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 15일부터 중국의 최대 통신기업 화웨이(華爲)에 대한 추가 제재조치를 강행했다. 미국 기술을 부분적으로라도 활용한 제품을 미국 상무부의 사전 허가 없이 화웨이에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당연히 해당된다. 국내의 관련 업체들 역시 직간접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미국은 반도체 패권전쟁의 공세를 늦추지 않을 기세다. 최근에는 미국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업체인 ‘엔비디아’가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회사인 ARM을 인수토록 했다. 반도체 전쟁의 전선 확대를 예고한다. 화웨이의 우군이었던 대만 TSMC는 진작에 화웨이의 위탁 생산을 중단했고 미국은 중국 제1위 파운드리 업체인 SMIC 제재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중국의 꿈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피렌체의 식탁>은 미중 반도체 전쟁의 내막과 전망, 한국의 대응방향을 살피기 위해 권석준 박사의 글을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권 박사는 그동안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과 관련된 원천기술 연구에 매진해왔다. 권 박사는 "중국이 지난 20년 넘게 애써 가꿔 온 반도체 굴기의 꿈이 10년 안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편집자]

#우한에서 'HSMC'란 희대의 사기극
  반도체 굴기 향한 조급증 때문일 것
#미국, 화웨이 다음 타겟은 SMIC?
  파운드리 파트너 없이 생존 어려워
#기술·자금 사이클 빨라 추격자 불리 
  20년 공든 탑, 10년 내 붕괴될 수도
#中·홍콩에 대한 수출 비중 60%선  
  한국도 '차이나 리스크' 정비할 때

미중 반도체 전쟁이 뜨거워진 지난달 28일 중국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중국의 반도체 파운드리(설계가 끝난 반도체 칩을 위탁 생산) 회사인 HSMC(중국 명: 武漢弘芯반도체제조)가 3년 전에 거액의 투자를 받은 후 반도체 기술 개발을 해오기는커녕, 중국 정부의 투자금(보조금) 153억 위안(약 2조6000억원)을 가로챈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다는 내용이었다.

中정부 조급증 악용한 희대의 사기극 

우한에 공장을 짓던 HSMC는 중국의 제1위 파운드리 회사인 SMIC(중국 명: 中芯국제집적회로)를 넘어, 전 세계 파운드리 업계 1위인 대만 TSMC, 2위인 한국 삼성전자를 겨냥해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민 업체였다. HSMC는 2017년 11월 설립 당시, 1280억 위안(약 22조2600억원) 규모의 투자금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파운드리 업계에 샛별처럼 등장했다. 자국의 SMIC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던 기술 수준인 10nm 패터닝(※Patterning, 반도체 회로에 미세한 크기의 전자 회로를 새기는 공정)을 넘어, 중국 최초로 7nm 공정 양산을 2020년까지 단 3년 만에 성사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해왔다. (※1nm(나노미터)는 10억분의 1 m)
<조선일보 9월 4일자 보도 참도>

HSMC 사기극의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를 향한 야심과 조급증이 깔려있다.
2020년대가 시작된 이 시점에,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의 공통적인 핵심 기술은 단연코 초미세 패터닝(patterning)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미세 패터닝은 반도체 기판 위에 새겨지는 전자회로의 물리적 선폭을 10nm 이하로 축소시켜 실리콘 웨이퍼 위에 집적시킬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림을 그릴 때 더 작은 모눈종이를 사용하면 훨씬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더 작은 선폭의 회로는 단위 웨이퍼 당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시킬 수 있게 만들어준다. 한마디로 단위 웨이퍼 당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10nm 이하의 패터닝 장벽을 넘은 회사는 단 두 곳밖에 없다. 바로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뿐이다.

미중 반도체 기술전쟁을 벌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10nm 아래로 가야만 미국에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다. 신규 패터닝 기술과 경쟁력을 갖춘 수율(Yield), 그리고 양산 기술에 반도체 산업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10년 무렵부터 중국은 정부 주도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에 혈안이 됐고, 기술 잠재력을 갖춘 회사라면 집중적으로 투자를 밀어줬다. 이런 시기에 혜성 같이 등장한 HSMC는 중국 정부가 보기에 기술전쟁의 승리를 이끌 단단한 동아줄로 보였을 것이다.

반도체 굴기의 꿈에 영혼이 털리다

하지만 중국 제1위의 파운드리 업체이자 전 세계 4~5위인 SMIC의 최신 패터닝 기술마저 올해 상반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14nm 정도에 멈춰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SMIC도 못하고 있는 10nm 이하의 패터닝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회사라면, 중국 정부는 아마 영혼까지 갖다 바치겠다는 자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가 반도체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 몇 명에게만 HSMC의 인적 구성과 핵심 기술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맡겼다면, 이들이 전형적인 사기꾼임을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회사 설립자(리쉐옌)가 이 분야에서 잘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경력이 딱히 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유한 특허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투자 주체가 누구인지 불확실한 마당에 자칭 투자규모가 무려 22조원을 넘는다면, 거의 대만의 TSMC에 맞먹는 기술력을 갖추었다고 봐야 했다.

그런 회사는 중국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전 세계에서 TSMC와 삼성전자 두 곳만 갖고 있는 7nm 공정 기술을, 신생 업체가 어떻게 단 3년 만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그 확률을 생각했다면, 이 모든 팩트는 이들이 눈먼 투자자를 노린 사기꾼이었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반도체 기술 굴기에 눈이 먼 중국 정부로선 첨단 분야의 어디로인가 데드라인에 맞춰 뭔가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 회사의 번지르르한 제안에 앞뒤를 재지 못한 채 낚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기회도 적지 않았다. 애당초 회사 설립자 ‘리쉐옌’의 출신이 불확실하니 뒷조사를 더 철저하게 했어야 마땅했다. 또 TSMC에서 스카우트한 CTO 출신의 장상이(蔣尙義) CEO의 계약 조건을 더 잘 살펴보았어야 했다. 성과 달성에 대한 인센티브가 명시되어 있지 않거나, 조건이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中 첨단기술 산업의 허구성 노출?

늦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또 있었다. 지난 1월에 HSMC는 공장 건설 대금과 건설 노동자의 임금을 수개월씩 지불하지 못해 소송에 휘말렸다. 이 정도 상황에선 누구든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다. 지난 7월에는 우한시 정부가 “자금 부족으로 HSMC 반도체 프로젝트 좌초 위기”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펴냈지만, 후속 조치에 대해선 '추가로 투자하기 어려움' 정도로 애매하게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중국의 당정(黨政) 감찰기관들은 총체적으로 사기극 상황을 제대로 모니터링하지 못했다.

중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HSMC를 세운 창업자 리쉐옌의 행방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2017년 회사 설립자들이 장담했던 투자금 1280억 위안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HSMC 설립 후 3년 동안 기술 특허조차 하나 내놓은 게 없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히는 대목은 이것이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HSMC가 중국 업체 중 유일하게 보유 중이라고 자랑했던 7nm 공정의 최첨단 노광 장비가 은행에 압류됐는데, 알고 보니 이미 수년 전에 생산된 철 지난 장비였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중국 정부가 이 회사에 투자한 후 3년간이나 전혀 견제와 체크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일반 사기업에 투자하는 투자회사도 주기적으로 기업 실사(due diligence)를 하면서 꼼꼼하게 기술 진행 상황을 체크한다. 기업 실사가 아니라도,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주기적으로 개발 기술의 마일스톤(milestone, 중요한 단계)이 특허로 나오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만 특허관리 담당 기관인 국가지식재산권국(國家知識産權局)에서도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 한국 같았으면 꼼꼼한 관료들이 이런저런 안전장치를 만들어 놨겠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중국 정부 차원에선 수수방관하기만 했다. 피해 규모가 조(兆) 단위라, 회사 관계자는 물론 중앙·지방 관료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 같다.

필자가 HSMC 사기극을 이렇게 상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중국 첨단기술 산업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이런 사례는 2010년부터 중국 정부가 맹렬히 주도하고 있는 첨단 하이테크 산업, 특히 반도체 기술 분야 곳곳에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중앙 단위, 지방 단위, 회사 단위로 눈먼 산업 보조금과 재정·금융 지원이 중구난방 식으로 집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진핑(習近平) 정권하에서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strategy)로 설정된 국가적 프로젝트들을 2025년 데드라인 이전에 달성해야 하는 만큼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너나 할 것 없이 조급증에 빠져 있다. 필자가 중국의 반도체 기술 굴기가 내부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속사정을 알 수 없지만, HSMC 같은 사기 사건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화웨이와 SMIC ‘목 조르기’

중국의 반도체 기술 굴기를 둘러싼 논란은 미중 기술전쟁을 통해 또 한 번 뜨거워지고 있다. 지난 4일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이어,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 SMIC를 제재 대상으로 검토한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 미국 정부는 중국 최대의 반도체 업체이자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잇따라 발표했고, 지난 15일부터 추가 제재조치를 강행했다.

이에 따라 통신용 칩셋과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해온 화웨이는 더 이상 해외의 파운드리 업체에 자사 주문을 위탁 생산할 수 없게 됐다. 설사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을 찾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위험 감수와 중개에 의한 원가의 상승, 그리고 시간 지연이라는 요소가 추가돼 가격 경쟁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처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자국에서 칩을 생산할 수 있도록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를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려 할 것이다. 그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업체는 바로 SMIC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SMIC마저 숨통을 조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화웨이가 통신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의 설계에서 아무리 경험치를 쌓고, 설계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이것을 하드웨어 칩으로 만들어주고 수율 관리를 할 수 있는 파운드리 회사를 파트너로 두고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다.
미국 정부의 제재조치 전에 화웨이는 SMIC보다 TSMC에 주로 의존해왔지만, 제재가 현실화된 후에는 TSMC와의 거래가 대부분 차단되고 있다. 화웨이로선 자국의 SMIC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화웨이의 약점을 간파해 중국 반도체 산업의 목줄을 더 세게 조여가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SMIC 제재조치의 시행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예상해왔다.

SMIC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SMIC는 이미 미국 AMD,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에서 고위직 기술 책임자로 일하며 첨단 반도체 공정을 두루 경험했던 S급 핵심 인재들을 서둘러 영입해왔다. 예컨대 대만인 량멍쑹(梁孟松) 같은 인재를 CEO로 영입해 초미세 패터닝 공정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량멍쑹 영입 이후, SMIC의 초미세 패터닝 기술은 14nm까지 안착할 수 있었고,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두 회사만 밟아 본 7nm 이하의 초극미세 패터닝도 실현 가능할 것으로 낙관했다.

그런데 미국의 이번 제재조치로 인해 SMIC가 7nm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을 확률은 현저히 낮아졌다. 공정에 필요한 각종 광학계, EUV(Extreme UV) 같은 노광 장비, 펠리클 (pelicle) 등의 장비·부품을 자체 생산해 제품 퀄리티(quality)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21세기 들어 반도체 관련 분야의 기초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면서 그 성과를 계속 축적해왔다. 그렇지만 중국의 기술 생태계는 아직 단단하지 못하고, 선행기술도 상당한 궤도에 올라 있다고 보기 어렵다. 불행하게도 SMIC의 현실은 필자가 보기에, 중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SMIC의 자체 기술만으로는 7nm 이하의 초극미세 패터닝 단계로 진행하는 게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이 선택할 길은 셋 중 하나

그렇다면 향후 미중 반도체 전쟁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 미국이 대중국 기술 및 무역 제재조치를 강화해 나가면서 중국 정부는 급박한 처지에 몰리고 있다. 앞에서 말한 HSMC 사기극은 그런 조급증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요즘 전개되는 미중 반도체 기술전쟁은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사실상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 국면과 중국의 대응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제재조치 효과가 하나씩 굳어지면, 중국은 정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중국이 선택할 길은 세 가지 정도로 예상된다. 첫째는 자국 기술력만으로 사면초가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방안이다. 둘째는 모든 국가적 비전을 잠시 유보하고, 즉 굴욕을 감수하고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산업 질서의 그늘 밑으로 편입돼 선진 제조업 국가들의 공장 역할 정도로 연착륙을 시도하는 것이다. 셋째는 아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제3의 길, 즉 신개념 반도체 아키텍처 설계나 실리콘이 아닌 다른 종류의 반도체 신소재 개발 등을 추진하는 방안이다.

중국이 만약 첫 번째 옵션을 선택할 경우, 관건은 미국의 제재를 버티는 동안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자금력 확보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닌 중국 입장에서는 아무리 외환보유고가 3조 달러를 넘는다 해도 어느 순간에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반도체 굴기의 꿈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반도체 산업은 속된 말로 ‘돈 놓고 돈 먹기’ 싸움이라 할 만큼 기술과 금융의 사이클이 빠르게 돌아가고 투자자금도 막대하다.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자의 타이밍이다. 우선 기술의 사이클을 고려해 적기에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투자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 달이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 경쟁에서 뒤쳐지고, 이는 비용 상승 및 기술 격차로 나타난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제품의 세대에 격차가 생기면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 규모는 격차에 비례하는 생산비용 격차를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격차가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다면, 생산 제품은 원가보다 더 낮은 가격에 팔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생산하는 족족 재고로 남게 되어 사실상 매몰비용이 된다. 투자가 제때 이루어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적기에 투자를 회수할 수 있느냐다.

그런데 양산된 제품의 순조로운 판매를 통해 제때 회수돼야 할 투자자금이, 거꾸로 재고로 남는 상황이 되면 자금 회수는 점점 어려워진다. 투자자금에 대한 금융비용도, R&D 투자재원도 모두 마련하기 힘들어져 선두권과의 격차 해소는 더욱더 어려워지게 된다. 요컨대 차세대 제품에서의 기술 경쟁에선 선두기업에 몇 수를 접고 들어가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한 차세대 원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특허 제휴 같은 방식으로 경쟁 기업의 신기술 IP를 확보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진다. 외부에서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해주지 않는 한, 그 반도체 생산라인은 ‘돈 먹는 하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압박과 제재로 인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점차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있다. 내수 시장의 확대를 통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 변동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될 경우 중국 기업들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정부 보조금이 없다면 존폐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 중국이 지난 20년 넘게 애써 가꿔 온 반도체 굴기의 꿈이 10년 안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일본의 사례다. 미일 사이에 10년간의 반도체 협정을 맺고 미국의 무역제재를 받긴 했지만,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중국처럼 기술적인 압박을 심각하게 받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이런저런 요인이 겹쳐 반세기도 안 돼 사실상 붕괴하다시피 했다.


한국 업체들, 매출 감소-수익 악화 예상


미중 반도체 기술 전쟁은 한국 입장에서 결코 좌시할 사안이 아니다. 2019년 기준, 삼성전자의 매출 가운데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7조3000억원으로 삼성전자 연간 매출의 3.2%였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연간 매출 중 약 3조원을 차지했는데, 이는 전체 매출의 11.4%에 이른다.

삼성과 SK의 매출을 중국의 하이테크 산업으로 확대하면 대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삼성전자의 경우 중국 매출 비중이 24%(2019년 기준)에 달하고, SK하이닉스는 무려 46.4%나 된다. 앞으로 대중국 반도체 기술 및 제품 거래가 중단되면, 삼성전자도 막대한 타격을 받겠지만, SK하이닉스는 더 심각한 상황에 몰릴 수 있다.
또한 국내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의 대중국 매출 의존도는 해마다 높아지는 추세를 보여 왔다. 2019년 현재, 한국의 반도체 관련 수출 가운데 57%는 중국(39%), 홍콩(18%)으로 쏠림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시장에선 당분간 사업 리스크가 매우 커질 전망이다.

미국의 제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에 걸리지 않으려면, 한국의 많은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중장기적으로는 대중국 수출 중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곧바로 시장의 상실을 뜻한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한 방책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기업들은 매출 급감과 누적 적자에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중국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녹록치 않다. 미국의 제재 조치로 인해 수출 쪽에서 먹구름이 잔뜩 끼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중저가인 중국산 소재·부품의 수입으로 유지되어 온 한국의 반도체 관련 산업의 가격경쟁력 역시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업체들이 차지해왔던 반도체 수출시장의 일부를 한국 기업들이 대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글로벌 시장 자체가 축소돼 많은 기업들의 매출 급감과 함께 그동안의 설비 및 기술개발 투자가 과대 비용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장기적으로 대중국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어떻게 차이나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을까?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과연 미중 기술전쟁의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중국은 내수 시장만으로 반도체 산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중 간에 반도체 기술 격차는 결국 해소될 수 없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중국이 왜 이렇게 심각한 기술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고, 그들이 외치는 반도체 기술 굴기가 어떤 미래를 맞을 것인지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그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권석준 KIST 책임연구원/ 공학박사

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공부한 뒤 MIT 화학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광(光) 컴퓨터, 양자 컴퓨터 등의 차세대 IT소자 원천 기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60여 편의 논문을 해외 저명 학술지에 게재했으며 올 하반기에 교양 과학서 <빛의 과학>을 출간할 예정이다.