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히데요시가 되겠다.”
8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물러나겠다고 한 뒤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71세) 당시 관방장관이 했다는 얘기다. (<이코노미스트> 9월 19일자) 히데요시, 우리와는 악연인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다. 그때까지 스가가 자신의 역사적 역할모델로 삼고 있던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1540~1591년)였다고 한다.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의 이부(異父) 동생, 말하자면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었다. 일본 센고쿠(戦国) 시대 (15세기 말~16세기 말) 및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 유수의 무장이자 다이묘(大名)였으며,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었다.
일본사 전공자 사이에선 ‘히데요시보다 그가 먼저 죽지 않았다면 히데요시의 치세가 좀 더 안정적으로 더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 히데나가는 종잡기 어려운 그의 형과는 달리 온후하고 신뢰감을 갖게 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정무-군사 분야에서 소질을 발휘했는데, 특히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세력의 이견을 거중 조정하는 중재력을 발휘하는 재간이 있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2~1616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등 훗날 도쿠가와 진영을 형성하게 되는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을 끌어안고 함께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히데나가의 그런 막후 중재 수완이 크게 작용했다.

'히데나가'에서 '히데요시'로 변신

아베 신조 제1차 정권 때 총무상을 지냈고 제2차 정권에선 7년 8개월 이상 제2인자인 관방장관으로 막후에서 아베의 장기집권에 큰 기여를 한 스가의 행보를 보면, 그가 히데나가를 역사적 역할모델로 삼아 왔다는 얘기가 그럴 듯해 보인다.
스가야말로 막후 중재를 통해 “정치는 (머리)수(數)”임을 제대로 보여준, 협상과 중재력이 달인 경지에 오른 현실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 대변인이기도 했지만, 지난해 4월 나루히토(徳仁) 천황 시대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 글자를 들어 보이며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레이와 아저씨’로 각인되기 전까지는 대권 주자가 아니라 그저 참모였을 뿐이다.

그런 스가가 이제 히데나가가 아닌 히데요시의 자리에 올랐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했고, 1592년에 조선침략(임진왜란)에 나섰다. 히데나가는 바로 그 전 해에 병으로 죽었는데, 그가 히데요시의 대외침략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히데요시는 히데나가 없이 강행한 침략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를 황폐하게 만들고 그의 치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히데요시가 된 스가는 어떤 행보를 보일까?

물론 히데나가와 스가는 다르다. 히데나가는 최고권력자의 형제였고 유력한 다이묘였지만, 스가는 그런 면에선 가진 게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히데나가와 스가의 평면비교를 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닮은 점이 있을 뿐이다.

과도 관리내각? 스가 정권의 개막?

일본 정가의 한편에선 스가 정권이 내년 9월로 끝나는 아베 전 자민당 총재의 잔여임기 기간을 관리하는 과도적 ‘잠정정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선 그가 자신만의 야망을 펼치는 ‘본격정권’을 꾀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는다.

아베의 후계가 처음부터 스가였던 것은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63세) 당시 정조회장이 거의 아베로부터 총리직을 ‘선양’받을 것처럼 보였다. 대중적 인기는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63세) 전 간사장이 훨씬 더 높았지만, 그는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선 거의 왕따 수준의 소수 파벌 수장이다.
전부터 아베의 대항마였던 이시바는 자신이 집권하면 아베 총리가 연루된 재임 당시의 모리토모·가케 학원, ‘사쿠라를 보는 모임’ 관련 비리를 재조사할 뜻을 밝혔다.
아베 정권 당시 사립학교에 대한 국유지 불하와 관련해 총리 친구에게 엄청난 부당이익을 안기고, 불법으로 학과 증설을 인가했으며, 정부예산을 사적인 지지자들 접대에 남용하고도 거짓말과 공문서 조작으로 은폐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다 관련 공무원을 자살로 내몬 이 사건들은 아베 정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이 사건들을 재조사한다는 것을 아베 등 자민당 주류는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러니 이시바의 집권은 ‘절대불가’였다.

아베로부터 “레이와 시대는 여기에 있는 기시다 씨의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공개적으로 들었던 기시다 후미오는 빈약한 발신력(당내 발언권이나 존재감)과 코로나19 사태와 관련된 긴급재난지원금 처리 방식을 둘러싼 알력 등으로 막판에 밀려났다. 스가 옹립을 주도한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81세) 간사장 등은 조만간 있을지 모를 총선에서 기시다 총재 ‘간판’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봤다. 스가 옹립은 ‘차선책’이었다고 아사히신문(9월 4일자)은 전했다.

자민당 내 유력 7개 파벌 가운데 5개 파벌이 니카이 간사장 선도 아래 철석같이 뭉쳐 스가를 밀어주었고, 총재선거에서 이변은 없었다. 그 결과 무파벌이라던 스가가 짠 내각은 철저히 이들 파벌들이 각료 자리를 나눠먹는 파벌 안배 공식에 따랐다. 우선 “아베 없는 아베 내각”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아베 내각의 각료 체험자가 (총리를 포함해) 총 21명의 각료 중 16명이나 됐다. 새 얼굴은 5명뿐이다. 그 5명도 아베 전 총리의 친동생으로 방위대신이 된 기시 노부오(岸信夫, 어릴 때 기시 집안에 양자로 갔다. 그들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도 어릴 때 기시 집안에 양자로 갔다) 등 새로울 게 없는 인물들이다. 니카이파, 아소파, 호소다파, 다케시타파, 이시하라파 등 5개 파벌들이 세력과 기여도에 따라 각료 자리를 적당히 나눠가졌다.


21명의 각료 중 우익단체 ‘일본회의’의 멤버도 15명으로, 아베 내각 때와 달라진 게 없다. 10월 1일 스가 총리가 임명한 일본 ‘학술회의’ 새 회원들 중에 이 회의가 추천한 6명을 빼버린 사건과 그로 인한 ‘학문의 자유 침해 논란’을 보노라면, ‘사상 통제’까지도 아베 정권을 빼닮았거나 한술 더 뜬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6명 가운데는 <그래도 일본인은 전쟁을 택했다>는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역사학자 가토 요코(加藤陽子) 도쿄대 교수도 들어 있다. 그가 배제당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 치안유지법의 예비검속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은, 이른바 ‘공모죄’법(조직적인 범죄의 처벌 및 범죄수익의 규제 등에 관한 법률) 제정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학술회의 멤버 배제는 아베 정권 때부터 진행됐는데, 당시 관방장관이던 스가도 이미 그때부터 그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봐야 한다.

한반도 포함한 대외정책은 그대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끄집어내 김정은 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공언한 스가 총리의 최근 유엔총회 화상 연설, 그리고 “일제 강제동원피해자(징용공) 재판과 관련된 일본 가해기업 재산 매각을 중단하지 않으면 한국이 준비 중인 한·중·일 정상회담에 스가 총리가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외무성 간부 얘기로 보건대, 한일 관계 및 대(對)한반도 정책에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유엔에서의 첫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일본인 납치문제를 거론하며 무조건 만나자는 것은 정말 만나서 ‘해결’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문제를 부각하고 압박하는 정치공세에 가깝다. 이것도 아베가 써왔던 수법이다.
징용공 관련 발언도 여전히 한국 정부의 항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역시 문재인 정부를 ‘좌파 용공’으로 몰며 적대시해온 일본 집권세력의 자세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에 대한 밀착, 즉 미일동맹 강화와 경제의존도가 높은 중국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 기조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전문가인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학 교수도 지적했듯이 외교경험이 없는 스가 정권의 주 관심사는 대외정책보다는 역시 ‘국내’정책이다.

중의원 해산, 조기 총선 가능성

스가가 잠정정권 관리자로 끝날지 본격정권을 창출해 장기집권을 꾀할지는, 우선 그의 양대 과제라 할 코로나19 위기 대처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 경제의 회생 성적에 달려 있다. 하지만 당장은 새 총리 등장에 따른 집권당 지지율 반등을 ‘중의원 조기해산을 통한 총선거’로 연결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어차피 내년 9월이면 자민당 총재 잔여임기가 끝나고, 10월에는 4년의 중의원 임기도 끝나 총선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뻔히 정해진 일정대로 가서는 스가 총리에게 본격정권 수립의 승산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집권당 지지율이 올라가는 총재(총리) 교체효과가 지속되는 동안(9월 16~17일 전화여론조사 결과 내각 지지율 65%) 여세를 몰아 중의원 해산, 조기총선을 감행하고 거기서 압승을 거둬야 비로소 자신의 본격정권을 꾸릴 수 있게 된다. “결점들이 드러나기 전에 중의원을 해산해서 결판을 내야 한다. 가을을 넘기면 그 다음이 없을 것이다”는 당내 의견도 있지만, 당장 총선을 치를 경우 매우 불리해질 연립 공명당은 ‘11월 중순 이후’를 선호한다.

'無파벌'의 파벌정치 역설

파벌이 없다는 스가가 이번 총재 선거에서 유력 파벌들의 일치(담합)로 압승하면서 몇 가지 기록을 세웠다. 아사히신문(9월 17일자)에 따르면 우선 1955년 자민당 결당 이래 자민당 출신 총리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무파벌 인사가 총리가 됐다.
1996년에 바뀐 지금의 소선거구-비례대표제로 당선된 의원 출신으로 이전의 중선거구제를 경험하지 않은 총리도 그가 처음이다. 스가는 아키타(秋田)라는 혼슈 북서부의 오지 현(縣) 출신 첫 총리이기도 하다. 시 의회 의원 출신으로 총리가 된 이로는 전후(戰後)엔 오이타 시의회 의원 출신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에 이은 두 번째.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수장을 지낸 부모나 조부모의 정치적 기반을 물려받은 ‘세습’ 정치인이 아닌 자민당 출신 ‘비세습’ 정치인 총리로는 1989년의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
현직 관방장관에서 바로 총리가 된 것도 아베 총리에 이은 두 번째. 또 호세이대(法政大) 출신 총리도 그가 처음이고, 자민당 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을 경험하지 않은 총리로도 2007년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이후 그가 처음이다.
이런 다양한 기록을 세웠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일본 정계에서 그만큼 드문 일이고, 또한 그가 총리가 되는 게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스가는 ‘흙수저’ 출신

스가가 ‘흙수저’ 출신이라는 얘기가 한동안 떠돌았고, 그게 그의 정치자산의 일부로 치부됐다. 그는 아키타 시골의 빈농 출신에다 도쿄에서는 골판지 마치코바(町工場, 소규모 마을공장)에 다니는 등의 빈궁과 역경 끝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실상은 아키타에서 딸기농사를 지어 돈을 벌고 고향 브랜드 딸기로 그곳 출하조합장까지 한 꽤 성공한 농가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일본 정치판에서 그는 흙수저에 가깝다. 혼슈 북쪽 끝단에 가까운 지방의 시골 출신에다 학벌도 별로고 집안도, 정치인으로서의 이력도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나 대다수 동료들에 비하면 내세울 게 없다.
그의 전임자인 아베 전 총리만 봐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년)나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1901~1975년) 등 총리 출신의 유력 정치인을 외조부로 두었고, 병사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됐을 외무대신 역임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를 아버지로 두었다.
아베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그와 겨룬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63세) 전 간사장이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정조회장도 쟁쟁한 세습 정치인 가문 출신이다. 게이오대를 나온 11선 의원인 이시바의 아버지는 돗토리현 지사와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낸 9선의 기시다는 아버지가 통산성 직원이던 시절 뉴욕에서 생활하다 돌아와 와세다대를 나온 뒤 중의원 의원이던 아버지 비서를 하다 스가보다 3년 앞선 1993년에 중의원이 됐다.

스가는 그런 기준에 비기면 영락없는 흙수저다. 2차 대전 말기에 만철(만주철도) 직원으로 있다가 만주에서 패전을 맞고 고향으로 돌아와 딸기 농사로 나름 성공한 그의 아버지는 딸기 농사를 가업으로 장남인 스가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농사에 관심 없던 스가는 그곳 고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가라는 농업대학엔 가지 않고 가출하다시피 해서 도쿄로 갔다. “도쿄에 가면 뭔가 바뀔 것 같아서”라는 희망 하나 들고. 마치코바를 다녔으나, 너무 힘들어 두 달 만에 그만뒀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호세이대 법대 정치학과에 들어가 역시 온갖 고생을 하며 졸업한 뒤 1973년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다가 2년 만인 1975년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는 생각으로 정계에 입문해 호세이대학이 주선한 동창생 소개로 자민당 중의원 의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小此木彦三郎)의 비서가 된다.

"수완 좋은 냉철한 리얼리스트"

오코노기의 비서가 된 그는 그야말로 인생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비서로 11년간 근무하게 되는데, 1983년에 오코노기 의원이 통상산업대신이 되면서 그도 ‘대신 비서관’이 되고 1987년에 오코노기 의원 지역구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의회 의원이 됐다. 2기에 걸친 시의원 활동을 하다 요코하마시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오코노기 의원이 1991년 사망하자 그의 대역을 하다시피 하며 비서관 시절에 맺어 놓은 정·관·재계 인맥을 활용해 수완을 발휘, 사실상 ‘밤의 요코하마 시장’ 소리까지 들었다. “정적을 만들지 않는 노련한 중재자”, “싸움꾼”, “수완 좋은 냉철한 리얼리스트”…
스가는 그렇게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 1996년부터 중의원 의원 생활을 하며 더욱 노련해지고 단단해졌으며 2002년께 납북자 구출 의원연맹에서 아베 신조를 만난 뒤 중재라는 이름의 ‘정치적 술수’는 만개한다.

1998년 자민당 총재선거 때 자신이 소속됐던 헤이세이연구회 회장 오부치가 아니라 라이벌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밀었고, 가지야마가 패하자 그는 간사장이던 가토 고이치 파벌에 들어가 2000년 당시 총리였던 모리 요시로를 퇴진시키려 ‘가토의 난(亂)’에 가담했다. 가토파가 분열하자 다시 반가토파에 들어갔으며, 당 바깥세력인 공명당과 손을 잡기도 했다.
“‘이(利)가 있다’고 판단하면 스가는 융통무애로 당 바깥세력과도 손을 잡았다.”(아사히신문 9월 18일자) 그러니까 그는 본래부터 무파벌주의자가 아니라 이 파벌 저 파벌을 전전하다 나중에야 파벌을 버린 사람이다. 왜 버렸을까? 파벌에 의지해서는 “이(利)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듯한 세습 집안 배경도, 재산도, 학벌도, 당내 기반도 없고, 지명도도 낮은 그는 파벌정치로는 최고가 되기 어렵다고 봤을 것이다. 탈(脫)파벌을 선언한 그는 파벌정치의 폐해를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키웠다. 무파벌을 표방하며 파벌들 사이를 중재하고 조종하면서 힘을 키워 자신을 그 중심에 세우는 길. 그가 파벌 자체에 무관심했을 리는 없다. 그는 아베 제1차 정권 때 총무상, 제2차 정권 때 관방장관을 하면서 정치인과 관료들을 ‘아베 일극(一極)’으로 줄 세우면서, 은연중 그리고 사실상 자신의 파벌을 만들었다. 그 길을 열어준 무기는 그가 장악한 인사권이었다.

스가를 '히데요시'로 만든 인사권 장악

“그는 관료 인사를 정책 추진의 엔진으로 삼았다.”(아사히신문 9월 19일자)
예컨대 오키나와 주민이 반대하고 있는 오키나와 본도(本島) 기노완의 후텐마 미군 해병대기지의 헤노코 이전을 밀어붙이기 위해 ‘매립의 프로’인 국토교통성의 기술관을 방위성으로 이동시켰다. 이처럼 정부 각 부서의 간부 약 700명을 일원적으로 관리하는 내각 인사국이 아베 제2차 정권 2년째인 2014년에 설치됐다. 이른바 ‘관저(官邸) 중추’(스가가 수장인 내각관방. 우리나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가 인사권을 한 손에 쥐게 된 배경이다.
“정부가 하려는 일에 대신(장관)이 시건방진 얘기를 하면 갈아치우겠다.” 이런 말을 스가는 거의 공공연하게 해왔다. 실제로 자신이 추진한 ‘고향 납세’(도시 거주자가 자신의 고향이나 지자체에 기부를 하면 소득세·주민세 등을 공제해 주는 제도)에 딴지를 건 총무성 담당국장을 출세 코스에서 배제시켰다. 스가의 지론인 농협개혁과 관련한 협력 의뢰를 거절한 금융청 장관은 1년 만에 교체됐다. 각 부처에 ‘내통자’를 깔아놓고 언동을 감시, 보고하게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0여년 무파벌을 표방해 온 스가의 당내 입지는 약하지만 거꾸로 그 개인의 구심력은 갈수록 커졌다. 요체는 인사권 장악 덕인데, 제2차 아베 정권에서 스가와 가까운 무파벌 소장의원들이 차례차례 ‘정무 3역’에 기용됐다.
2017년 내각 교체 때는 처음 입각한 지방창생대신과 국가공안위원장이 스가의 사람들이었다. 그 공안위원장이 오코노기 하치로(小此木八郎)인데, 그는 스가를 비서로 채용함으로써 정치인 스가를 발탁하고 키운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의원의 아들이다. 의혹이 불거져 조기 사임했지만, 무파벌의 경제산업상, 법무상 등도 스가가 밀었던 사람들이다. 스가가 주도한 부대신 및 정무관 인사에서도 그가 밀어준 무파벌 의원들이 발탁됐다.

“신인 의원 시절 면접관이 스가 장관이었는데, ‘자네, 호세이대 출신이군. 자민당에서 호세이 출신 의원은 드물어. 함께 힘을 합쳐 한번 해보지 않겠나’ 하고 말을 걸어 온 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년간 쭉 지도를 받고 있다.”

스가는 자민당 내부에 이른바 ‘스가 그룹’으로 불리는, 느슨한 것 같지만 결속력이 좋은 파벌 아닌 파벌을 만들어냈다. 이 조직은 스가가 개인적으로 발탁한 젊은 의원들로 구성돼 있는데, 중의원에 15명, 참의원에 11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세이대 동창에게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아니다. 도쿄대 출신이 5명이어서 호세이대 출신 4명보다 더 많다. 스가의 선거구인 가나카와 현과 연고가 있는 소장의원이나 동창(호세이대 OB), 시의원 등 지방의원 경험 뒤 무파벌·비세습 국회의원이 된 사람, 정치적 뿌리에서 접점이 있는 중견·소장 의원들이 그 중심을 이룬다. 대체로 정치적 지반이 약하고 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스가 파벌의 핵이 된 ‘가네샤 회’

이 조직 가운데 하나가 ‘가네샤 회’이다. 무파벌의 4선 이하 의원들로 구성돼 있다. 가네샤(Ganesha)는 힌두교 신(神)인데,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신이다. 장사, 지혜, 문화와 예술을 관장하고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등 만능의 신으로 일컬어진다.

8월 28일 아베 총리가 사임하고 사흘째인 31일 10여 명의 무파벌 소장의원들이 스가의 국회사무실을 방문했다. 가네샤 멤버인 그들은 “은혜 갚을 기회를 달라”며 스가에게 총재선거 입후보를 요청했다. 그 만남 뒤 멤버의 일원인 야마모토 도모히로 방위 부대신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다. “힘없고 외톨이 독불장군이었던 우리의 정치활동을 스가씨가 딱하고 가엾게 여겨 도와주었다.”
그 조직은 느슨해서, 총재선거 때가 돼서야 그 전모를 파악한 멤버들이 있을 정도였지만 스가는 특이한 용병술로 결속력을 다져 놓았다. 새로운 형태의 파벌이랄까. 그 결속력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스가의 인사권이었다.

스가는 2009년 총선 때 가까스로 5선에 성공한 뒤 자신이 속한 파벌(고치카이[宏池会]=기시다파)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무파벌이 됐다. 그때가 아소 다로(麻生太郎, 지금 부총재 겸 재무상) 정권 시절이다. 2008년 ‘리먼 쇼크’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크게 흔들리면서 결국 총선 뒤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데, 스가는 당시 지역구에서 540여 표의 근소한 차로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이에 앞서 자민당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가는 “리먼 쇼크에 대응해 조기 중의원 해산, 총선으로 대처하자”는 당내 의견을 묵살하고 경제대책부터 세워 급한 불을 끈 뒤 총선으로 가자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스가는 2009년 시간을 끌다 총선에 대패하고 아소가 퇴진했던 사태에 상당한 책임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조기 총선으로 갈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문제는 코로나19 위기 와중에 제대로 대책도 세우지 않고 선거를 치를 경우 자칫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이다.

관광 활성화, 디지털廳이 돌파구?

스가가 중의원을 조기 해산하고 총선에서 이기려면 뭔가 다른 걸 보여줘야 한다. 기존의 금융완화와 대규모 재정투입 정책(‘아베노믹스’) 유지 토대 위에서 그가 지금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코로나19 대책, 이와 연관된 행정전산화 및 노동생산성 제고 등을 위한 ‘디지털화’, 부서 간 횡적 연계·협력을 가로막고 있는 ‘다테와리(縦割, 조직의 종적 분할구조)’의 개혁, 그리고 ‘고 투 트레블(Go to Travel)’ 강화, 외국인 입국제한 완화 및 스포츠경기 관중 입장 확대, 농촌-지방 중시 전략 등이다.

하지만 디지털화 강화 주장과 시도는 아베 정권 때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성과가 없었고, 다테와리 구조개혁 소리도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다. 다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기존 아날로그 식 대처의 한계로 인한 위기감이 컸던 만큼 ‘디지털청(廳)’ 신설은 ‘스가 개혁 과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도다. 코로나19 관련 규제 완화는 심각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지만 코로나 재확산과 경제활동 위축이라는 악순환을 부를 위험성이 있는 일종의 도박이다. 그런 도박이라도 해야 할 만큼 스가 정권으로선 뭔가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에 쫓기고 있다. 그런 절박감이 한일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

한승동/ 메디치미디어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