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더 불기 전에 경주로 가자. 1400년 된 분황사 모전석탑에 빛바랜 낙엽들이 벽돌처럼 쌓일 때다. 수십 년 전 재잘거리며 몰려다닌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그 시절 동무들이 떠오를지 모른다. ‘동궁 월지’로 이름이 바뀐 옛 안압지는 정취보단 ‘조명빨’이 압도하지만 고층건물 하나 없이 아담한 시가지에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 고분군을 눈여겨보는 길이 호젓하고 한가롭다. 무엇보다 이제야 진짜 공부를 할 준비가 됐다.

그렇다. 다시 가는 경주는 공부 욕심을 일깨운다. 수학여행으로 갔던 시절, 국보‧보물과 함께 하는 ‘인증샷’ 배경으로만 여겼던 ‘천년 고도(古都)’가 아니다. 나이 들어 다시 가니 도시 곳곳이 새로웠다. 경주 역시 우리처럼 나이 들고 우리네 삶 따라 변해가고 있었다. 때로 허물도 벗고 세대교체도 해가며 말이다. ‘추억팔이’만으로 장수하는 스타 없다. 나훈아가 2020년에 ‘가황’이라 불릴 수 있는 건 70대 나이에도 신곡을 발표하고 비대면 공연까지 주저 않는 현재성 때문 아니겠나.

경주 여행을 생각한 건 어느 여행기사에 딸린 대릉원 야경사진 때문이었다. 12만5600m²(3만8000여 평) 평지에 울룩불룩 솟아있는 23기 고분들이 녹차 카스테라처럼 보드랍게 빛났다. 코로나19로 인해 기내식을 못 먹은 지도 한참, 그래 경주라도 가자 싶었다. 문화재 취재 때문에 최근 1년 새 세 번을 내려갔다 왔어도 매번 당일치기라 아쉬웠다. 제대로 둘러본 건 2007년 9월 제5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계기로 찾았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KTX 신경주역이 개통(2010년)하기 전이었다. 한결 편해진 교통 접근성도 느낄 겸 자가용도 렌트카도 없이 지난달 추석 전 주말에 뚜벅이 여행을 나섰다.


13년 만에 들른 황룡사 터<사진>는 허허벌판에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가 여전했다. 한때 동양 최대의 사찰에 구층 목탑이 있던 자리는 이제 논두렁 경계로만 어림짐작할 뿐이다. 13년 전엔 막 완공된 엑스포공원 내 ‘경주 타워’에서 실마리를 잡아 ‘주춧돌만 뒹구는 황룡사로 오라’라는 기사를 썼다. 그 초석들도 그대로였다. 경주 남산의 무심한 돌부처들도 변함이 없었다. 3박4일 일정으로 거닐다 보니 처음엔 어느 비누광고처럼 ‘아직도 그대로네’ 싶었다. 찬찬히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들어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게 불국사 내 불국사박물관이다.

불국사 내에 박물관이 있나 할지 모르는데, 있다. 2018년 11월 개관했으니 그리 오래진 않았다. 불국사 정문을 들어서서 초입의 오른편 언덕배기에 있다. 절 입구에서 입장료를 이미 6000원(성인 기준) 낸 상태에서 또다시 2000원을 내야 하는 게 마뜩찮을 수 있다. 사찰 내 박물관이다 보니 규모나 구성도 아쉬운 게 많다. 그래도 평생 한번(!) 가볼만하다. 아니, 국보 126호 사리장엄구를 생각하면 경주 갈 때마다 들러도 좋다. 1966년 석가탑 보수공사 때 발견된 오묘한 푸른빛의 금동제 사리외함을 보고 있노라면 1300년 세월이 찰나 같다.

“이 녹색 유리 사리병은 정면에선 안 보이지만 뒤쪽을 보면 와장창 깨진 걸 복원한 자국이 또렷합니다. 1966년 사리장엄구 발견 당시 이를 모시던 주지 스님이 너무 귀한 유물에 덜덜 떨다 떨어뜨렸다고 해요. 첫 발견 땐 유리병 안에 사리 46과가 있었는데 2과는 분실됐다 하구요.”

불국사 관계자의 설명엔 아쉬움이 느껴졌다. 1966년 두 차례의 도굴 시도로 인해 일부 훼손된 석가탑을 보수하느라 해체하는 과정에서 여러 세트의 사리기와 사리, 각종 공양품,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으로 이뤄진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한국전쟁의 화마(火魔)에서 벗어나 이제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는 등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가치를 꾀하던 시점에 뜻하지 않은 경사였다. 불국사 주지실이 총동원된 야단법석 중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게다.

게다가 불국사 측은 석가탑 내 재봉안 때 내사리용기를 복제품으로 쓰기로 결정되자 진품 사리병이 깨진 사실을 숨겼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전신)은 복제품을 봉안하고 난 뒤 사리 세트 진품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사리구는 1967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년 뒤엔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됐다. 불국사박물관 개관과 함께 돌아왔으니 반세기 만의 귀환이었다. 현재 박물관에 진열된 사리 세트가 모두 진품이고 석가탑 안에는 복제품이 안치돼 있다.


실물로 보면 크기가 매우 작다. 맨 바깥 사리외함이 너비 17.2cm, 높이 18cm다. 사면에 덩굴무늬가 대칭으로 뚫려 있고 지붕 꼭대기, 모서리, 지붕마루는 연꽃으로 장식됐다. 지붕 끝엔 나뭇잎 모양을 치장했다. 고대 신라 장인들이 모두 ‘현미경 시력’이었나 싶게 촘촘한 선과 무늬가 육안으론 제대로 구분이 어렵다. 이를 돕는 게 삼성 리움미술관에 쓰이는 것과 같은 종류의 디지털 확대 스크린이다. 손끝으로 확대하면 수백 배 크기로 포착된 유물의 세부사항이 또렷하다.

백제에서 온 석공 아사달이 삼층석탑을 지을 동안 또 다른 장인은 한 땀 한 땀 사리함을 쪼고 팠을 것이다. 그렇게 새긴 극세선과 무늬가 1300년 뒤 디지털 확대기로 3D 분석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영원히 탑 안에 묻을 용도로 만들면서도 한 치 오차 없이 갈고 닦았을 장인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지극한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함)’가 아득하기 그지없다.
일본의 석학 다치바나 다카시가 에게 해 유적을 둘러보며 쓴 대로다. “유적을 즐기는 데 꼭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 자리에 잠자코 잠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잠자코’와 ‘잠시’이다. (중략) 유적과 만나는 것, 그것은 시간을 천년 단위로 보게 하는 것이다.”(『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사리장엄구는 박물관 전시품의 일부일 뿐 이곳의 핵심은 불국사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단 점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길 통일신라의 가난한 집안 출신 김대성이 전 재산인 밭을 불사(佛事)에 바친 덕에 재상집 아들로 환생한 뒤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곳이 불국사다. (전생의 부모를 위해선 석굴암을 지었다.) 수학여행 때 연화‧칠보교, 청운‧백운교를 노닐 때만 해도 불국사가 천년만년 그 모습으로 존재한 줄 알았다.

실제의 불국사는 평지풍파를 겪으며 1300년을 이어왔다.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 왕실에서도 종종 불국사에 봉헌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구한말 무렵엔 거의 잊힌 지방 사찰로 전락했다고 한다. 관광지로서 가능성이 조명된 건 일제강점기였다. 이때 처음으로 불국사 인근에 호텔급 숙소가 지어졌다. 한국전쟁 등 격랑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폐허나 다름없이 버려져 있던 곳이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기 시작한 때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인 1970년대다. 그 과정을 오랜 흑백사진들과 함께 일별할 수 있다는 게 이 박물관의 차별화된 존재 이유다.

특히 1960년대 석가탑 보수 당시 흑백사진들이 남아 있어 아련한 동시에 아찔하다. 지금 보수복원 기준으로 보면 믿을 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엉성한 사다리를 올려서 탑 상층부를 해체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2층 지붕돌을 들어내다가 앞서 아래에 내려놨던 3층 탑신에 떨어뜨려 부재가 훼손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그에 비해 2012년부터 5년 간 이뤄진 기단 보수 공사는 한층 진전된 문화재 보호 의식에다 미디어 홍보 의지까지 맞물려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때 최종적으로 사리장엄구 일체를 모조복제품으로 내부에 봉안하고 진품은 모두 박물관에 진열하게 됐다고 한다.

한번 뇌리에 각인된 금동제 사리외함은 경주 여기저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엑스포공원 내 솔거미술관의 박대성 전시실에서도 ‘신라인’을 자처한 박 화백이 그린 사리외함을 일별할 수 있다. 그처럼 이번 여행에서 자주 눈에 띈 게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보물 제2010호 수막새(원와당, 圓瓦當)다. 1998년 경주엑스포 심볼로 낙점돼 각종 기념품 등에 활용돼 왔는데, 2018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보물)이 되면서 더욱 주목 받았다.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국립중앙박물관 ‘신국보 보물전’에 실물이 공개돼 많은 관심을 샀다.

공식 명칭은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慶州 人面文 圓瓦當)’다. 일제시기 경주 영묘사 터(현재 사적 제15호 흥륜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삼국시대 얼굴무늬 수막새다. 1934년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일본인 의사가 경주의 한 골동상점에서 구입해 일본으로 반출한 것을 고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끈질기게 노력해 1972년 10월 되가져왔다. 경주 곳곳의 조명 갓이나 안내판 등에서 재해석된 디자인을 볼 수 있는데 어느 것도 원조 얼굴의 소박하면서도, 어딘가 샐쭉하고 수줍은 미소에 비할 바 못 된다.

3박4일 일정은 국립경주박물관을 시작으로 불국사, 감은사지 터, 문무대왕암(감포 해변), 봉황대, 대릉원, 분황사, 황룡사지터, 동궁과 월지, 첨성대, 엑스포공원 등 시내는 물론 경주 남산 산행과 인근 드라이브(운곡서원, 옥산서원, 독락당, 양동마을 등)까지 아울렀다. 그리고 ‘경주 관광 1번지’로 꼽히는 황리단길을 갔다.

경주시 황남동 포석로에 위치한 이 길은 원래 ‘황남 큰길’이라 불리다가 수년 전부터 경리단길(서울 이태원) 풍의 카페‧식당이 밀집하면서 이런 별칭을 얻었다. 망리단길(서울 망원동), 해리단길(부산 해운대)처럼 근대식 구옥에다 젊은 세대 취향을 입힌 게 특징이다. 1㎞가 채 되지 않는 편도 1차로 양쪽으로 요즘도 한옥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원조 경리단길처럼 ‘젠트리피케이션’ 얘기가 나온 지 한참이지만 아직까진 경주의 밤을 먹여 살리는 모양새다.


경주에서 근무하는 지인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한옥을 개조한 수제맥주집 ‘황남주택’<사진>. 지인 말로는 황리단길 열풍을 만들어낸 원조 힙플레이스란다. 대청마루 안쪽 내부까지 활짝 열어젖혀 테이블을 비치했고 대문과 담장도 없앴다. 한가운데 우물자리까지 있는 넓은 마당엔 밤이 깊어질수록 젊은이들이 더 몰려들었다. 한쪽 벽면에선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주연의 로맨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가 상영 중이었다. 지금의 데이트 남녀 눈엔 ‘주말의 명화’급 고전으로 비치지 않을까.

나중에 기사를 찾아 읽으니 황리단길 인근의 사정동 경주공고가 신라 최초의 절 흥륜사가 있던 자리란다. 흥륜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최초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알려진다.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의 순교에 힘입어 대규모로 증축돼 ‘대왕흥륜사’로 거듭났다. 진흥왕이 만년에 스스로 삭발하고 이 절의 주지가 됐을 만큼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의 중심 도량이었다. 불국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자신의 전 재산인 밭을 보시한 곳도 흥륜사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까지 도성의 남녀가 흥륜사의 전각과 탑을 다투어 돌며 복을 비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흥륜사 탑돌이는 7~8세기 신라 수도 서라벌의 젊은이들이 합법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연례 축제였다. 천년이 넘는 사이 흥륜사는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인근 황리단길에선 21세기 젊은 남녀들이 탑돌이 하듯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유적 앞에서 천년 단위를 헤아리는 게 자연스러운 듯, 연인 앞에선 찰나의 눈빛에 충실해야 하는 게 인생이다. 다시 만난 경주에서 유물‧유적 공부도 좋았지만 황리단길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없었다면 맥 빠진 여행이 될 뻔했다. 그들이 있어 경주가 새롭게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찬란한 문명을 이룬 것도, 그걸 무너뜨린 것도 사람이다. 인간의 매일이 쌓여 훗날 역사로 불릴 뿐이다. 확실히 그 시절 수학여행 땐 그걸 깨닫긴 너무 일렀다. 천년의 도시에서 영원을 생각하며 찰나를 즐기는 게 진짜 공부란 것 말이다.


강혜란 필자

2000년 입사한 중앙일보에서 현재 영화와 문화재 기사를 쓰고 있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문화부 기자를 탐했으나 현실은 숙성은커녕 속성 원고 생산 글로생활자. 일이 아닌 ‘내돈내산’(내돈 내고 내가 산) 문화생활을 40대 후반 싱글의 시각으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