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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의 ‘글로 생활자’] 꽉 찬 이중책장,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By | 2020년 11월 13일 | 위크엔드 컬처

발단은 지난 여름의 폭우였다. 천형 같던 장마가 끝날 즈음 책방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 3개, 거실 1개 구조의 복도식 20평형대 아파트에서 복도에 접한 방 중 하나를 책방으로 써왔다. 관리사무소에 알리니 외벽이 갈라져 물이 샌 것 같다고 했다. 도배를 새로 하려면 일부 책들은 들어내야 할 판이었다.

‘이 참에 책장을 싹 갈아버릴까.’ 애 밴 것처럼 더부룩하게 내려앉은 천장 도배지 아래서 상념에 잠겼다. 책방의 4면 중에 가장 길쭉한 면에 이중 슬라이딩 책장이 있다. 9년 전에 맞춤 제작했는데 두 번 이사한 후론 더 이상 앞쪽 책장들이 움직이질 않아 뒤쪽 책을 꺼낼 수가 없다. 다른 책장들 역시 포화상태라 ‘구조조정’이 시급했다.

“와~~~ 책이 많네요. 이런 집 처음 봐요~~.”

지난달 말 도배 견적을 뽑기 위해 방문한 관리소장과 도배업자(라고 쓰고 도배 아주머니라고 읽는)가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다. 객관적으로 보면 대단한 장서도 아닌데 적잖이 놀랐다.

“애가 책을 많이 읽나 봐요. 무슨 책들이에요?”
(당황해서) “아니, 제 책인데요.”
“와~~ 뭐하시는 분인데요? 시 쓰고 그러는 분인가? 글 쓰는 사람들 집에 책이 많던데…”

내세울 것도 숨길 것도 없는 직업이지만 그 날 따라 내 모습이 너무 꼬질꼬질했다.(휴무일에 집에서 널브러진 상태 그대로 그들을 맞았다.) 게다가 관리사무소의 늑장 처리에 한 차례 전화로 싫은 소리를 했던 터라 “책 많이 읽는 사람들 대단해” 하는 말이 새삼 켕겼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는 사이 도배업자는 천장을 점검하더니 도배는 물론이고 덴죠(내부 석고보드)도 갈아야 한다고 결론을 냈다. 두 사람은 이중책장 안쪽 천장 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하며 돌아서더니 다시 물었다. “와, 책 정말 많으시다…. 근데 다 읽으신 거예요?”

다시 얼버무리며 황급히 배웅했다.

물 새는 서가, 엉겁결에 시작한 책 정리

생전 3만 권의 장서로 가득 찬 도서관급 서재를 지녔던 움베르토 에코도 “다 읽긴 했느냐”는 질문을 어지간히 받았나 보다. 오죽하면 본인의 에세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아예 ‘서재에 장서가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이란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요즘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TV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말이 ‘명언’으로 통한다.

“책은 읽을 걸 사는 게 아니라 사 놓은 것 중에 읽는 것이다.”

읽지도 않은 책 때문에 괴로워하는 내게 비슷한 고민을 하는 페이스북 친구(페친)들 다수가 이렇게 위로했다.

이중책장을 새로 짜는 일은 간단치 않다. 새 책장이 들어오려면 헌 책장을 들어내야 하고 그 배치에 따라 나머지 책장 위치도 바꿔야 한다. 결국 책방의 책 거의 전부를 일단 싸야 한단 얘기다. 이참에 일부 버리거나 팔기로 했다. 마침 회사에서 근속 20년을 맞아 열흘짜리 안식 휴가를 얻은 터라 해볼 만했다. 문제는 이렇게 버릴 책, 팔 책, 남길 책을 고르다 보면 그간 외면해온 나의 허튼 과거를 피할 길 없다는 사실이다.

‘대체 왜 이리 갈팡질팡 살아왔는가.’ 붉은 표지에 상‧하권으로 나뉜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를 버릴 땐 자괴감을 넘어 우울함마저 들었다. 대학‧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지적 허영과 열등감으로 사들인 책들이 암매장 시체처럼 쏟아졌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처럼 한때 열정을 쏟은 책들을 버릴 땐 그나마 시원섭섭했다. 캠퍼스 근처 대표적인 헌책방이었던 ‘공씨책방’에서 샀을 게 분명한, 그때도 손때 묻었던 <회화의 역사>, <프루동, 마르크스, 피카소> 등의 열화당‧집문당 책들은 내 손때를 제대로 타지도 못한 채 파지 신세가 됐다.

장정과 서체 때문에라도 다시 펼칠 것 같지 않은 소설책도 가차 없이 쌌다. 염세적인 옛 남자친구의 추천에 홀려 샀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등을 이번 생에 다시 시도할 리가 없었다. 몇 년 전 ‘미투’ 파문을 일으킨 원로 작가의 책도 싹 내몰았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과감해지자 새 것이나 다름없는 근간(近刊)들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페친들 추천에 솔깃해서 샀던 <핵과 인간>(2018), <틀리지 않는 법: 수학적 사고의 힘>(2016)은 중고 서점에 ‘최상’으로 팔았다. 좋은 책, 비싼 책들이지만 다른 책이 쌓이는 속도를 생각하면 꽤나 오래 독서 후순위로 밀릴 게 분명해 보여서다.

일차로 120권 가량을 팔았다. 야박하게 책정된 판매 대금을 받아 새로 짤 이중책장 계약금으로 입금했다. 견적을 뽑으러 온 가구점 사장은 기존 이중책장 설계가 잘못 됐다며 내가 바가지를 쓴 거라고 타박했다. 안 그래도 여러 문제로 언짢아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가 계약이 엎어질 뻔했다. 납품 날짜를 내가 양보하는 선에서 가까스로 무마했다. 책만 읽어 세상 물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간서치'(看書癡)가 이런 걸까. 다시금 우울해졌다.

버릴 책, 팔 책, 남길 책고민은 깊어가고

“읽고 쓰는 것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기자 출신 소설가 장강명이 자신의 팟캐스트 진행담을 중심으로 낸 산문집 <책, 이게 뭐라고>에서 되묻는 질문이다. 책을 치우고 버리면서 내가 수없이 되풀이한 자조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그다지 다독가도 아닌데 말이다. 매년 수백 권씩 읽는다는 사람이 즐비한데, 장강명은 솔직히 연 100권쯤 읽는 것 같다고 적어놨다. 나는 연 50권쯤 되려나. 그 두세 배도 넘게 사들이면서 말이다.

책을 싸다 지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2017년 작고한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자서전 <책>이다. 2012년 나온 것을 이제야 읽으니 정말로 사 놓은 책들 중에 읽는 게 진리인지 모르겠다. 1966년 민음사를 창립한 출판계 거목의 일대기는 총 6부로 구성됐다. 읽다 보니 나의 독서 편력이 당대 출판시장과 어떻게 엮여왔는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예컨대 4부 ‘단행본 출판을 개척하다’는 1974~1980년까지 민음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데, 그 전까지 전집류‧학습서 등 외판 중심 출판시장에서 인문‧문학 단행본 시장으로 체질 변화가 일어난 게 이 시기다.

실제로 먹고살기 급급했던 우리 집에도 그런 전집류가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 4~5학년 즈음 접했던 동서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외판원 꾐에 넘어간 게 아닌가 싶다. 이미 시효가 다해가던 세로 줄쓰기에 <나나> ,<보봐리 부인> 등도 포함된 성인용 36권이었는데 중학생 때까지 꾸역꾸역 읽었다. (전권 완독은 못했다.)
이 외판원 전집 판매는 이후에도 맹위를 떨쳤는지 1991년 겨울 대학 신입생 소집 때 교정 한쪽에서 한국소설전집을 덜컥 할부로 계약했다가 가까스로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외판원이 신입생을 포섭하는 게 당시 출판시장에선 중요한 판매 루트였을 게다.

책 읽기의 묘한 매력은 내가 처한 좌표를 훨씬 넓은 시각에서 보도록 돕는다는 점이다.(캐릭터와 시각 요소가 두드러지는 영상물과 비교하면 이 같은 객관화가 분명해진다.)
박맹호의 <책>은 민음사 위주로 서술되지만 1980년대 이후 우후죽순 쏟아진 인문‧사회과학 단행본들의 맥락을 훑어보기에 무리가 없다. 386 운동권의 꽁무니에서 동아리를 하면서 선배들이 거론하는 사회과학 책을 맥락없이 뒤쫓던 나의 대학시절이 아릿하게 겹쳤다. 대학원(비교문학 전공) 즈음 푸코, 보드리야르, 들뢰즈 등 이데아 총서로 접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도 새삼스러웠다. 당시에 읽으려고 용쓴 책들 중에 끝끝내 ‘나의 것’이 된 책은 없다. 그 중 수백 권을 지난번 이사 때 버리거나 기증했고 그때도 못 버리고 보관한 책들은 이번에 떠나보냈다.

버리려고 책을 싸다 진짜 버려야 했던 마음의 짐을 목도했다. 돌아보면 나의 90년대 갈팡질팡했던 책 읽기는 시대의 흔적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지식시장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출판업자들의 기획과 20대 풋내기 ‘예비 지성인’의 허영 및 부채의식이 만난 결과임을 새삼 확인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책 읽기 좋아하는 초등학생 둘째 딸을 위해 36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할부 계약했던 부모님에게도 ‘중산층 따라잡기’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나만 문제가 아니었고, 어쩌면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 더 나은 삶이 책 안에 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합리적인 소비였다. 그것조차 ‘책’을 통해 깨달았으니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옛말이 헛되진 않은 걸까.

벗어날 수 없는 간서치’(看書癡) 팔자

“아유, 난 책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요. 이렇게 커피 냄새 풍기면서 책 읽는 거 너무 멋있잖아요.”

목수를 대동하고 도배하러 온 아주머니는 연신 소녀처럼 감탄했다. 지난번에 비해 꾀죄죄함을 덜어낸 나는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거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얼마 전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사서 뒤늦게 탄복한 뒤 (사놓은 책을 포함해) 그의 저서를 연달아 읽는 중이었다. <책, 이게 뭐라고>는 상대적으로 소소한 블로그 풍 글쓰기이지만 스스로를 ‘읽고 쓰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저자가 ‘말하고 듣는’ 세계와의 불화 혹은 공존을 모색하는 몸부림 자체가 흥미롭게 읽혔다.

“나, 이 책 좀 읽어봐도 돼요? 내가 역사를 좋아해서…” 목수가 작업하는 동안 도배 아주머니가 하드커버 장정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직접 샀을 리는 없고 아마 신문사 출판팀으로 온 걸 챙겼나 보다. 문화부 기자를 탐냈던 건 이런 식으로 ‘공짜’로 책을 얻을 기회가 많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렇게 챙긴 ‘증정’ 책들은 되팔 수도 없고 버리긴 아까운 ‘서가의 계륵’이 돼 나를 더 심란하게 한다.

편히 읽으시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앉은 자리에서 화보 감상하듯 넘겼다. “요즘 책도 엄청 비싸잖아요. 1만 원 이하가 없어…. 아이쿠, 이 글씨 작은 것 봐라. 안 보이네.”

‘읽고 쓰는’ 세계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균질화돼 있다. 많은 순간 나는 그들의 인정을 욕망하고 그 트렌드와 가치가 향하는 쪽으로 내 삶을 움직이려 한다. 그러다가 이렇게 그 세계와 뚝 떨어져 ‘말하고 듣는’ 일원으로서 일상의 생활인을 만날 때 조금은 당황스럽다.

부자연스러운 내 모습엔 그들의 옹골찬 생존력을 당할 재간이 없다는 불안감도 깔려 있다. 한때는 그 일원이었으나 벗어나고자 애썼고,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겼을 땐 그들을 대변하고 리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도 품었는데, 수십 년 후의 나는 내가 속한 세계마저 제대로 리드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미래를 저울질하는 백면서생에 불과하다. 나는 아주머니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도배작업이 잘 진행되는지 지켜봤다.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 저주다. (중략) 그 반대편에 ‘한바탕 재미있게 수다를 떨었으면 됐지. 꼭 의미가 필요해?’라는, 말하고 듣는 세계의 사고방식이 있다. (중략)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현재를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읽고 쓰는 부류만이 수십 년, 수백 년 뒤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읽고 쓰는 이들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대신에 우리는 외로움을 덜 탄다고 할 수 있을까?”  <책, 이게 뭐라고> 중에서

장강명이 자문한 것을 나 또한 고민한다. 나도 ‘읽고 쓰는 인간’이 ‘말하고 듣는 인간’에 비해 절대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은 많은 부분 나를 성장시켰지만 그만큼 딜레마에 빠뜨리기도 했다. 오히려 20대에 비해 지금은 ‘말하고 듣는’ 쪽으로 균형추가 많이 맞춰진 편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읽고 쓰는’ 게 ‘말하고 듣는’ 것 이상으로 가치 부여되지 않는 사회 변화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나만 해도 책읽기 이상 흥미로운 영화나 넷플릭스, 클래식 공연, 혹은 음주의 즐거움을 늘어놓을 수 있다. 책은 그런 ‘재미’들과 경쟁해서 개인의 여가를 차지할 수 있을 때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을 때 ‘의미’도 보전된다.

떠나시는 아주머니에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드릴까 하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다음 일도 가야 하고, 무엇보다 글씨가 너무 잘다”면서 사양했다. 대신 음료수 두 병은 잊지 않고 챙겨갔다. 도배가 끝난 방에서 나는 다시금 버릴 책, 팔 책, 남길 책 정리를 이어갔다.


강혜란 필자

2000년 입사한 중앙일보에서 현재 영화와 문화재 기사를 쓰고 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문화부 기자를 탐했으나 현실은 숙성은 커녕 속성 원고를 생산하는 글로생활자. 일이 아닌 ‘내돈내산’(내돈 내고 내가 산) 문화생활을 40대 후반 싱글의 시각으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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