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대문명이라고 하면 그들이 남겨놓은 찬란한 유적들만 떠올린다. 나일 강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몇몇 거대한 유적에 감탄하는 것이 문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문명에 대한 우리의 이런 시각은 20세기를 거치며 서양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이었다. 성서의 발견이라는 대의명분에서 시작된 서구의 고대문명 연구는 제국주의의 확산과 함께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회진화론적인 접근으로 문명을 바라보았다.

문명은 과연 발전하는가?

한국에서도 1980~1990년대에는 사회진화론적으로 고대사를 해석하는 연구가 유행했다. 엘만 서비스(E. Service) 같은 학자가 개발한 ‘무리-부족-족장-국가’라는 도식이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인류학자들은 전 세계 여러 곳의 문명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기후·환경에서 발생한 문명들에 대해 문자, 피라미드, 수도시설 등 필요한 ‘체크리스트’를 정하고 그에 따라 각 문명들을 비교하고 평가했다. 그러고는 모든 문명들을 마치 대학 순위를 매기듯이 1단계, 2단계 식으로 서열화했다. 그렇게 세계의 모든 문명은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평가되었다. 지금도 영어권의 수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영어 자료만으로 세상 문명의 흥망을 논하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와 세계문명사를 거침없이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런 보편화된 문명의 척도가 작용하고 있다.

고대문명에 대한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인류의 과학기술은 계속 발달하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 또한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 체크리스트는 더 거대하고 더 높은 기념물과 신전, 그리고 더 다양한 계급과 인구 집중도가 핵심적인 기준이다. 쉽게 말하면 무덤 규모가 더 큰 사람들이 더 선진적이며 우월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요즘엔 이 사회진화론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될수록 문명이란 게 다양한 기후와 환경에 따라 발달-쇠퇴를 거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히려 거대한 건축물과 과밀한 인구집약은 오히려 그 문명의 쇠퇴를 촉진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 발전을 중시하는 문명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다양한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인간 문명의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던 농경문화도 사실은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인구가 늘어나는 환경에서 고육지책으로 택한 길이며, 그 이후 사람들은 거대한 국가와 문명을 이루었지만 그들의 삶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인류 문명에도 코로나19 확산, 기후변화 위기라는 경고등이 잇달아 켜지면서, 이러한 문명의 흐름이 결코 오래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문명의 무한한 발전이 아니라 그 쇠퇴와 새로운 문명의 전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주의 서쪽 요하(遼河)유역에서 수천 년간 이어온 문명의 흐름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환경에 맞춰 변신을 거듭한 요하문명

내몽골 동남부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제사에 기반을 두어 독특한 문명을 이루었다. 이들은 약 6000년 전에 갑자기 초원, 만주(滿洲), 그리고 중원(中原)을 잇는 교차점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내몽골 동남부 적봉(赤峰) 시를 중심으로 하는 요하의 상류 일대에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적석총과 최고급의 옥기를 사용하며 번성했다. 그런데 그들은 약 5000년 전에 갑자기 자신들의 금자탑을 갑자기 버리고 소규모 집단으로 와해되었다.

그 멸망 원인중 하나는 바로 전염병에 있었다. 기후 환경이 악화돼 식량 생산이 신통치 않게 되자 그들은 설치류(※쥐목 포유류의 총칭) 등을 잡아 식량으로 대체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인구밀도가 높은 마을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페스트(Plague)가 확산되는 바람에 일시에 그 문명을 포기해야 했다.

그 이후 약 700~800년 가까이 사람들은 소규모 마을로 흩어져 살았고, 전염병 위기가 지난 후에 새로운 도시문명이 등장했다. 그것은 ‘하가점 하층문화’라고 불린다. 이 지역에서 최초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고 발전했는데, 이들은 홍산문화보다 더 인구가 밀집된 성(城)을 쌓고 서로 이웃하며 살았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홍산문화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이들은 종교적인 신전(神殿) 대신에 강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였고 서로 교역을 했다. 사람들이 쌓은 성벽 안에는 도로가 잘 갖추어진 마을들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이들의 성터만 500개 이상 발견되었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4~5k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3500년 전에 또 다시 기후 위기가 닥치자 하가점 하층문화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써 이룩해놓은 거대한 도시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그 이후 500년간 이 도시들은 텅 비워진 채 사람들은 사방으로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먼저 북방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리고 중국 상(商)나라가 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쓰던 소중한 청동기를 들고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유명한 기자조선 신화도 이 혼란기에 중국을 떠나 이 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도시를 비워둔 것은 당시 어느 한 곳에서 살면서 사람들과 교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은 서로 섞이고, 그 와중에서 새로운 문화가 태동했다.

약 3000년 전에는 이 지역에 훨씬 더 강력한 무기와 기마술로 무장한 ‘하가점 상층문화’가 등장했다. 이들은 초원의 청동기와 유목문화를 전수받고서 사방을 침략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중국 역사기록에 ‘산융(山戎)’이라 기록될 정도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을 위협하는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비어있던 도시들을 다시 차지하고 살면서 강력한 청동기문화를 일구었다. 이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고조선은 비파형 동검문화를 이룩했고, 한반도까지 그 발달된 청동기를 전파했다.


변화하는 자가 살아남았다

위에서 말한 요하문명을 대표하는 세 가지 문화를 우리가 잘 아는 4대 문명과 비교해 보자면, 홍산문화는 신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이집트문명, 하가점 하층문화는 강을 따라 교역을 하는 인더스문명, 그리고 하가점 상층문화는 강력한 무기로 서로 정복전쟁을 한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유사하다. (※물론 자세히 보면 그들의 성격은 서로 다르니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 이렇게 세계 여러 문명이 가진 특징들이 순차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요하문명이다.

흔히 한국에서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한국과 중국 간의 귀속논쟁만 떠올린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의 문화가 아니었다. 시대에 맞게 빠르게 자기 모습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요하문명의 실체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다양하게 모습을 바꾼 카멜레온 같은 적응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불리해질 때마다 자기의 삶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에 다양한 지역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계속 문명을 재창조해왔다. 문명의 지속성은 화려한 영광이 아니라 얼마나 빨리 변화에 적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위기상황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다양한 지역과의 정보를 교환하는 네트워크체계를 구축했다.

요하문명이 시대별로 다양하게 변천할 수 있는 배경에는 환경적 요인도 있었다. 이 지역은 초원, 만주, 중국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3가지 문명의 교차점에 있었다. 그래서 약간의 기후 변화에도 그들을 둘러싼 지리환경의 변화는 극심했고, 생계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선지 그들은 환경 변화에 빠르게 반응했고, 지리적 조건을 극대화하여 먼 거리와의 네트워크를 이룩했다.

홍산문화의 사람들은 바이칼호 인근 사람들과도 교류했고, 하가점 하층문화는 중국의 하나라(상나라 이전시대)로 추정되는 중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한편, 유목생활을 위주로 한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멀리 흑해연안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흑해 연안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의 청동제 투구가 나오고 동물 장식을 사용했을 정도다.

요하 유역의 문명을 이어온 원동력은 변화무쌍한 변화에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하며 위기에 대처하던 사람들의 능력이었다. 문명이 해체되는 위기에 과감히 기득권을 버렸기에 새롭게 적응한 문명들이 그 뒤를 이을 수 있었다.


흩어져라, 그리고 주시하라

세계적으로 문명의 전환은 겉으로 보면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과 같은 사건으로 갑자기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던 과정이 갑자기 외부로 표출될 뿐이다. 서기 926년에 거란에 멸망당한 발해도 역사 기록으로만 보면 멀쩡하던 나라가 거란의 침략으로 갑자기 허무하게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거란의 침입 이전에 이 지역에 극심한 기후 변화가 있었고, 춥고 외진 극동지역에 위치한 발해는 내부적으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고 본다.

우리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야기되는 변화를 그동안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지 생각해보자. 진작부터 지구온난화와 새로운 유행병 발생 등 많은 조짐이 보였고, 우리는 수많은 경고들을 무시한 채 지나쳐왔다. 이제 우리도 수많은 옛 문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환기의 상황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기후·환경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한 요하문명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40여 년 전, 한국과 일본에서는 종말론이 유행하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시집 <모든 세기(Les Centuries)>가 예언서로 꽤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시집은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참언에 이용당하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 점에선 노스트라다무스가 억울할 법하다. 그는 예언시집인 <모든 세기>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연도를 명기한 적이 없다), ‘페스트’라는 서양 문명의 위기상황에서 쓰여진 그의 글들은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영감을 주는 구절은 9권 44편이다.

“달아나라, 달아나라, 쥬네브(=제네바)에서 모두 달아나라.
황금의 사투르누스는 쇠로 변하리라.
거대한 빛에 반대되는 것이 모든 것을 멸절하리라.
그 전에 하늘에는 전조를 보여주리라.”

이 시가 지금의 21세기를 의미한다는 종말론적 시각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문명의 위기가 다가올 때에 그동안 쌓아놓은 금자탑을 버리고 흩어질 때에 비로소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의 시점에는 전조현상이 있으니 주시하라는 뜻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이야기가 단순히 페스트가 유행하던 중세 시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도 몸을 가볍게 하고 당분간은 흩어져야 한다. 그리고 정보의 네트워크를 최대한 넓히고 주시해야 한다. 지난 5000년간 이어졌던 요하 하류의 요하문명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강인욱 필자

어려서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고, 지금도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다니며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유라시아 역사 기행』,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