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지구상에서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이 가장 잘 작동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인구 850만의 강소국이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풍광이나 경제력보다 ‘국민투표’라는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자랑할 정도다. 스위스는 4개의 공용 언어(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로망슈어)에다 26개 칸톤(州)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다. 그러다 보니 국가적 합의를 이루는 게 중요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자투표는 비용이나 시간에서 그리 어려운 방식이 아니다. 한국도 장차 헌법 개정 등을 통해 폭넓게 도입할 여지가 많아 보인다. 정치 불신이 심화되고 진영 싸움이 치열해지고 있어서다.
<피렌체의 식탁>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살고 있는 김진경 필자의 칼럼을 통해 스위스의 국민투표 방식을 소개한다. 김 필자는 “한국어로 번역된 용어도 출처에 따라 뒤죽박죽이라서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정리해 봤다”고 말한다. 스위스는 27일 또 한 차례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번 안건은 이민 제한, 야생동물 사냥, 남성 유급출산휴가, 공군 전투기 구입 등이었다. [편집자]

#국민투표 하느라 가장 바쁜 나라 
  연방, 칸톤, 시 단위마다 각기 시행
#26개 칸톤으로 이뤄진 연방 국가
  정치 대리인보다 국민 뜻이 더 중요
  '절반의 직접민주주의' 시스템
#여성 참정권,남성 유급출산휴가 등
  국민 고정관념이 법 옭아매기도
#투표 안건은 사회심리 비추는 거울
  이민자 제한, 늑대 사냥, 전투기 구입…
  그 속에서 기존 질서의 '공포' 느껴 

스위스版 “늑대가 나타났다”

“엄마가 시장 다녀오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있어라. 아무에게나 문 열어주면 안 된다. 특히 늑대를 조심해야 해. 목소리가 거칠고 몸이 시꺼메서 구별하기 쉬울 거야.”
엄마 염소는 신신당부를 하고 떠나지만, 목소리를 바꾸고 몸에 밀가루 칠을 한 늑대에게 아기 염소들은 속아 넘어갔다. 벽시계 속에 숨었던 막내만 빼고 다 잡아먹혔다. 돌아온 엄마는 낮잠 자고 있던 늑대의 배를 갈라 아기 염소들을 꺼낸 뒤 그 안에 돌을 채워 넣고 꿰매버린다. 잠에서 깨어난 늑대는 우물가에 갔다가 무거운 배 때문에 우물 속에 빠져 죽는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는 구전되던 이야기를 독일의 그림 형제가 1812년 책으로 펴낸 것이다. 200년 넘게 지난 지금 스위스에서 이 이야기의 현대적 버전이 부유하고 있다. 한동안 스위스 땅에서 사라졌던 늑대가 1995년 이후 여기저기서 목격되더니, 요즘 약 80마리로 늘어났다.
이 늑대들은 알프스 산악 지대에서 매년 300~500마리의 양과 염소를 잡아먹는다. 울타리를 세워도, 경비견이 지켜도 소용이 없단다. 어떻게든 침입할 틈을 찾아내 가축을 물고 간다는 늑대는 이야기 속 늑대와 겹쳐진다.
늑대 배를 가른 엄마 염소의 역할은 스위스 연방 의회가 맡았다. 의회는 지난해 9월 사냥법을 개정해 통과시켰는데, 필요할 경우 늑대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냥 허용 대상에는 늑대뿐 아니라 스라소니, 비버, 도요새 등의 야생동물도 포함됐다.

개정 사냥법 놓고 5만 명이 반대 서명

다른 나라였다면 법안 통과 후 금세 늑대 사냥이 시작됐겠지만, 스위스에선 일이 다르게 진행됐다. 사회민주당, 녹색당 등 좌파 정당과 환경단체, 동물권 운동가들이 이 법을 시행하면 안 된다며 국민 투표에 부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개정 사냥법이 공포된 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 성립 요건을 충족시켰다. 언론 기고문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일도 시작했다. 야생동물이 실질적 해를 입히기 전에 죽이는 건 도덕적이지 못하고, 인간은 멸종위기의 야생동물과 함께 사는 걸 배워야 한다는 거다. 거리 곳곳에는 동물에 총구가 겨눠진 그림과 함께 ‘NEIN(아니오)!’라고 쓰인 포스터가 붙었다.

개정 사냥법에 찬성하는 측, 그러니까 우파 정당과 농부 연합, 산악지역 거주민들의 논거도 만만찮다. 늑대의 위협 때문에 스위스 농업과 관광업이 타격을 받고 있고, 다 죽여 없애자는 게 아니라 겁을 줘서 멀리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인간-늑대의 공존을 위해 더 낫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 평생 한 번도 늑대를 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도 늑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언제 사라졌다가 왜 돌아왔는지, 서식지는 어디인지, 사람을 공격하는지, 생물종 다양성이란 게 뭔지, 그리고 늑대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표에 늑대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취리히 도심에 사는 유권자도 알프스 산악지대의 농부 못지않게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고민의 결과는 다가오는 9월 27일(현지시간) 국민투표 결과로 나온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위스 국민투표의 힘이 바로 이것이다. 정치의 생활화, 혹은 생활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일상의 문제를 직업정치인이란 대리인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국민 개개인은 모두 다 입법자의 지위를 갖는다.

‘절반의 직접민주주의’엔 얽힌 사연

유럽 한가운데에 있는 이 작은 나라는 어쩌다 이처럼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게 됐을까. 왜 스위스 국민들은 알프스 절경이나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보다도 이 정치시스템을 더 자랑스러워할까. 알려지지 않은 단점은 없을까.

스위스는 연방 국가다. 26개 칸톤(canton, 州)으로 이뤄져 있는데, 원래 이들은 각기 독립된 나라였다. 그러다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치기로 했다. 13세기에 칸톤 3개가 처음 연맹을 맺은 것을 시작으로 점점 규모를 키워가다, 1848년 연방헌법을 제정하며 지금의 스위스가 탄생했다. 한 배를 타긴 했지만 뿌리는 다르다는 생각은 지금도 굳건하다.
이탈리아어권인 칸톤 티치노 출신은 독일어권인 칸톤 취리히에서 사실상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취리히 출신이 프랑스어권인 칸톤 제네바에 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공식 언어만 4개(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나 된다. 26개 각 칸톤이 독립적인 입법·사법·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이유다.

따로 노는 칸톤들을 조화로운 하나의 국가로 묶는 게 ‘연방’ 시스템이다. 상하원으로 구성된 연방의회에는 각 칸톤에서 고루 뽑힌 의원들이 들어가 있다. 여기에서 선출된 7인의 연방 각료가 연방내각을 이룬다. 이 7인은 외교부, 환경부 등 7개 부처의 장관(임기 4년)을 맡는데, 7인이 돌아가며 1년씩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래서 스위스 정치 기사를 보면 툭하면 대통령 이름이 바뀌어 있다. 정치에 그토록 관심 많은 국민이 대통령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권력을 한 사람에게 독점적으로 주지 않고 분산시킨다는 점에서 이것은 ‘합의 민주주의’ 또는 ‘회의체 정부’라고 불린다.

스위스의 연방 체제는 분명 대의 민주주의적 요소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독립성을 중시하는 스위스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안은 의회와 내각에서 처리하게 내버려두고, 중대하고 결정적인 사안은 국민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흔히 국민투표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이 제도는 사실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국민제안(Popular Initiative)이고, 다른 하나가 국민투표(Referendum)다. 대리인을 두되 중요한 건 스스로 결정하는, 절반의 직접 민주주의가 이렇게 탄생했다.


전 세계에서 투표가 가장 많은 이유

국민이 직접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첫째, 국민제안은 말 그대로 국민이 직접 법안을 내놓는다는 건데, 일반 법률이 아니라 헌법 개정안만 여기 해당한다. 헌법 개정을 원하는 유권자들이 위원회(7~20인)를 꾸린 뒤, 개정안을 만들어 제출하고 18개월 동안 10만 명의 동의 서명을 얻으면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국민 다수, 그리고 칸톤 다수라는 ‘이중적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 그 법안은 통과된다. 예를 들어 지난 2014년엔 소아 성애자가 아동 관련 직종에서 근무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이 국민 64%, 칸톤 전체의 동의를 얻어 통과됐다.

둘째, 국민투표는 이미 결정된 법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의무적 국민투표와 선택적 국민투표가 있다. 의무적 국민투표란 정부가 헌법 개정이나 국제기구 가입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역시 이중적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통과된다.
선택적 국민투표란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대해 국민이 반대 의견을 내고 투표에 부쳐 전체 국민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법률이 공포된 지 100일 안에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모으면 그 요건이 충족된다. 투표자 다수가 찬성하면 다 만들어진 법안도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위의 표와 같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방 차원의 투표였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칸톤(주) 단위에서, 또 그보다 작은 게마인데(시) 단위에서 각기 시행된다. ‘전 세계에서 투표를 제일 많이 하는 스위스인’이란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돌아서면 투표다. 그래서인지 투표율은 별로 높지 않다. 지난 5년간의 평균 투표율은 45%를 약간 넘는다. 한번 부결된 안건이라도 이론적으로는 다시 투표에 부쳐질 수 있다. 하지만 서명 개수 등의 요건을 맞추는 게 까다로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무기 구입, 출산휴가까지 투표해야 하나?

투표는 서너 달에 한 번, 몇 가지 안건을 모아 한 번에 몰아서 한다. 투표 날짜라는 건 엄밀히 말하면 ‘투표 종료 날짜’다. 그 전부터 우편, 인터넷 등으로 투표를 할 수 있다. 9월 27일 끝나는 투표는 지난 2월에 이어 올 들어 두 번째 진행된 투표다. 5월에 예정됐던 건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됐다.
그래서 이번엔 밀린 안건이 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유권자들이 총 13가지 안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연방 차원에서 5개, 칸톤 취리히 차원에서 2개, 취리히 시 차원에서 6개 안건이 있다. 그 중 스위스 전국의 유권자가 표를 던질 수 있는 연방 차원의 안건은 다음과 같다.

1. EU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안
2. 야생동물 사냥을 허용하도록 개정된 사냥법
3. 자녀가 있는 가족에 감세 혜택을 늘리는 법안
4. 남성에게 유급 출산휴가를 2주 주는 법안
5. 새로운 공군 전투기 구입 법안


첫 번째 것은 국민제안, 나머지 넷은 선택적 국민투표 안건이다. 하나같이 흥미롭지만, 이런 사안까지 국민투표에 부쳐지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것도 있다. 신형 전투기 구입 법안이 그것이다. 2030년까지 60억 스위스프랑(약 7조6180억원)을 들여 전투기를 최대 40대 구입하자는 내용이다. 의회가 지난해 12월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전투기 구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약 6만6000명의 서명을 모아 제출해 국민에게 최종 결론을 묻게 됐다.
반대자들은 전투기 유지비까지 고려하면 정부가 말하는 60억 스위스프랑이 아니라 그 4배의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돈을 기후 위기 대비나 교육, 연금에 쓰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투기 구입을 지지하는 쪽에선 중립국 스위스가 독립을 지키려면 무기를 현대화해야 하는데, 공군의 현재 주력 무기로는 군사적 억지력을 확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국방 관련 이슈를 국민 결정에 맡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가안보에 관한 국민투표는 지금까지 총 45건 있었고, 최근 30년간 첨단 전투기를 구입하자는 국민투표만 이번이 세 번째다. 2014년엔 스웨덴 사브 사(社)에서 31억 스위스프랑(약 3조 9370억원) 규모의 그리펜 전투기 22대를 사자는 내용의 국민투표가 부결된 바 있다. 심지어 1989년에는 스위스 군대를 없애자는 국민제안이 투표에 부쳐졌는데, 부결되긴 했지만 찬성률 36%라는 충격적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국방개혁을 촉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급출산휴가 놓고도 시각차 뚜렷

남성에게 유급출산휴가를 2주 주자는 법안에 반대해 국민투표를 한다는 것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스위스는 여성의 유급출산휴가도 겨우 15년 전에야 통과됐을 정도로 복지 수준이 낮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보장하는 남성 출산휴가(스웨덴은 1974년 도입)에 대해 이제야 겨우 의회가 합의를 했는데, 일부 국민이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비용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연간 2억3000만 스위스프랑(약 2900억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이를 낳는 건 개인의 선택이니 경제적 부담도 개인이 져야 한다는 게 기업 쪽의 입장이다.
둘째는 스위스의 전통적 가족상 때문이다. 남성은 일하고 여성은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성 역할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다. 과거보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 대다수가 출산 후 파트타임 근무로 바꾼다.

다른 나라에선 파격적인 법안을 밀어붙여 사회 전반의 고정관념을 바꾸기도 하지만, 스위스에선 국민의 고정관념이 법을 과거에 붙들어 매어 놓는 일이 간혹 생긴다. 대중의 손에 모든 걸 맡기는 직접 민주주의의 어두운 일면이다.
1971년에서야 스위스 여성에게 처음 참정권이 주어진 게 대표적인 사례다. 1958년에 연방 의회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쳤는데, 1959년에 남성들만으로 이뤄진 유권자들이 주동해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시켰다. 직접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단어지만, 그에 속한 구성원이 민주적이지 않으면 그저 허울뿐인 제도가 될 수 있다.


스위스 국민투표 연대기

발전적으로든 퇴보적으로든, 스위스 국민투표는 스위스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그렇다면 실제로 투표에 부쳐진 안건은 몇 개나 되고 그 결과는 어땠을까?
국민이 직접 헌법개정안을 내놓는 국민제안의 경우, 1893년 최초 투표 이후 지금까지 총 217회가 있었는데 그 중 22건이 통과됐다. 국민이 주체가 된 개헌 성공률이 약 10%라는 뜻이다. 정부가 개헌을 주도하면서 국민에게 의견을 묻는 의무적 국민투표의 경우, 1848년 이후 실시된 198건 중 148건이 통과됐다. 국민이 정부의 뜻에 따른 게 75%에 이르는 셈이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선택적 국민투표의 경우, 1875년 이후 지금까지 총 189건 있었고 그 중 109건만 가결됐다. 의회가 만든 법안의 약 42%는 국민들의 반발로 빛을 못 봤다는 의미다. 스위스의 국민투표 연대기에서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배아줄기세포부터 소뿔 제거까지

그 가운데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 법안은 과학연구 분야의 결정을 국민투표가 좌우한 첫 사례다. 이 법은 2003년 말 의회에서 통과됐으나 녹색당과 낙태 반대론자들의 반발로 시행이 보류되다가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2018년 있었던 소뿔 관련 국민제안은 언뜻 들으면 황당한 안건이라 당시 큰 화제가 됐었다. 축산 농가에선 대개 송아지의 뿔을 제거하는데, 그 이유는 축사에서 뿔 없는 소가 자리를 덜 차지하고 관리하기도 더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뿔을 뽑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우유 품질에도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뿔 제거에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냥 반대한다고 축산업자가 따를 리 없으니, 소뿔을 뽑지 않고 놔두는 사람에게 보조금을 지급하자는 게 법안 내용이었다. 부결되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소뿔이 주목을 받았던 인상적인 케이스였다.


투표 안건들, 사회심리를 비추는 거울

다시 이번 국민투표로 돌아가 보자.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건 이민자 제한 법안이다. 이른바 ‘스위스 판 브렉시트’라고 불리는 이 안건은 EU 시민이 스위스로 이민 오는 걸 제한하자는 내용이다.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이 이 법을 지지하면서 만든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EU를 상징하는 노란 별이 그려진 벨트를 찬 사람이 스위스 땅 위에 앉아 땅을 조각내는 그림이다. EU가 스위스를 망가뜨린다는 메시지가 분명하다. 스위스는 EU 회원국이 아니지만 EU와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협정’을 비롯해 7개 협정을 패키지로 맺고 있다. 이 안건이 통과되면 무역, 연구, 교통 등 다른 6개 분야의 협약도 영향을 받는다. 스위스 법무부 장관인 카린 켈러-주터는 이 발의안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완전한 도박”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이곳에서 투표권이 없는 외국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 안건을 자세히 살펴보는 건, 이것들이 2020년 스위스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미국계 스위스인 정치학자 다니엘 워너는 이번 투표의 키워드가 ‘공포’라고 말한다. 양을 물어 죽이는 늑대가 사람도 공격할 거라는 공포, 외국인이 스위스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스위스 복지시스템을 남용할 거란 공포가 그것이다. 합리적인 공포는 나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근거 없는 두려움이나 누군가 옆에서 조장한 공포는 끝내 혐오로 발전해 국민통합을 가로막는다. 스위스 사회가 품고 있는 공포의 본질이 궁금해진다.

※투표 결과

27일 저녁 이번 투표 결과가 공개됐다. 전체 유권자는 약 540만명, 투표율은 60%에 육박했다. 그간의 평균 투표율(45%)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코로나19 때문에 국민투표가 한번 미뤄져 누적된 이슈가 많았던 점이 유권자들의 참여를 부추겼을 것이다.  

개표 과정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건 새로운 전투기 구입에 관한 국민투표였다. 찬성이 50.1%로, 반대보다 약 8700표를 더 많이 얻어 가까스로 통과됐다. 6년 전 있었던 전투기 구입 관련 투표에선 반대 53%, 찬성 47%라는 적은 차로 부결됐었고,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 전쟁보다 전염병 대응이 더 중요하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위스 공군은 8700표 차이 덕분에 7조원을 넘게 들여 새 전투기를 마련하게 됐다.

‘스위스판 브렉시트’로 불린 이민제한법은 반대 62%로 부결됐다. 스위스가 영국의 전철을 밟게 될 우려는 일단 사라졌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한 티치노 지방에서 이민제한법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았다는 건(찬성 53%),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거라는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반(反)이민정서가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자녀와 관련한 두 가지 안건은 상반된 결과를 보였다. 우선 남성 출산휴가 법안은 찬성 60%로 통과됐다. 이로써 스위스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남성 출산휴가가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양성 평등이라는 가치에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 하지만 자녀 세액공제 법안은 반대 63%로 부결됐다. 이 법안이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가정이 아니라 부유한 가정에 더 많은 혜택을 준다는 반대측 논거가 주효했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논란이 있다. 스위스는 아이들이 뛰어 놀긴 좋지만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고 여성이 직업 경력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은 나라다. 이 두 안건과 투표 결과가 스위스의 당면 과제를 보여준다.   

전국민이 늑대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던 사냥법은 반대 52%로 부결됐다. 산악지대 농부들은 늑대를 쏘는 대신 더 튼튼한 철책을 세워야 한다. 동물보호론자들은 두 손 들고 이 결과를 환영했지만, 어쩌면 수백년 전의 무서운 늑대 이야기가 다시 아이들 동화 속에 등장하진 않을지 궁금해진다.  


김진경 필자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미국에서 만난 스페인 출신의 남편과 2011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한국 및 스위스 매체에 문화 다양성(cultural diversity)에 대한 글을 쓴다.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고, 심리적 이방인의 새로운 시각을 글에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