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가까이 앞둔 지난달 하순,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이번 선거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판결을 내렸다.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된 소송의 내용은 “유권자가 우편투표(mail-in voting)를 할 경우 우편으로 도착하는 표가 언제까지 도착해야 유효한 것으로 보느냐”였다.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위스콘신, 미네소타, 이렇게 네 개의 경합주(swing state)에서 같은 취지의 소송이 올라온 것.

한국의 시스템에서 생각하면 아주 단순해 보이는 문제다. 미리 법으로 정해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았으면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은 각 건에 대해 완전히 다른 판결을 내렸다. 위스콘신 주의 경우 우편투표는 ‘선거 당일’에 도착한 것까지만 유효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에 비해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선거 당일까지 우체국의 소인이 찍혔으면 며칠 후에 도착해도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또한 미네소타의 경우는 일단 받되 나중에 법적인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따로 분리해 보관하라고 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왜 같은 사안에 이렇게 다른 판결을 내렸을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州) 법원과 연방법원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트럼프의 투표 무효화 전략

미국에서 선거법은 각 주에서 의회가 정한다. 따라서 우편투표의 마감일은 각 주에 따라 다른 규정이 있다. 그런데 과거의 여느 선거와 달리 이번 대선은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사전투표의 경우 무려 4~5시간이나 줄을 서야 했던 유권자도 많고, 선거일 당일에도 한두 시간씩 서있어야 했던 경우가 흔하다. 이런 일은 흔히 생기지만,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해야 하는 시점에 투표를 해야 하니 각 주에서는 우편투표(mail-in voting)를 권장했다.

그런데 워낙 땅덩이가 넓은 나라인 데다, 각 주마다 선거관리 시스템이 천차만별이라 우편투표를 신청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표가 도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재신청을 하고 표를 받는 과정에서 오류도 많이 발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운동 내내 “우편투표는 사기가 너무 많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편투표를 하지 말고 당일 투표를 하라고 계속 권했다. (정작 본인은 우편투표를 했다)

그러는 한편, 자신이 임명한 연방우체국(USPS) 국장을 통해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우체국의 비용을 절감한다는 명분으로 수백 대의 우편물 분류기를 폐기처분했다. 가뜩이나 온갖 우편물이 몰려서 배달이 느려지는 연말에, 수많은 유권자들이 우편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 우편배달 시간을 늦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각 주에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증한 우편투표, 그리고 우체국 배달능력의 한계를 감안해 “선거일 당일의 소인이 찍혀있으면 늦게까지 받겠다”고 룰을 바꿨다. 많은 유권자들의 표가 무효가 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물론 트럼프와 공화당 세력은 바이든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찍은 표의 도착을 지연, 무효화하기 위해 ‘새롭게 바뀐 룰이 무효’라며 소송을 건 것이다.


대법원은 왜 각기 다른 판결을 내렸나

연방대법원은 각 주의 선거법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 선거법과 그를 둘러싼 판결이 헌법에 비추어 적절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가령 선거 당일까지 도착해야 유효하다고 판결한 위스콘신의 케이스를 보면, 민주당에서 우편투표의 도착일을 연장해달라는 요청을 위스콘신의 (주법원이 아닌) ‘연방’지방법원이 승인했다가 연방항소법원이 결정을 뒤집어 불허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이 다시 이를 인정한 것이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선거 직전에" 연방법원이 주(州)의 법에 관여하는 것은 각 주의 고유한 입법기능에 연방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대법원은 우편투표가 언제까지 도착해야 유효하냐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연방지방법원의 판단이 헌법에 적합하냐를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서 연방대법원이 지키려는 원칙은 '선거에 임박해서는 선거법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식 전달이 빠르지 않던 시절에 막판에 투표소를 바꾸거나 제도를 바꿔서 투표를 방해하는 행위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어떻게 선거일 이후에도 우편투표를 받게 허용했을까? 펜실베이니아의 경우는 연장을 허용하는 판결을 (위스콘신처럼) 연방지방법원이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의 최상급 법원이 내렸다. 연방이 개입해서 바꾼 게 아니라 주 자체에서 내린 결정이므로 연방대법원은 그것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각 주에서 똑같은 문제로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도 대법원은 각기 다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선거일을 가까이 앞두고서는 선거규칙을 바꾸지 않는 것이 좋지만, 각 주의 법원이 결정할 경우 존중한다는 게 연방대법원의 원칙이다.

연방대법원은 이렇듯 분명한, 그리고 설득력 있는 이유로 판단하는 것이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맞는 정당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진보 대법관 3명의 소수 의견

현재 연방대법원에서 진보적 성향으로 알려진 스티븐 브라이어(82세), 소니아 소토마요르(66세), 엘레나 케이건(60세)은 위와 같은 판결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소수의견을 내놨다.
“코로나 팬데믹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유권자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만 명의 위스콘신 주민들이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표를 늦게 받는 바람에 그들의 표가 선거일까지 도착하지 못할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투표권을 잃는 상황’이 된다고 지적했다.

자, 여기에서 두 개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선거일에 닥쳐서 투표 관련 규정을 바꾸면 안 된다는 주장도, 특별한 상황이므로 투표권을 보호하기 위해 우편투표 접수일을 늦춰줘야 한다는 주장도 모두 '투표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둘은 같지 않다. 후자의 경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고, 전자의 경우는 엄밀하게 말해 '기존에 지켜지던 룰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방대법관들이 보수-진보로 나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이거다. 보수 대법관들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법을 있는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진보 대법관들은 그 법이 만들어진 취지가 살아나는 판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위스콘신 주에서 우편투표 접수기한을 늦추는 것은 선거에 닥쳐서 룰을 바꾸는 행동이기 때문에 금해야 하지만, 그걸 금하는 이유는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룰을 바꾸는 것을 허용해야 오히려 그 법의 취지에 맞는다는 것이 진보 대법관들의 주장인 것이다.


보수 대법관들의 원전주의 논리

물론 보수 대법관들도 진보 대법관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법관에게 법을 해석할 권리가 있느냐’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다. 판사, 법관들이 각자가 해석하는 법의 취지대로 판결을 내리면 어느 순간 판사가 입법부의 권한을 침범하게 된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충분한 논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법 조문 자체에 충실한 판결을 중시하는 원전주의(originalism)를 대표하는 연방대법관이 안토닌 스칼리아(1936~2016년)였다. 그의 밑에서 서기(clerk)를 지내면서 같은 의견을 갖게 된 사람이, 최근 사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유언과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이 임명을 강행한 에이미 코니 배럿(48세) 대법관이다.

트럼프는 이런 성향의 배럿 판사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번 선거가 결국 대법원으로 갈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보수·진보가 6대3인 대법원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될 거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배럿이 없어도 대법원은 5대3으로 보수가 우세한 구도다. 하지만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가 (보수임에도) 연방대법원이 정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에 반대해서 진보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있는 것을 잘 아는 트럼프는, 로버츠가 균형을 잡으려고 해도 그게 아예 불가능하도록 배럿 대법관을 넣어 6대3으로 만들려고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로 연방대법원은 정치적인 판결을 할까? 진보 진영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한 위스콘신 케이스에서 다수의견을 피력한 (역시 트럼프가 임명한) 브렛 캐버노(55세) 대법관의 말이 그들의 우려를 증명해줬다.
캐버노 대법관은 선거일 이후에 도착한 표가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우편투표를 하지 말고 현장투표를 하라고 말한 사실을 모든 국민이 잘 아는 상황에서 나중에 도착한 (그러나 선거일까지의 소인이 찍힌) 표가 결과를 “뒤집는다”는 건 트럼프 쪽으로 쏠린 결과를 바꿀 것이라는 취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표는 현장투표와 똑같은 하나의 표로서의 권리를 갖는다. 그렇다면 단지 개봉한 시점이 다르다고 해서 “뒤집는다”는 표현을 하는 게 적절할까?

그리고 진보 진영에서는 캐버노 대법관이 판결문에서 “각 주는 선거일 밤이나, 직후에 최대한 빨리 결과를 발표하고 싶어 한다”고 한 말에도 주목한다. 각 주별로 승자를 발표하는 것은 언론사들이 '해석’하는 것이지 개표 담당자들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 글을 쓰는 목요일(5일) 밤까지도 뉴욕타임스와 CNN은 애리조나 주의 승자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AP통신과 폭스뉴스는 ‘바이든이 이겼다’고 일찌감치 발표했다. 각 주의 역할은 그저 집계한 수치를 발표할 뿐이다. 즉, 캐버노의 주장은 사실관계부터 맞지 않다. 그래서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서는 캐버노가 트럼프의 재선을 돕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전처럼 취급되는 헌법과 해석의 문제

선거일을 전후해 지금까지 트럼프는 사소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서 소송을 걸고, 소셜미디어와 방송을 통해 국민들 사이에 이번 선거가 "총체적인 부정선거”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애써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그런 트럼프의 주장을 ‘감추기’ 처리하고 있지만 삭제는 하지 않고 있다. 대형 방송사들은 (가령 지난 5일 저녁처럼) 트럼프가 생중계 기자회견을 통해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할 경우 아예 회견방송을 중단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지지자들에게 트럼프의 메시지는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선거제도는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트럼프가 절차상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만 하면 궁극적으로 국민들이 한 투표를 무시하고, 의회에서 대통령 당선자를 결정하는 과정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방대법원이 그저 “원전에 충실한” 판결을 내려주면 트럼프로서는 중요한 걸림돌이 사라지는 것이다. 원전주의에 충실한 보수 대법관들에게 끝까지 기대를 거는 이유일 것이다.

사회는 꾸준히 그리고 빠르게 변한다. 미국 헌법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미국 헌법이 20년마다 새롭게 쓰여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미국 헌법은 마치 하나의 경전처럼 취급되면서 변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미국의 입법부는 극한의 대립으로 작동을 멈췄고, 그 결과 의회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대법원으로 넘어가 민의가 아닌, 오래된 헌법의 해석으로 결정이 나고 있다. 과거에는 그다지 중요한 기관이 아니었던 연방대법원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정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제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까지 동원되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