 말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때 더 잘 된다. 운이 좋으면 주연보다 더 빛이 날 수도 있다.
 
세 가지 마음을 버리자. 완벽하고 싶은 마음, 이기고 싶은 마음, 주역이고 싶은 마음. 이 모두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잘 듣는 것이다. 이청득심(以聽得心), 귀를 기울임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모든 불행은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모르지 않으면서, 잘 듣지 않고 말만 많이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외칩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하루의 문을 닫는 한밤중에 나에게 외칩니다. 들었니? 들었니? 들었니?

이해인 수녀의 <듣기>라는 시다.


강원국 필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는 연설비서관을 맡았다. 말과 글보다 미소 짓는 표정이 더 인상적이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

최신기사 링크

[고재경 칼럼] ‘탄소 배출 감소’ 없는 예산을 금지하라

기후변화를 넘어선 기후위기의 시대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이에 따른 기후 변동성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해 호주와 미국 서부에서 일어난 대규모 산불은 이런 기후위기의 징후며 현실이다. 한국은 기후위기의 주범인 온실가스 즉 탄소 배출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다. 국제사회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여러 협정을 맺고 이를 강제하는 상황이다. 온실가스 배출 감소는 기후위기 극복과 한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조혁 칼럼] 플랫폼 기업들에 ‘세금 청구서’를 보내야 할 이유

보급 10여년 만에 스마트폰은 생필품으로 자리잡았다.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그런 흐름을 타고 IT기업들은 사회 인프라를 장악하는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했다. 코로나19는 플랫폼 기업들에게 호기로 작동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그리고 방역은 스마트폰 없이는 불가능했다. 조혁 필자는 현 시점에서 플랫폼 기업에게 플랫폼 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플랫폼 기업은 결국 세금이 투자된 정보통신 인프라와 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양승훈 칼럼] 추월 시작한 80년대생, ‘코리아 스탠더드’ 세워라

1980년대 태어난 아이들이 유년기였던 3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당시에 삼성전자가 일본의 소니를 제칠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한국의 경제력이 G7안에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대중문화 콘텐츠 분야를 보자. 한국의 가수가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의 프로선수들이 해외 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칠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최근 1980년대생 저자들이 공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