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선 투표일이 보름 남짓 남은 지금,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막으려는 유권자들은 조 바이든의 선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렇게 선거 막바지에 이르면 공화·민주 양당 후보들은 비행기를 타고 격전지(경합주)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막판 지지율 다지기에 총력을 쏟게 된다. 그리고 목이 쉬어라 열정적인 연설을 쏟아내며 지지자들의 마음에 불을 당기고,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의 표심을 얻으려 노력한다. 과거의 대선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그런 선거가 아니고, 이번 후보들은 그런 후보들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형 정치집회는 생각하기 힘들고 (물론 코로나바이러스나 지지자들의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 트럼프는 집회를 열지만), 바이든과 트럼프는 연설에 강한 사람들이 아니다.
트럼프는 준비한 원고도 없이 기분 내키는대로 두서 없이 길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고, 바이든은 훌륭한 정치인이기는 해도 청중을 흥분시키는 위대한 연설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다. 사실 그게 '리더의 말과 글’ 코너에서 이제까지 바이든의 말을 소개하지 않은 이유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후 많은 연설을 하고 토론회에 참석했지만, 듣는 사람의 가슴에 남는 말은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난 몇 주 사이, 바이든이 유권자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말을 하는 걸 두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10월 2일 트럼프와 퍼스트 레이디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에 있었던 긴급기자회견 때였고, 다른 한 번은 10월 15일 ABC 방송이 주최한 타운홀 행사에서였다.

트럼프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 사흘 전인 9월 29일에 열린 대선후보 토론회에 등장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뒤 바이든은 “엄청나게 큰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닌다”면서 조롱했다. 마치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약한 사람이라는 듯한 발언이었다. 이 말에 바이든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트럼프가 확진 판정을 받는 걸 보고 많은 미국인들이 “그렇게 바이러스를 우습게 보더니… 당해도 싸다”는 반응을 보였고, 바이든 역시 어떻게든 입장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트럼프는 상대를 조롱했을 게 분명하지만 바이든이 그러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발표를 할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트럼프의 건강에 대한 위로가 들어간 대국민 메시지 정도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이든의 말은 그렇게 시작했다. 우선 자신도 코로나19 검사를 받았으며 음성 판정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embed]https://youtu.be/iIvHmxlmlw4[/embed]

먼저 제가 코로나19 검사 결과 양성반응을 보인 영부인과 대통령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브리핑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제 아내와 저는 두 분이 어서 빨리 완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d like to start by acknowledging which I’m sure all of you do, as well, sending my prayers for the health and safety of the First Lady and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fter they tested positive for Covid-19. My wife, Jill, and I pray that they’ll make a quick and full recovery.

사람들 중에는 바이든이 대통령보다 영부인(First Lady)을 먼저 걱정한다고 말한 건 자신의 마스크 착용을 비웃은 트럼프를 눈에 띄지 않게 무시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70대의 바이든은 옛날 사람이고 이런 순간에는 정치인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염된 트럼프의 아내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남자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세대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바이러스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바이러스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과학을 따르고, 전문가의 말을 듣고, 손을 씻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합니다.
This is not a matter of politics. It’s a bracing reminder to all of us that we have to take this virus seriously. It’s not going away automatically. We have to do our part to be responsible. It means following the science, listening to the experts, washing our hand, social distancing.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나에게서 이 일로 트럼프를 공격하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뒤에 나올 말을 오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말, 즉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트럼프가 바이러스를 대하던 태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의 말을 듣고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번 기회에 태도를 바꾸라는 말을 (트럼프에 대한 공격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하는 거다.

그러고 나서 바이든은 잠시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생활수칙을 이야기했다. 마스크가 백신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CDC(질병통제예방센터) 디렉터의 말과 함께 앞으로 100일 동안 10만 명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무기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사실 대통령인 트럼프가 했어야 하는 말이다. 하지만 경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재선에 눈이 먼 트럼프는 이런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미국인들이 소셜미디어에, 그리고 언론이 “바이든이 대통령처럼(presidential, 대통령답게) 보이는 순간”이라고 찬사를 보낸 대목이다.

우리는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경제가 우리 모두를 위해 다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당파적일 때가 아니라, 미국적인 순간이어야 합니다. 하나의 나라로 뭉쳐야 할 때입니다.
We can get this pandemic under control, so we can get our economy working again for everyone. But this cannot be a partisan moment. It must be an American moment. We have to come together as a nation.

저는 민주당 후보로 뛰고 있지만, (당선되면) 저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일하고 나라를 이끌 것입니다. 당신이 선거에서 저를 지지하셨든 지지하지 않으셨든 상관없이 저는 당신을 대표할 것입니다. 공화당 지지주, 민주당 지지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서로를 같은 미국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미합중국에 살고 미합중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I’m running as a Democrat, but I will run and govern as an American president. Whether you voted for me or against me, I will represent you. And those who see each other as fellow Americans, who just don’t live in restates or blue states, but who live in and lov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at’s who we are.

미국은 단결했을 때 일을 해결해내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을 때 극복하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일어섭시다. 우리 미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기억합시다. 우리는 미합중국입니다. 우리가 해내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And there’s never been a single solitary thing America’s been unable to do. Think of this. Not once. Not a single thing we’ve not been able to overcome, when we’ve done it together. So let’s get the heck up. Remember who in the God’s name we are. This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s nothing beyond our capacity.

지난 4년 동안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미국인들이라면, 세계 최강대국에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나라를 한탄하던 사람들에게 바이든의 말은 '국뽕'을 맞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감동한 것은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지난 4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리더의 말”이었다. 그들은 바이든의 이 말을 ‘대통령다움’이 묻어나는 말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대통령답다는 건 무슨 뜻일까?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바이든의 말에서 사람들은 '나라를 하나로 모으는 리더’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4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언론을 공격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트럼프의 목소리를 들어왔던 미국인들은 “저는 저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표하겠다”며 단결을 촉구하는 바이든의 말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미국이 단결해서 해내지 못한 일은 없다”는 말이 '국뽕'의 효과를 발휘한 것은 바이든이 그걸 '리더의 목소리’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이 또 한 번 "대통령답다”는 찬사를 들은 것은 지난 주에 있었던 타운홀 행사에서였다. 원래 이 날은 대통령후보 2차 TV토론회가 잡혀있던 날이지만, 트럼프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영상을 통한 가상 토론회로 바꾸자 트럼프가 포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취소하며 시간이 빈 상황이었다. 그러자 바이든은 ABC와 함께 타운홀 미팅을 하겠다고 했고, 트럼프도 같은 시간에 NBC와 타운홀 미팅을 하겠다고 한 거다.

트럼프는 가상 토론회보다는 실제 청중이 있는 타운홀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승낙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방송시간을 허용한다는 비판을 받은 NBC가 트럼프의 거짓말과 발뺌의 여지를 주지않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바람에 트럼프는 타운홀 행사 내내 송곳질문을 막아내느라 악을 썼고, 트럼프의 역정에 지친 시청자들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한 바이든의 타운홀로 채널을 돌리는 바람에 시청율에서 바이든이 압승을 거뒀다.
<동영상> 

NBC에서 리얼리티쇼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시청률과 관심 끌기를 가장 중요한 성공지표로 삼아온 트럼프에게는 수치스런 패배였지만, 두 개의 타운홀 미팅이 끝난 후 인터넷에 도배된 것은 ABC 앵커 조지 스테파노풀로스가 던진 질문에 대한 바이든의 대답이었다.

질문:
부통령께서 선거에서 패하신다면, 그 패배는 지금 미국이 어떤 상황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Mr. Vice President, if you lose, what will that say to you about where the America is today?

대답:
음, 그건 제가 형편없는 후보이고, 제가 (후보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게 지금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 대통령이 바라는 것처럼 미국의 국민이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갈라져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Well, it could say that I’m a lousy candidate and I didn’t do a good job, but I think, I hope that it doesn’t say that we are as racially, ethnically, and religiously at odds with one another as it appears, as our president wants us to be.

트럼프에게서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잘못은 중국에게, 민주당에게, 오바마 전 정권에게, 언론에게 있다는 말만 들어온 사람들은 선거에 패배한다면 그것은 내가 못난 탓일 것이고, 그런 일이 벌어져도 우리나라는 트럼프가 주장하는 것처럼 분열된 나라가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바이든에게서 정치인(politician)이 아닌 정치가(statesman)를 보았다.
전자가 자신과 자신의 당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이익에 앞서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단결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설 못하는 바이든'의 진심을 비로소 확인한 미국인들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박상현 필자

뉴미디어 스타트업을 발굴, 투자하는 ‘메디아티’에서 일했다. 미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워싱턴 업데이트’를 운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에 디지털 미디어와 시각 문화에 관한 고정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 ≪생각을 빼앗긴 세계≫ 등을 번역했다. 현재 사단법인 '코드'의 미디어 디렉터이자 미국 Pace University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