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유라시아 횡단철도, 그리고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등 지난 몇 년간 세계는 서로 경쟁적으로 유라시아 정책에 참여했고 다양한 사업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문화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유라시아 철도의 복원이었다. 지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은 서로 다른 정부의 방향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책의 내용과 목적은 비슷하다. 그만큼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정책은 정부의 성향에 관계없이 우리에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실크로드와 관련된 사업은 천편일률이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 한민족 바이칼 기원론, 한류의 소개 등이다.
특히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크로드의 로망을 떠오르게 하는 대표적인 사업이다.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한국인의 로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광수가 1933년에 신문지상에 연재했던 소설 <유정>일 것이다. 춘원의 대표작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바이칼까지 가는 과정은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묘사됐다. 춘원 자신도 자바이칼(바이칼의 동쪽)의 큰 도시인 치타까지 열차로 여행을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유라시아 실크로드, 그 환상과 현실

춘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당시 일제가 먼저 꿈꾸던 세상이기도 했다. 일제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만주와 시베리아로 침략을 해나가고 있었다. 철도는 바로 자신들의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고, 철도회사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철도 여행을 사방으로 선전하여 관광산업을 진흥하려고 했다. 춘원의 소설뿐 아니라 영화, 가요와 같은 다양한 대중문화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로 가는 길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요, 북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처럼 묘사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 이후 1990년대까지 냉전의 장벽에 가로막혀 북방 유라시아는 꿈도 꿀 수 없었으니 결국 우리의 유라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인식은 1930년대에 멈춰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의 실크로드에 대한 로망은 지난 세기 일본이 오매불망하던 북방 유라시아에 대한 환상의 아류(亞流)라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가는 철도 건설 구상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비현실적인 공상은 우리보다 일본이 더하다. 일본은 지난 수십 년간 열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잇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지난 2016년 10월에 일본은 그동안 추진해오던 ‘후쿠오카-부산’을 해저터널로 잇는 대륙철도 계획 대신에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사할린으로 이어서 시베리아 철도와 잇겠다는 발상이다.

일본의 계획은 지도로만 보면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시베리아와 사할린의 최단거리는 타타르해협을 통과하면 약 7km밖에 안되며 수심도 낮아서 현대의 기술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다. 바로 이 지역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고 아주 험난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다. 사할린 건너편의 아무르강이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주(州)는 남한의 8배나 되는 땅이지만 인구는 130만에 불과하다.
나도 1999~2002년 사이 이 지역에서 발굴을 한 적이 있어서 그 황량한 느낌을 잘 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마을과 도시들은 세계에서 8번째로 유장한 강인 아무르강을 따라 형성돼 있다. 그러니 대부분의 물류(物流)는 강을 따라 운송된다.

이런 상황에 허허벌판에다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서 시베리아 철도를 연장한다고 한들 탑승객도 없고 물류비용도 아무르강 하류로 나르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먹힌다. 아마 이 계획이 제대로 추진된다면 일본의 경제가 파탄 날 지도 모를 정도이다.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사업을 일본의 극우성향인 산케이신문은 대서특필했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못 다 이룬 꿈인 대륙 진출이 다시 이루어진다며 환호했다.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한국에서도 ‘우리는 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표출하는 언론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거의 보도조차 되지 않았고 그 계획을 접한 사람들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100여 년 전에 유행했던 유라시아 철도의 로망이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음을 절감하던 순간이었다.


여객·물류 비중은 계속 감소 추세

그런데 과연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21세기의 교통수단일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여러 통계를 보면 시베리아 철도가 매년 여객 및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곧 감소하는 추세다. 쇄빙선의 발달로 북극해를 통한 해운의 물류가 훨씬 저렴하고 효과적이다. 또한 여객 규모로 봐도 시베리아 철도는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가는 제주도를 굳이 배를 타고 이틀간 가는 한국인이 많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비행기로 3~4시간이면 도착하는 지역을 굳이 사나흘씩 열차를 탈 만큼 한가한 러시아인들도 많지 않다. 심지어 객차의 요금은 비행기보다 비싸며 열차 안에서 제대로 몸을 씻거나 핸드폰 충전을 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시베리아 열차는 필요가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베리아 철도는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을 잇는 대동맥 같아서 나도 시베리아 열차를 자주 이용한다. 시베리아 각 도시들을 이어주는 야간열차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는 땅이 넓어서 바로 옆의 주(州)로 이동하더라도 적게는 6~7시간, 많게는 하루 가까이 기차를 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야간에 타고 아침에 도착하는 식으로 시베리아 열차를 주로 이용한다. 즉, 시베리아 열차 자체는 총 9288km에 달하지만 사람들은 모스크바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 다니지 않는다. 시베리아 열차의 핵심은 동쪽 종점에서 서쪽 종점까지의 유장한 여행이 아니라, 황량한 유라시아의 곳곳에 마치 점처럼 뿌려져있는 도시들을 이어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을 잇는 모습은 바로 4500년 전에 시작된 실크로드에서 시작되었다.

실크로드의 본질은 고립

원래 실크로드는 쭉 이어지는 도로가 아니라 사막 속에 고립되어 점(點) 같이 흩어진 도시를 이어주는 단거리의 교역로였다. 지금은 실크로드라고 하면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며 빠르게 물류가 이동하는 하이웨이(highway)를 떠올린다. 그런 교통수단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한(漢)나라 때에도 중국에서 로마까지 단번에 가는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막에 고립된 오아시스의 각 도시와 그 다음 도시를 이어주는 간선도로 같은 역할을 했다. 건조한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형성된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초인적인 노력이 그 실크로드의 기반이 되었다. 바로 고립이라고 하는 자연지리적인 한계를 극복한 산물이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낙타 등에 짐을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반의 길은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를 관통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바로 신장의 남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과 북부의 준가르 사막 사이를 잇는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 등 3가지의 길이 그것이다.

사막 도시의 생존과 평등성이 바탕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굳이 멀쩡한 길을 놔두고 사막을 지나가야 했을까. 원래는 신장 북부에서 알타이산맥으로 이어지는 초원지역을 따라서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오고갔던 초원 루트가 발달해있었다. 수천 년간 사용했던 초원 루트를 버린 배경에는 한나라의 고육지책이 숨겨져 있다.
흉노족이 장악한 초원 루트를 피하기 위해 흉노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막 근처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즉, 흉노의 발흥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상황에서 고립 지역을 서로 잇는 사막 루트를 택한 것이 실크로드였다.

이렇게 실크로드는 본래 장대한 대륙을 연결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변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된 도시들이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뚫은 것이다. 중국과 로마를 왕래하는 대상(隊商)이나 무역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한 번에 오고간 사람들은 중세 이후 마르코 폴로 같은 여행자나 국가·종교 차원에서 파견한 사신이나 신부 같은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었다. 이렇듯 실크로드는 사막 근처에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살던 사람들이 열악한 자연환경을 딛고 서로 네트워크를 구축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공존을 하려고 만든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실크로드는 바로 고립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고립과 그들 사이의 평등성에 있었다. 한나라가 이 지역을 서역이라고 명명하고 진출하긴 했지만, 거점 위주로 점령을 할 수 있었을 뿐, 실질적인 지배를 할 수 없었다.
약 4500년 전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생긴 이 사막의 오아시스들은, 몽골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생기기 전까지 각자의 나라를 지키면서 살아왔다. 이렇듯 대륙을 잇는 실크로드의 네트워크는 마치 인터넷(WWW)처럼 하나의 중심이 없이 서로 이어지는 단거리의 교역망에 근거하였고, 교역의 네트워크는 고립된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연대를 하여서 만든 것이다.

고립이 ‘실크로드’란 소통을 낳다

한동안 우리에게 실크로드는 낭만이었다. 하지만 그 낭만은 근대 이후 중앙아시아로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 실크로드의 본질은 고립이었고 그 고립을 극복하고 소통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지금은 지나간 과거의 문명들과 그 속의 보물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점철된 실크로드는 근대 이후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였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제안했다. 다른 서구의 열강과 달리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어 제대로 된 식민지를 개발할 수 없었고, 그 대안으로 내륙을 통하여 중국에 이를 수 있다는 구상을 하게 됐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식민지라 함은 으레 바다를 통하여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리히트호펜은 대륙을 관통할 수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제안했고, 여기에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느낌을 주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게임(The Great Game), 중국의 일대일로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의 욕망이 투영된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정한 실크로드의 주인공은 서구 열강도, 중국도 아니다. 바로 사막이라는 고립을 뚫고 살아남아 문명을 이은 주체는 바로 중앙아시아의 토착민들이다. 수천 년간 유라시아의 각 지역에 고립되어 살면서 점같이 고립되어 있던 사람들을 이었던 하나하나의 선들이 모여서 실크로드를 만들어냈다.
마치 인터넷 웹처럼 서로 평등하게 서양인·동양인과 같은 인종의 구분 없이 각자의 고립된 상황을 뚫고 만들어낸 정보와 물류의 산물이다. 코로나19로 나라 간 이동이 격감해 고립 생활을 하게 된 지금, 우리는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사람들 간의 교류와 소통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절감한다.

과거의 실크로드 그리고 유라시아 횡단 열차는 낭만이 아니다. 그리고 삶의 여유를 즐기며 주유천하를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생사의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과물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그리고 광활한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도시들을 필사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 그 진정한 의미였다. 살고 싶다면 연결되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소통과 교류가 막힌 지금, 우리에게 고립을 딛고 수천 년을 이어온 실크로드의 진정한 지혜를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이 고립된 사회를 연결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실크로드의 진정한 시작이 아닐까.


강인욱 필자

어려서부터 고고학자를 꿈꾸며 살아왔고, 지금도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매년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 등을 다니며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유라시아 역사 기행』,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