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반도체 산업 강국이다. 대외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반도체 세계시장을 주도해왔다. 미중 반도체 기술 전쟁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피렌체의 식탁>은 미중 반도체 전쟁을 집중 분석하기 위해 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권석준 박사의 글을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권 박사는 마지막 칼럼에서 한국의 정부, 기업, 연구소가 취해야 할 자세와 전략을 제시한다.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한 발 앞서 행동하고, 두 발 앞서 생각하며, 세 발 앞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첨단 하이테크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고유 기술과 차세대 잠재적 아이템을 확보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초당적인, 중장기적인, 그리고 전략적인 R&D 투자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민간 기업들은 핵심 인재·기술을 잘 지켜나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 기술 종속 이전에, 학문 종속이 시작되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반드시 기초과학의 뿌리를 지켜야 할 시기다. [편집자]

[권석준의 ‘반도체 전쟁’①] 중국이 20년 가꿔 온 꿈, 10년 안에 무너질 수 있다
https://firenzedt.com/?p=10059
[권석준의 ‘반도체 전쟁’②] 중국의 옵션 셋: 버티기 게임, 갈라파고스化, 백기투항
https://firenzedt.com/?p=10179
[권석준의 ‘반도체 전쟁’③] 中 기초과학의 도약…美 독주시대는 끝나는가?
https://firenzedt.com/?p=10313

#美 엔비디아, 반도체 업체 ARM 인수
  화웨이 지키려는 중국, 반대 가능성  
  'ARM 차이나' 국유화 시도할까
#반도체 전쟁 속 한국의 생존 전략
①정부, 잠재적 아이템 확보에 집중
  日기업과 제휴, 원천 기술 키워야
②기업, 中 벗어난 생태계 구축 절실
  핵심 기술·인력, 철통 보호 필요
③신소재 연구서 중국에 밀리는 형국
  '선택과 집중'으로 학문 종속 피해야

미국의 화웨이 제재조치가 내려진 지난 15일에는 반도체 업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큰 사건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그래픽카드(GPU) 및 인공지능(AI) 가속기 업체인 엔비디아(NVIDIA)가 영국의 시스템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을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ARM은 인텔과 더불어 전 세계 CPU 아키텍처 시장을 양분해왔다.

ARM의 CPU 아키텍처는 비단 PC나 모바일 APU뿐만 아니라, 임베디드 컴퓨터, 사물인터넷(IoT), 슈퍼컴, 클라우드 시스템 같이 다양하고 광범위한 분야로 확장될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인텔의 x86 CPU가 CISC (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 기반인데 비해, ARM의 CPU 설계는 RISC (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 기반이기 때문이다.

현재 모바일 APU의 경우 삼성, 퀄컴, 애플의 모바일 칩이 모두 ARM 라이선스로 제작되고 있다. ARM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재 인텔이 지배하는 x86 기반 CPU 시장에 참여해 노트북 및 저(低)전력 PC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가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는 향후 CPU와 GPU 시장에서 격변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해준다. 엔비디아는 ARM의 CPU 설계 IP(지적재산권)를 바탕으로, 자사의 GPU 및 AI용 텐서 코어 (tensor core) 기술을 집어넣어 반도체 라이선스 시장에서 강자가 되려 할 것이다. 삼성, 퀄컴 같은 업체들 입장에서는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는 향후 CPU 시장 진출을 넘어, 중장기적으로 ARM IP를 이용하여 인텔과 AMD가 과점하고 있는 서버용 칩 시장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영국과 중국은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대해 반대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중국은 지난 8월 ‘ARM 차이나’의 이른바 '독자경영 선포' 사건을 활용해 협상력을 확보하려 할 수 있다. ARM 차이나의 지분율은 중국 51%, 해외 49%인데, 전임 CEO인 앨런 우를 본사에서 해임한데 항의해 중국 정부에 자사 경영을 위탁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중국 정부가 만약 앨런 우를 유임시킨 후 국내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중국 명: 中芯국제집적회로) 케이스처럼, 이 회사를 사실상 국유화하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이 회사의 CPU 설계 IP가 화웨이를 살리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웨이는 그동안 ARM 아키텍처로 CPU를 만들어 자사의 스마트폰을 비롯한 거의 모든 모바일 기기를 제작해왔다. ARM과의 거래가 중지되면, 모바일 기기의 신작 출시가 중지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중국 정부가 만약 ARM 차이나를 국유화한다면 ARM가 자랑하는 CPU 설계 관련 IP는 모두 유출될 것이다. 이는 ARM을 인수하려는 엔비디아에겐 불확실성의 증폭 요인이 돼 미중 반도체 전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글로벌 업계에서의 합종연횡과 기술 경쟁이 치열해질 경우 미중 두 나라와의 교역은 물론, GDP에서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국이 정부, 기업, 연구자 차원에서 다각도로 대비해 나가야 할 이유다.

전쟁 이길 지렛대, 건실한 생태계서 비롯

미중 기술 전쟁이 격화될수록 한국 정부는 첨단 하이테크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고유 기술과 차세대 잠재적 아이템을 확보하는데 더욱 집중해야 한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는 우리가 주도하는 부분에 대한 격차를 초격차로 벌려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초당적인, 중장기적인, 그리고 전략적인 R&D 투자가 활발하게 추진돼야 한다.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한 발 앞서 행동하고, 두 발 앞서 생각하며, 세 발 앞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어떠한 난관에 처하더라도, 한국은 기술 전쟁을 이겨나갈 지렛대를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글로벌 기술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핵심 요소 기술을 갖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다툼은 결국 바이오, ICT, 그리고 양자컴퓨터 같은 다양한 기술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대용량 데이터의 고속, 저(低)전력, 초정밀 처리 기술의 혁신 싸움이 될 것이다. 한국은 G2 거인들의 기술 혁신 싸움에서 어떤 표준과 어떤 로드맵을 구상할 것인지 매 순간 기술적 추이를 주의 깊게 모니터링 해야 한다. 한국 제조업은 이미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global supply chain)에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로부터 분기돼 나갈 중국의 표준과 로드맵에 대한 모니터링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시기의 최고 수준 기술을 반드시 여러 개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네덜란드 ASML을 필두로 한 서유럽 국가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건실한 생태계 형성 노하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ASML은 EUV 노광 장비 시장에서 85~90%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ASML처럼 제품을 구매자가 먼저 찾아가 읍소해야 하는, 그런 '수퍼 을'의 지위를 갖는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정부가 앞장서서 조성해 나가야 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우리 정부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영난에 봉착한 일본 기업들을 눈 여겨 보았다가 전략적 제휴를 시작으로 그런 기업들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업 다각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한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려는 일본의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들을 선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한국의 산업 생태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또한, 새로 출범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부가 수출 규제를 철폐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보인다면, 한일 관계를 점진적으로 회복시켜 반도체 분야에서 상호 보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맞서 한일이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정부, 차세대 원천 기술에 투자해야

정부는 또한 차세대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기초 연구개발 투자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범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일명 소·부·장)의 국산화를 가속하기 위한 연구개발 투자를 증액해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소·부·장 기술들의 더 아래 단계에 있는 차세대 원천 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현재의 로직 반도체 아키텍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반도체 기술에 대한 원천 연구가 산학연 합동으로 더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연구 장비 지원과 인건비 증액을 추진해야 한다.

그중 주목할 부분을 몇 가지를 하나씩 예시해 보겠다. 차세대 반도체 원천 기술의 주요 부분이다.
첫째, 인간의 신경계(神經系)를 모사해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멤리스터 (memristor) 기반의 뉴로모픽 컴퓨터 (neuromorphic computer)가 있다. 둘째, 자성 반도체 기반으로 전자가 아닌 양자역학적 정보인 스핀 (spin)이나 스커미온 (skyrmion)을 처리하는 스핀트로닉스 (spintronics)가 있다. 셋째, 기존의 탑다운 (top-down) 패터닝 방식이 아닌 나노 재료의 자기조립 (self-assembly)을 이용하는 바텀업 (bottom-up) 방식의 초극미세 패터닝이 있다. 넷째, 전자 대신 광자 (photon)을 이용하는 광(光)컴퓨터가 있다.

이들 차세대 기술은 기업 입장에서 기술적 구현의 난이도가 높고 투자금의 회수가 불확실하다. 그런 만큼 정부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술 IP와 핵심 데이터의 확보에 주력해 기술 개발의 마중물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의 ASML은 하루아침에 그런 기술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기술적 생태계의 심층을 이루는 기초과학 투자를 더 다양하게, 더 깊게, 더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함을 잊으면 안 된다. 투자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는 중국을 따라가기 힘들다. 그래서 기술 중심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네덜란드 사례를 잘 연구해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네덜란드는 경제 규모가 우리보다 작지만, 첨단 기술 경쟁력은 오히려 더 뛰어난 나라다.

대외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반도체 산업 발전 방향의 중심을 잡아 나가면서 각 단계별로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를 하며 기술적 우위를 유지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민간 기업 및 대학, 연구기관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필요하다면 성균관대처럼 공과대학에 ‘반도체 학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차기 브레인 코리아(Brain Korea) 방식을 추진해야 한다. 반도체 과학기술과 관련된 국내외 석학에 대해선 국립대 차원의 초빙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중국 IT기업에 대한 의존도 줄여야

2020년대 글로벌 기술경쟁 체제가 출렁이는 가운데, 앞서 언급한 엔비디아의 ARM 인수 소식은 국내 업계에도 전략 수정을 강요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 특히 ARM과 전략적 제휴를 해왔던 삼성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 소식은 또한 SoC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노리고 있는 다른 업체들 입장에서도 본격적인 경쟁구도 개편을 의미한다. 인텔과 AMD로 양분되던 시장의 판도 역시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다. (※SoC는 소프트웨어 온 칩(Software on Chip)의 약자, 여러 개의 시스템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융합하여 한 개의 칩에 구현한 것이다)

관건은 엔비디아의 ARM 투자 결정이 미래시장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향후 시장 변동성이 엔비디아의 경영 능력으로 통제 가능한 범위인지, 그리고 모바일 시장과 AI 데이터 시장의 성장 속도가 시장의 이해 범위 내에서 지속될 것인지 여부일 것이다. 한국 기업들, 특히 SoC 같은 시스템반도체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향후 기술 로드맵을 주의 깊게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해 발간한 ‘미중 반도체 전쟁의 산업적 영향력 평가 보고서’에서, 두 나라의 반도체 기술 전쟁이 지속될 경우, 중국뿐만 아니라 반도체 산업 전체적으로 매출 감소, 투자 저하, 시장 축소 등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중장기적으로는 중국 반도체 산업과의 커플링으로 인한 불확실성 요소를 줄여나가는데 집중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중국이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면 단기적으로는 중국 업체들이 차지했던 해외 시장을 한국 기업들이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란 거대 시장이 홀로 고립되는 것은 결코 득만 되는 상황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반도체와 관련된 주요 업체들의 수익성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중 양국에서 사업을 전개 중인 한국 업체들의 경우 미중 반도체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수익성 악화가 불가피하다.

한국 기업들은 앞으로 미국의 공격 대상이 된 화웨이는 물론 중국 IT 대기업의 장비/소재/소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거래선 대체, R&D 집중 투자를 추진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대기업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일례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여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국내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링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대만 등에 분포한 반도체 제조 및 장비·소재 기업들을 한국으로 불러 모아, 같은 지역에서 메모리반도체 제조와 더불어 향후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공정 효율을 높이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핵심 기술과 인력, 철통 보호 필요

이 과정에서 미국 기업보다는 일본 기업이 만드는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를 목표로 하는 중소기업에 힘을 실어주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런 클러스터링 전략을 실행하려면 산업자원부 및 관련 부처와의 세심한 협력이 필요하다. 일본 국적 기업들이 SK하이닉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 주도의 클러스터로 들어오려는데 대해 정부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 기업은 자신들의 핵심 기술 인력과 IP를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으면 안 된다. 중국은 미국의 기술 제재 압박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전방위로 공격적 비즈니스를 펼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전문가, 엔지니어들에 대한 노골적인 스카우트 공세가 불가피하다.

특히 대만 TSMC로부터 인력·기술 공급, 장비·재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처지인 SMIC는, 당연히 차선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대해 눈독을 들일 것이고, 특히 핵심 인력을 빼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 핵심 인력이 유출될 경우, 반도체 핵심 공정 및 설계 기술이나 차세대 소재 및 설계 기술들이 유출될 가능성은 상존하고, 최악의 경우 기술 유출 기업은 중국 쪽에 종속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이런 상황을 긴밀하게 모니터링하며 통제할 필요가 있다. 직업 선택의 자유에 따라 개인의 이직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그 인재가 핵심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이직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필자가 그 실례로 들고 싶은 인물은 2017년 SMIC의 공동 CEO로 영입됐던 량멍쑹(梁孟松, 1952년생)이다. 중국 측에서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스카우트했다고 알려져 있다. 량 CEO는 미국 AMD 엔지니어로 일하다, 1994~2011년 TSMC에서 파운드리 부문 R&D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후 2009년 성균관대 반도체공학과 교수가 됐다가, 2011~2017년 삼성전자의 시스템 LSI 사업 부문 부사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AMD는 물론, TSMC·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 방식과 기술 정보 및 노하우를 상당 부분 갖고 있다 보니, 량멍쑹은 SMIC 같은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핵심 인재였을 것이다. 실제로 량멍쑹 합류 후, SMIC는 28 nm(나노미터, 10억분의 1 m)에 멈춰 있던 패터닝 공정이 14 nm로 급진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중국 측의 핵심 인재 영입작정은 미국의 제재조치 때문에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거액의 연봉을 앞세운 SMIC의 스카우트 공세는 TSMC, 삼성전자, 그리고 중소 규모의 반도체 설계/공정/소재/장비 업체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9월 초, 한국의 한 구인‧구직 사이트에는 “중국에서 근무할 D램 설계자를 모집한다”는 구인 공고가 올라 왔는데, 자격 요건으로 “S·H 반도체 관련부서 근무자 우대”라고 적혀 있었다. 즉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기술 인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특히 구인 공고의 요구 업무에는 ‘10나노 DDR4 설계’라는 부분이 있었다. 중국의 반도체 업계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야흐로 중국 발 반도체 굴기는 핵심 장비, S급 핵심 인재 쟁탈전으로 번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민관 차원에서도 충분히 문제를 인지하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핵심 인재로 분류되는 반도체 엔지니어들과 R&D 공정 및 설계 인력의 처우 수준을 반드시 SMIC 이상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또한 기술 보안에 대해 사전·사후 대책을 대폭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신소재 분야, 선택과 집중으로 육성

한국의 반도체 원천 기술 역시 앞으로는 신소재 분야의 선행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는 걱정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3편에서 살펴보았듯, 중국의 R&D 투자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으며 연구개발 성과의 질과 양 모두 한국을 압도한다.

신소재 선행 연구와 관련해 한국과 중국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신소재와 관련된 가장 저명한 학술지인 Advanced Materials, Advanced Functional Materials 같은 경우, 매번 발간될 때마다 수십 편의 논문이 실리는데, 그중 절반 이상은 중국인이 주저자/책임저자이고, 15~20% 정도가 한국인이 주저자/책임저자이다. 나머지는 일본, 유럽, 미국 저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결국 신소재 연구개발의 싸움은 한·중 양강 구도로 흘러가는 모양새인데, 점점 중국인들이 그 비율을 높여가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가 크게 밀리는 형국이다. 아마 5년 안에 이들 신소재 기술과 관련된 저명 학술지의 중국인 저자 비율은 70~80%에 육박할 수 있다. 신소재와 관련된 재료과학, 반도체 소재, 물리학, 화학 분야의 저명한 저널, 예컨대 ACS Nano, Nature Materials, Nature Nanotechnology, Nature Photonics, Physical Review Letters 같은 학술지에서도 그런 추세는 비슷할 것이다.

재료과학뿐만 아니라 중국은 과학 전 분야에 걸쳐, 그것이 응용이든 기초든 가리지 않고 천인계획(千人計劃, The Recruitment Program of Global Experts), 심지어 만인계획까지 내세우며 국적에 관계없이 인재를 끌어당기고 있다.
특히 파격적인 인센티브에다, 상상을 뛰어넘는 고액 연봉을 앞세워 세계 수준의 A급, S급 학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대학 조교수급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풍족한 연구비를 받아서 몇 년 안에 하나의 랩에 50명 가까운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들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다. 잘 나가는 조교수는 한 해 받아 가는 인센티브가 자신이 속한 대학의 총장 연봉보다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
5명 랩에서 쥐어짜서 나오는 논문과, 50명 랩에서 공장 돌리듯 나오는 논문이 맞붙는다면,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된다.

투자 규모와 영역에서 밀린다면, 밀리는 쪽에선 자신이 잘하거나 잘할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양보다도 질에 주력해야 장기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은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거의 모든 연구 영역에 아낌없이 돈을 퍼붓고, 그 퀄리티도 뚜렷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으로선 이미 추월당한 분야에서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약간이라도 앞선 분야마저 몇 년 안에 따라잡히게 될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만 보면 반도체 기술 자립의 뿌리가 되는 기초과학의 전쟁에서 중국을 이길 방도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한국 반도체 생태계의 가장 두려운 위기 시나리오 중 하나는 이공계 분야의 기초·응용 연구가 중국에 학문적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중국 정부의 연구비 펀딩 문제와 더불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의 편집진/평가자가 중국 국적 연구자들로 채워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중국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학자들이 많아져 학문적인 예속 가능성이 높아진다. 매년 수천 명에 이르는 한국 대학의 중국인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들이 학업을 마친 뒤 귀국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의 연구중심 대학들이 그나마 갖고 있던 R&D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자국 재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기초학문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를 계속 쏟아 붓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에 맞춰 무작정 따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부와 기업들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해 연구개발 투자를 최적화하되, 고부가가치 분야 선택, 초격차를 위한 전략적인 투자, R&D 인력의 고급화 및 정규직화, 세계 최고 수준의 처우 등을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기술 종속 이전에, 학문 종속이 시작되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반드시 학문의 뿌리, 특히 기초과학의 뿌리를 지켜야 한다.

연구비 지원 유혹에 넘어가선 안 돼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중국 회사든, 중국 정부든 우리 연구자들에게 연구프로젝트 참여를 개방하는 경우다. 연구비에 목마른 한국 연구자들이 중국 돈을 받을 경우, 연구 IP가 중국에 귀속되는 것을 막을 방도가 거의 없다. 지난 9월 초, KAIST의 어느 교수가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프로젝트 협약 조건을 잘못 이해해 자율주행차 첨단센서 기술인 라이다(Lidar) 원천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중국 정부나 공산당에서 관여하는 이른바 천인계획 프로젝트는 대부분 협약 조건에 독소 조항이 들어있다. 그것은 연구자가 중국 측과 연구 성과를 공유해야 하며, 나중에 논문이든 특허든 기술이전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중국 기업이 협상 우선권을 갖게끔 규정한 것이다. 중국이 눈독을 들이는 반도체 차세대 연구 분야에서 이런 계약을 요구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계약 조건을 꼼꼼하게 따지지 못하는 이공계 학자들이 연구비 지원 유혹에 넘어가 한순간에 기술 스파이로 전락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우리에겐 이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첨단 하이테크 산업을 둘러싼 미중 기술전쟁은 앞으로 반도체를 넘어 정보통신기술(ICT), 이동수단, 생명공학, 우주개발, 에너지 등 모든 분야로 확대될 것인데, 한국의 핵심 이익은 거의 모든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서 중국과 겹친다. 국가적 차원에서 핵심 이익을 지키려면 기존의 산업 정책을 개혁하고, 고급 인재 양성·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또한 정부의 R&D 지원을 보다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분야에 집중시켜 차세대의 파괴적 혁신 기술이 등장할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국 측에 기술 협상의 지렛대를 내줘서는 안 되며, 특히 그 상대가 중국 IT 공룡 기업들이어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권석준 KIST 책임연구원/ 공학박사

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공부한 뒤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으며 올 하반기에 교양 과학서 <빛의 과학>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